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응?"
선두로 계단을 올라왔던 은별이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지면서 정면을 겨누었다. 현관문으로 향하지 않고 멈춘 그녀의 모습에 뒤에 있던 예나가 올라오는 걸 멈추더니 물었다.
"뭐예요?"
"……."
"……?"
반쯤 굳어 있는 듯한 은별의 얼굴에 예나도 의문을 품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현관문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한 치렁치렁한 코트의 여인이 있었다. 아니, 여인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 터였다. 아무래도 그녀는 누가 보아도 어려 보이고 십대 소녀 같았으니까.
"……."
하지만 돌아본 예나마저 안색을 굳게 만들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통사고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었던 네 여자 전원을 살려주었던 구세주 같은 인물이었으니까.
'흑마법사!'
그녀의 급작스런 등장에 은별은 정말이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검은 코트가 바람에 휘날리던 중, 흑마법사가 몸을 돌려 그녀들을 확인했다.
"3일만에 보는 건데 다들 헤어진 여인을 본 것 같은 얼굴이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거죠?'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가진 흑마법사의 성숙한 말투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았다. 은별이 조금 견제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너무 견제하지 않아도 돼 츤고딩. 난 너의 츤츤거림을 그 누구보다도 좋아하니까."
"츠, 츤고딩이라 부르지 말아주실래요?! 밖에서까지 그 소리 들을 이유는 없는 거 같은데!"
자신의 비제이에 대한 별명이 언급되자 은별이 부리나케 소리쳤다. 뒤에 있던 예나는 흑마법사가 호칭한 츤고딩이란 단어에 '츤고딩…?'하면서 가볍게 중얼거렸다. 이윽고 흑마법사가 쳐다보는 두 여인을 뒤로하고 코트 품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여기 찾아온 건 뭐, 별 다른 게 아니야. 서민국에게 괜찮은 선물 하나 대접하려고 왔지."
"무슨 선물이요?"
"너랑 서민국의 50일 연애 선물."
"…뭐라구요?"
듣고도 도무지 납득하지 못할 그 말에 은별이가 의아한 표정을 품었다. 그때 흑마법사가 코트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마치 반지가 들어 있는 듯한 작은 상자가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감싸져 있었다.
"내가 직접 개발한 특수한 제품이지. 특수성도 우수하고 품질도 우수해. 사용해보면 고맙단 소리가 절로 나올 거다."
"……."
"놀랐나?"
막연히 지켜보던 은별이 곧 정신을 차렸다. 흑마법사에게서 얌전히 선물을 받은 은별이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다 말했다.
"깜짝 놀랐어요. 설마 당신이 이런 걸 준비해줄 줄이야…."
"흑마법사라는 게 이질적인 존재이다 보니 경계를 할 수밖에 없지. 이해는 해."
그리고 홱하고 몸을 돌려서 옥상의 계단 쪽으로 향하는 흑마법사였다. 그녀가 계단에 한 걸음 발을 내딛고는, 포장된 작은 상자를 막연히 보고 있는 은별에게 말했다.
"참. 그거 해제법은 키스를 하면 해제돼."
"…에?"
"5분 동안 해야 해제되니까 그 5분 동안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있겠군. 기원하겠어."
"자,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키스라뇨!"
은별이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계단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흑마법사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지극히 혼란스러워하는 은별이었다. 하지만 늘 갑작스럽게 나타나 늘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게 흑마법사의 고상한 취미였다. 이윽고 손바닥에 있는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는 은별이었다.
"흑마법사가 제작한 거라면 보통 선물이 아닐 텐데…."
"……."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고맙기는 했다. 대화도 거의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이였을 텐데, 자신을 부활시켜주다 못해 이런 연인 선물까지 줄 줄이야….
'반대로 서민국 그 자식은 나한테 선물 하나 안 해줬는데 으으.'
대체 서민국 이 놈의 변태 자식은 뭐하는 동물이란 말인가? 은별이가 계속해서 헌신을 다하고 주는 만큼 무언가 보답을 해야 할 텐데…. 바캉스에서 뽐냈던 그 무대도 사실은 엉망진창이었고, 노력과 정성은 고맙다 한들 좀 더 멋지게 무언가를 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은별은 괜시리 서민국이 미워지는 걸 느꼈다.
