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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35화 (135/369)

135화

우선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두 여인이었다. 철컹철컹거리는 쇠고랑 소리. 두 사람의 손목에는 핑크빛의 쇳줄로 이어진 고리가 달린 채 움직일 때마다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손목의 고리를 한참동안 말없이 내려다보던 은별. 그런 은별과 마찬가지로 한참동안 말없이 고리를 내려다보던 예나. 이윽고 은별이 홱하고 사나워진 눈빛으로 예나를 쏘아보았다. 철컹하고 손목의 고리를 들어 보이며 은별이 물었다.

"이거 어떻게 할 거야?"

"뭐가요?"

"후! 당신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된 거거든요? 지금?"

은별의 단도직입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나가 조금만 질투를 절제하고 은별이의 상자에서 푸른 반지를 빼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이런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이런 물건일 줄 알았겠어요?!"

하지만 예나도 나름대로 억울한 입장이었다. 세상에… 아무리 흑마법사고 다른 세상에서 살던 여인이라지만 이토록 이질적인 느낌이 감도는 물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설사 이런 물건인 줄 알았다 할 지 언 정 예나도 은별과 커플 쇠고랑(?)을 차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었다.

"…으으, 진짜!"

"아무튼… 이거 어떻게 해야 풀리는 건데요? 방법이 있을 거 아녜요?"

예나가 물었다. 그녀는 흑마법사가 마지막에 하던 얘기를 전부 제대로 듣지 못했다. 50일 연애 커플이랍시고 갑자기 선물 상자를 내주던 흑마법사의 언동에 정신이 팔렸던 탓이었다. 허나 은별은 그녀와는 달리 이 핑크빛 수갑을 해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

"……?"

"……."

"뭐…예요? 왜 말이 없어요…?"

"아…… 몰라! 진짜!"

그렇기 때문에! 은별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커플을 위해, 커플을 위한, 오로지 커플다운 사랑을 위해 만들어진 명분의 수갑이었지만, 의도치 않게 그것을 이성도 아닌 동성과 착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수갑을 해제하는 방법은 오로지 단 하나… 키스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5분 동안 쭈욱.

"대체 뭔데 그러는데요…?"

은별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내심 불안한 듯 예나가 물어왔다. 은별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키스….'라고 옹알거렸다. 그러나 그 옹알거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예나가 '네?'하고 의문의 눈빛을 보내자,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은별이 폭발하며 소리쳤다.

"키스해야 한다고! 5분 동안!"

"!!!!!"

예나가 화들짝 놀라면서 수갑을 안 차고 있는 나머지 한 팔로 자기 몸을 감쌌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나며 마치 벌레보듯 은별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 변태!"

"누가 변태야! 이런 일을 가지고 온 게 누군데!"

"그럼 내가 아니었으면 민국이에게 이걸 사용했을 거란 뜻이잖아요. 이 변태!"

그 말에 은별은 무의식적으로 '윽…'하고 입을 닫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었다. 연애를 하는 커플로서 처음 받는 커플 선물이었고, 그 도리를 생각해서라도 민국이에게 곧장 껴보라고 선언했을 테니까.

'하지만! 나도 이런 물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단 말이야!'

민국과 이걸 착용하지 않은 게 진정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예나와 착용하여 이 물건의 존재 이유를 깨달았으니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찬스가 된 거라 볼 수 있나? 은별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그렇다고 너랑 이걸 끼고 마음은 없었거든?!"

이 고리를 현재 같이 착용하고 있는 상대, 그 상대가 비단 한예나이기만은 바라지 않았던 은별이었다. 물론 그건 한예나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두 여인은 강아지와 고양이 같은 대립 상대였다. 결코 서로가 돕고 돕는, 우정의 친구는 될 수 없었다.

"어쨌든… 해결책을 찾아보기로 해요…."

"안 그래도 그럴 거야…."

한참을 티격태격대며 말다툼하던 두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다툼을 나눠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반쯤 포기한 상태로 두 사람은 대안을 찾기로 했다.

'가장 올바른 해제 방법으로는 키스가 있고….'

분명 흑마법사가 만든 제품이라면 보통이 아닐 물건이었다. 강제력을 행사해서 풀어낼 수 있는 물건일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와 키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절대 안 돼! 죽어도 안할 거야! 저얼대로!'

