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그녀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거참.'
민국은 집으로 돌아가면서 오늘 있던 일에 대해 정리했다. 스폰서 계약은 말끔히 미뤄버렸고 강철남의 본색을 알아냄으로서 유이에게 일러주었다.
유이는 녹음된 녹취본을 듣자마자 강철남에 대한 신뢰를 모조리 잃어버렸다는 듯 거의 반쯤 죽은 얼굴을 지었다. 그런 유이가 집 앞에서 강철남에게 이제 연락하지 말라고 선전포고를 한 후, 집안에 들어온 그녀에게 약(?)을 먹이고 밖으로 나왔던 민국이었다.
여기까지가 오늘 오전부터 오후까지 있던 이야기.
'이거 불안불안해서라도 전화 한 통 때려야겠는걸.'
이따 자기 전에 연락 한 통 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친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유이에게 큰 애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가슴엔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됐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민국은 마침내 자신의 집 앞에 도착했다.
'집에는 은별이가 있으려나.'
민국은 자신의 열쇠를 복사해서 은별이에게 건네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여자친구였기도 했고 그만큼 신뢰가 가는 여인이다 보니까 민국도 거리낌이 없었다.
필시 예나와 대화를 나눈 뒤 그녀와 함께 민국의 집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이윽고 저벅저벅 계단을 오르는 찰나였다.
집 안에 누가 있다는 듯 소란스러운 음성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정확히 무어라 말하는 건지는 몰랐다.
'아니야! 이건 말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민국은 본능적으로 번뜩였다.
'신음?!'
사실 신음이라고 보긴 좀 애매했고, 거의 비명 소리다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어찌하여 그의 집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단 말인가? 심히 의문스러운 문제인지라 민국은 후다닥 계단을 단숨에 올랐다. 그리고는 열쇠를 이용해서 현관문을 달칵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헉."
그러자 안에 펼쳐진 광경은… 차마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민국은 머릿속으로 한 가지 단어가 떠오르는 걸 느꼈다.
NTR… 네토라레! 자신의 애인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것을 의미했다. 설마 잘 생기고 뛰어난 자신을 두고 여자친구인 강은별이 다른 사람과 이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민국의 충격은 가관이 아니었다.
"읍으읍!"
이윽고 두 눈을 감고 키스를 하던 강은별이 민국의 기척을 느끼고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휘둥그레진 눈동자로 바둥바둥거리면서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 듯했다. 그러나 입술을 겹치고 있는 상태였던지라 말을 하기 버거워 보였다. 이윽고 은별이 포개고 있던 상대방의 입술에서 입술을 때어내며 완강하게 소리쳤다.
"푸핫! …아냐 이건!"
"내 여자친구가 이렇게 네토라레일 리 없어!"
"…누가 네토라레야?!"
"그것도 상대가 예나라니!"
그렇다. 은별의 네토라레 상대는 다름 아닌 예나였다. 민국은 차마 피할 수 없는 진실을 보고만 것이다! 예나와 입술을 맞추고 있는 은별…. 그것도 누가 '반강제적'으로 요구한 현상도 없어 보였다. 다들 스스로 선택하여 행한 행위였던 것이다.
"꺄아아아아악!"
뒤늦게 눈을 뜨고 상황을 판단한 예나가 민국을 돌아보더니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도 평소 그녀답지 않게 손사래를 치면서 완강하게 부정했다.
"아아아아아니야 민국아…!"
둘 다 스스로 서로에게 입술을 맞춰놓고 왜 이제와서 부정을 한단 말인가? 제3자 딴에서든 민국 딴에서든 심히 의혹스러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앗!"
급작스런 민국의 들이닥침에 당황하던 은별이었다. 그녀는 손목에 감겨 있던 분홍색깔의 고리가 사라졌음에 한숨 놓았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사라졌어."
"내 여자친구가 사라졌어!"
"그러니까 아니라고 이 멍충아!"
"맞아! 아니야 민국아! 정말 오해야!"
은별이 홍당무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분노했고, 예나도 정말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손사래를 쳤다. 이쯤되면 둘 다 무슨 연유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이윽고 민국이 방금 전의 행위에 대해서 추궁을 제기하자, 창피함에 몸둘바 모르며 고개를 숙이는 예나와 '어휴….'하면서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여는 은별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말이지."