"응?"
"……."
"흐응~."
그리고 그러던 그때였다. 상자를 열지 않고 가만히 놔두던 은별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짜릿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은별이 모르게 그녀의 상자로 시선을 조준하고 있던 에나가 눈빛을 느끼고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은 강은별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은근슬쩍 건드리듯 물었다.
"부러워?"
"아, 안 부러워요."
"민국이랑 애인 사이라고 이런 선물도 받네~ 역시 커플은 커플이야~ 안에 뭐가 들어 있으려나?"
"……."
보란 듯이 놀려대며 포장지를 살금살금 뜯는 은별이었다. 이윽고 포장지가 사라진 작은 상자가 등장했고, 은별은 그 상자의 윗면을 손으로 잡아서 들어 보였다.
"반지네?"
"……."
"히히! 예나 씨! 저 반지 받았어요! 부럽죠? 부럽지요?"
"아, 안 부럽다니까요!"
"어머~ 신경질 내는 거봐~."
여유가 생긴 은별은 피식피식 비웃음을 지으면서 손가락에 반지를 껴보았다. 핑크빛의 그 반지는 누가 봐도 여자 것이었다. 하지만 커플링인지 아래에 또 한 개가 구비되어 있었다.
"이건 파랑색이네? 민국이가 사용하라는 건가?"
"……."
"고마워요 흑마법사님! 우리들의 사랑을 기도해주셔서!"
은별은 두 손을 깍지끼고 하늘을 높이 우러러보면서 그리 소리쳤다. 평상시 은별이라면 그냥 고마운 마음에서 그쳤을 그녀였지만, 근처에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가 있었으니 최대한 오바하면서 건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나도 그런 은별의 언동이 슬슬 신경에 거슬렸는지 저벅저벅 은별에게로 다가갔다.
"남은 반지 그거 이리줘봐요!"
"…앗! 뭐하는 거야?!"
"이게 민국이 꺼 같아요? 민국이 손가락 이렇게 안 얇거든요? 당신만 쓰라고 만든 거예요!"
푸른색 반지를 작은 상자에서 가로채 눈앞에 드리우는 예나였다. 그런 예나의 질투 어린 행동에 잠시 화를 내려던 은별은 곧 '흥~'하고 코웃음을 끼면서 팔짱을 꼈다.
"손가락에 끼기 전에 자유자재로 사이즈라도 늘릴 수 있나 보지~."
"……."
"설마 우리까지 살리는 흑마법사가 그런 것도 못하겠어요~?"
그러하다. 실제로도 흑마법사가 건네준 반지는 손가락이 굵어지든 얇아지든 언제든지 사이즈를 조정하여 낄 수 있었다. 그것도 맨 손가락에 그냥 넣는 순간 알아서 조절되는 신기한 마법이 걸린 반지였다. 허나, 그게 사실이라 한들 예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어디 이게 여자 반지인지 아닌지 두고 보자구요!"
"어? 어엇! 뭐하는 거야!"
"이잇!"
"앗! 이 커플도 아닌 게!"
여자의 질투란 무섭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예나는 민국이를 주려고 만든 푸르른 반지를 자신이 대신 끼려 하고 있었다. 은별은 이를 보고 황당한 얼굴로 말리기 위해 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역효과가 되어버렸다. 제제하려는 손길과 이루려는 손길이 순간적으로 빗겨쳐지면서 엇갈리는 순간!
"아앗!"
은별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예나 역시 의도치 않은 현상이었다. 어디까지나 끼는 척하면서 자존심만 다시 세울 셈이었는데! 쏘옥~
"……."
"……."
아주 깔끔하게 예나의 검지 손가락에 들어가버리는 푸른 반지였다. 이를 본 은별이 눈을 굉장히 크게 뜨다가 호통쳤다.
"애인을 탐내는 것도 모자라서 선물까지 탐내?!"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싸우던 그때였다. 갑자기 화아아아… 하는 이상한 괴음과 함께 두 사람이 끼고 있는 반지에서 요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응?"