다짐하는 은별이었고, 그건 한예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여자랑 키스를 하느니… 차라리 제 목을 그을 거예요.'

한예나가 이 정도의 각오를 짊어질 정도면 얼마나 은별을 경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여인이 각자 결심을 한 듯 서로를 마주보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생각이 절묘하게 공통되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은별과 예나가 서로를 쳐다본 채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좋아…."

"좋아요."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곧장 몸을 일으키는 두 여인이었다. 서로에게서 반대 방향으로 걷는 두 사람! 당연지사 탄성력 있는 그 수갑에 말미암아 두 여인은 서로에게 당겨지며 어깨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쿵!

"아야!"

"앗…!"

머리까지 부딪혀 머리를 양손으로 쥐어 잡는 은별. 예나 또한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아파하다가 소리쳤다.

"아프잖아요 어딜 보고 걷는 거예요?"

"그러는 너야말로 왜 반대로 걸어가는데? 내 쪽으로 걸어와야지!"

"제가 왜 그쪽이 의도하는대로 움직여야 하는데요? 그쪽이야 말로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걸어오세요!"

말다툼이 끝났다고 해서 신경전이 끝난 건 아니었다. 물론 신경전이 계속 이어지는 이상 말다툼은 쉴 틈 없이 반복될 것이었다. 또 한 번 지지고 볶듯 말싸움을 나누던 두 사람이었다.

소리 지르며 싸우길 어연 10분, 결국 제 풀에 지친 두 사람이 쓸데없이 기력을 허비한 것마냥 힘든 표정을 지었다. 은별이 헉헉거리면서 벽면에 손을 짚고는 말했다.

"헉헉…. …이러면 안 돼. 지금은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하아, 하아… 저도 하고 싶은 말이에요."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하기로 한 두 사람!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건 어려울 터이니 대안을 제안해 투합하기로 했다.

"가위바위보로 해!"

"좋아요 지지 않겠어요."

불타오르는 승부욕 속에서 두 여인이 각자 가위바위보를 준비했다. 이윽고 '가위 바위….'하면서 중얼거리는 두 여인의 손에 셋 중 한 개의 무기가 장착되었다.

"보!"

"!"

"앗…!"

소리를 외치며 셋 중 한 개를 드러낸 은별과 예나였다. 반대로 패배자로서의 당혹스러움을 머금은 것은 다름 아닌 은별이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보. 예나가 내민 것은 가위였다.

"이겼어요! 제가 이겼어요!"

예나가 흥분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답지 않은 면모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적개심을 가진 상대한테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은근히 흥분되는 일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패배자로서 자존심에 선이 그어진 표정을 지었다. '으으…'거리며 분해하던 은별이 기뻐하는 예나에게 소리쳤다.

"3세판!"

"네? 그런 게 어딨어요!"

"몰라 몰라! 3세판 안하면 나 안 움직일 거야! 흥!"

때를 쓰는 강은별! 남자가 보았다면 정말이지 귀엽다고 느꼈을 테지만, 아쉽게도 상대는 라이벌이자 적이라 볼 수 있는 예나였다. 예나는 진심으로 화를 표출하면서 소리쳤다.

"좋아요! 3세판 해줄게요! 대신 이번에 지고 나서 구차한 변명하지 마세요!"

"그런 변명 안 해! 내가 너인 줄 알아?"

티격태격대며 다시 한 번 가위바위보를 시도하는 은별과 예나였다. 두 판째는 은별이 이겼고 세 판째는 예나가 이겼다. 네 판째에선 은별이 다시금 상황을 역전시켰고 다섯 번째 판에서는 예나가 완전히 이김으로서 승리를 쟁취해냈다.

"이겼어요! 제가 완!벽!히! 이겼어요! 이제 더 이상 말하기 없기예요!"

"으으으으으…!"

더 변명을 대면 구차했기에 패배를 인정하는 은별이었다. 예나는 은별에게서 처음으로 승리의 기쁨을 맛본듯 여유를 가졌다. 이윽고 예나가 현관문의 서랍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로 가보기로 하죠!"

"……."

"빨리 와요! 안 오고 뭐하는데요?"

"알았다구… 갈게."

주도권을 빼앗긴 은별이 궁시렁궁시렁대며 예나를 따랐다. 현관문의 서랍장에 도착한 예나가 한 손으로 서랍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은별이 물었다.

"그런데 왜 서랍장을 선택한 건데?"

"예전에 민국이가 여기로 이사했을 때 공구리 몇 개를 제가 주었던 적이 있거든요. 아마 그게 남아 있을 거 같아서요."

"……."

"여기 있네요."

이윽고 톱과 더불어 망치를 꺼내드는 예나였다. 은별이가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다.

"그걸로 이 수갑을 뜯자고? 미쳤어?"

"이거 말곤 방법이 없잖아요. 한 시라도 빨리 당신이랑 떨어지고 싶거든요."

"하! 사돈 남말하시네! 나야 말로 당신이랑 1분 1초도 같이 있기 싫거든요?!"

예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톱과 망치였지만, 지금은 이것말곤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도 수갑을 풀 때 이걸 사용하는 범죄인(?)들도 꽤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재질이 재질이었던 지라 쉽지는 않겠지만….

"해볼게요."

"……."

예나가 굳게 마음을 먹은 표정으로 손목과 손목을 연결하는 사이의 고리에 톱을 갖다댔다. 은별은 반쯤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움찔거리면서 몸을 살짝 물렸다. 이윽고 예나가 시작하겠다는 듯 톱을 쥔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팅!

"……."

팅! 팅! 허나 굳은 결심과는 달리 톱을 놀리는 손은 참으로 미숙했다. 애초에 요리라던가 음식을 만드는 일에는 자신감이 넘치는 예나였지만, 못질을 하고 톱질을 하는 능력은 한없이 부족했다. 여자이기 때문인 것도 있었고 말이다.

'답답해 못 봐주겠네….'

혹시나 톱이 자신의 몸에 팅기면 어쩔까 두려워하던 은별이었다. 예나의 지극히 미숙한 톱질에 지켜보던 은별은 두려움이 아닌 지루함으로 사무치는 자신의 감정을 느꼈다.

"…이리 줘. 답답해서 못 봐주겠어."

"앗. 뭐예요."

미숙하되 열심히 노고를 치르던 예나였다. 그녀의 수중에 쥐어진 톱을 가로채며 은별이가 박박 수갑의 고리를 긁기 시작했다. 확실히 예나와는 다르게 톱질에도 노련한 은별이었다.

"……."

자기와는 선명히도 다른 그녀의 톱질에 말문이 막히는 예나였다. 확실히 은별은 부끄러움을 타거나 과도하게 질투를 하는 경향이 짙었지만, 그 외를 제외하곤 뭐든지 꾸준히 잘하고 성실한 타입이었다. 예나 역시도 성실하고 꾸준한 타입에 속했지만 그래도 만능적인 열쇠면에선 은별이 한결 낫다고 할 수 있달까.

'정신차려 한예나.'

또 다시 기죽으려는 자신을 붙잡으며 한예나가 망치를 들었다. 톱질로는 일말 흠집도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비켜보세요. 이걸로 해볼게요."

"…뭐하는 거야?!"

은별이 잽싸게 톱을 회수하자마자 고리에다가 힘껏 망치를 두들겨보는 한예나였다. 깡! 신박한 소리가 들렸고 은별이 톱을 내려놓으면서 한 쪽 귀를 막았다. 인상을 찡그리는 은별. 잠시 후 눈을 뜨며 예나에게 소리치는 그녀였다.

"바보도 아니고! 손이라도 찧이면 어떡할 건데?"

"괜찮아요… 제 손만 아니면 되죠."

"…뭐어?!"

어이없어 소리치던 은별이었다. 깡! 다시 한 번 신박한 소리가 들리고 은별이 눈을 찔끗 감았다.

"……."

잠시 후 눈을 떴을 때였다. 은별은 망치를 내려놓고 자기 손을 붙잡고 있는 예나를 보았다.

"아으아으…."

"……."

다행히 뭐 손을 찌임 당하거나 찧인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손목을 부여 잡고 있는 걸로 보아… 망치를 휘둘러본 경험이 턱없이 부족해 손목에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울음을 터트릴 듯 신음하는 예나를 보며 은별은 한심하다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바보."

"바보라 부르지 마세요…."

"바보."

부르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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