"……?"
말다툼을 벌이던 두 사람도 돌연 들려온 요상한 괴음에 언동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가까이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빛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빛이 내뿜는 범위는 서서히 넓어지고 넓어져, 곁에 있는 두 여인의 시야에도 드리울 정도였다. 이윽고 은별과 예나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당연지사 그녀들의 시선은 자신이 끼고 있는 반지 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화아아아아!
"……!"
"!!!!!!"
엄청난 빛과 함께 두 여인의 시야가 순식간에 멎고 말았다.
*
그리고 어연 1분이란 시간이 지나고….
"……."
"……."
두 여인은 의도치 않게 감기었던 두 눈을 천천히 뜨게 되었다. 다행지사 두 여인에게 생채기가 생기거나 큰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 장소는 아까 전 있던 민국의 집 현관문 앞이었고, 둘 역시 복장에도 큰 이상 없이 있었다.
"…뭐, 뭐야? 방금 그건?"
"그러게…요?"
은별과 예나가 반쯤 벙어리가 된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문하였다. 하늘은 푸르다. 햇살은 쨍쩅하고, 새는 짹잭거리면서 지저귄다. 무엇 하나 달라진 것 같지 않은 온화한 배경에 긴장했던 둘은 서서히 안심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그 반지나 얼른…."
이윽고 은별이 중얼거리면서 예나에게로 몸을 돌리던 찰나였다. 철컹!
"응?"
"……?"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아청법을 위반한 동인지 번역자를 수감하기 위해 경찰이 등장하여 손목에 수갑을 찬 듯한 소리였다. 하지만 실제로 은별이가 아청법 위반 동인지를 호기심 삼아 보았다 한들, 들킨 적은 없었기에(????) 경찰의 권한으로 수갑에 묶였을 리 전무했다.
"어…?"
은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가볍게 손목을 움직여서 자기 품으로 당기려고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다시금 예나의 손이 있는 쪽으로 당겨지고 마는 은별의 손이었다.
"이게… 뭐야…?"
"……."
뒤늦게 예나도 자신의 손목이 요상하단 걸 감지하고는 확인한다. 그리고 반응은 은별과 일치했다. 도무지 자신들의 손목에 생긴 이 이상한 물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수갑…?'
한동안 그것을 지켜보던 은별은 그 물건을 그렇게 정의내렸다. 그렇다. 그건 수갑이었다. 하지만 실제 수갑처럼 재질이 쇠로 되어 있어 손목이 차갑거나 시리지도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철컹 철컹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실제 감촉은 매우 촉촉하고 부드러워 도저히 단단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
철컹 철컹. 물론 손을 흔들어서 그 수갑에서 벗어나려고 해볼 때마다, 반지를 끼고 있던 그녀의 손목은 원상태로 예나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아!!!!"
은별이의 절규 어린 비명 소리였다. 흑마법사가 선물이랍시고 건네준 아이템! 그것은 두 사람이 일정 조건을 진행해야만 그 매듭에서 풀리게 해주는 저주의 아이템이었다. 다만 그 저주의 아이템은 흑마법사가 살던 고향에서 애인들에게 꽤나 애용되던 물건이었다.
진도를 빨리 나가고 싶었는데 나가지 못하는 경우나, 서로 마음은 있었으나 선뜻 뜻대로 되지 않던 경우…. 이 저주의 수갑을 통해서 명분을 만들고 진도를 나가는 식이었다.
"이 바보!!!!"
흑마법사를 떠올리며 은별은 그리 소리쳤다. 애초에 50일째 연인에게 그냥 건네주는, 순수한 의도의 물건이 아니었다. 사고 회로가 빠르던 은별은 그것을 곧잘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었다.
"어, 어째서 이런…."
예나 역시도 어이가 없기는 어이가 없는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망연히 자신의 손목 쪽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두 사람이 착용하고 있던 반지가 두 사람의 손목을 묶는 아청 수갑으로 변모한 이 순간, 이제 두 사람만의 합체만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