사건은 민국이 오전에 집을 나와 서라에게 약을 가져다주려 할 때로 돌아간다. 그 시각, 은별은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와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서 만날 멤버는 누구냐고? 적어도 민국은 아니었다. 그는 오전 경에는 스폰서 일로 매우 바쁠 터이니 말이었다.
서라 역시 학교에 있을 타이밍이었고 유이는 은별과 그리 친하지도 않았다.
'가만 안 둘 거야.'
은별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분노를 담은 얼굴을 지었다. 그녀가 이토록 화난 까닭은 다름 아닌 어제의 일 때문이었다. 민국이랑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끼어들어 마음을 고백했던 한 여자! 한예나!
'부셔버리겠어!'
그녀의 언동이 결코 달갑지 않던 은별이었다. 물론 애인이 되는 입장에선 느닷없는 제3자의 유혹이 개입된 것이니,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일 수밖에. 허나 예나의 입장으로 보자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
민국을 먼저 좋아했던 건 그녀였다. 아플 때도 챙겨주고 목숨이 위험할 때도 챙겨준 건 다름 아닌 예나 그녀였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해성처럼 나타난 한 여인이 민국의 마음을 완연히 가로채고 말았다.
설사 민국이 그녀를 좋아해 사귀게 된거라 한들, 그래도 예나는 본능적으로 아직 민국을 잃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정말 이게 잘못된 일이라 해도… 이제 물러나지 않을거야.'
나쁜 여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다. 도덕성과 양심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고 손가락질 받아도 상관없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예나는 민국에게 이성적 호감을 받고 싶었다. 저벅! 저벅!
"……."
"……."
쿵! 그렇게 마침내 두 사람이 조우하게 되었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장소는 서민국의 집 앞. 어차피 친하지도 않은 두 여자가 일부러 돈을 내고 커피숍까지 가기도 아까웠던 것이다. 은별은 오전 시각 대치하게 된 당면의 예나를 은근슬쩍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패션 좀 꾸몄다고 해서 다야?'
오후에 만날 민국을 생각해서 어지간히 예쁘게 치장한 예나였다. 그런 예나의 몰골이 심히 맘에 들지 않았는지 은별의 눈빛은 못 마땅했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예나도 견제 어린 눈빛으로 은별을 훑고 있었다.
'저렇게 노출이 심한 바지를 입다니… 역시 민국이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예나는 무릎이 드러나는 허연 드레스용의 옷을, 은별은 허벅지의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핫팬츠와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당연히 길을 지나가는 남정네들 딴에선 비쥬얼이 죽이는 두 여인이 화사하게 꾸미고 있으니 일동 시선이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
"……."
그러나 그 시선들은 불필요하다는 듯, 서로에게 강렬한 눈빛만 보내고 있는 두 사람. 이윽고 신경전을 펼치던 도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은별이었다.
"제 애인한테 어지간히 예쁨 받고 싶었나 봐요. 그렇게 쓸데없이 치장한 거 보면?"
예나도 지지 않고 맞섰다.
"적어도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노출을 심하게 하는 변태에게 그런 말씀은 듣고 싶지 않아요."
"누, 누가 변태라는 거예요? 어이없어! 그러는 그쪽이야 말로 뭔데 자꾸 민국이에게 찝적대는데?"
예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먼저 좋아했던 건 저예요. 제가 민국이랑 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했었구요. 그 사이에 끼어든 건 바로 강은별, 당신이에요."
"하…! 서민국 의견은 생각도 안하세요? 그쪽보다 내가 더 좋다는데요?"
은별은 노골적으로 밀어붙였다. 한예나는 조금 주춤했지만 말을 이어갔다.
"그건 거짓말이에요."
"…뭐라구요?"
예나가 손가락을 쳐들면서 강은별의 맨들맨들한 허벅지를 가리켰다. 은별의 허벅지는 탐스러울 정도로 윤기가 나고 있었다.
"당신이 만날 그런 식으로 노출을 하면서 민국이의 성을 유혹하니까…! 민국이가 그게 성욕인지 호감인지 분간을 못하고 당신 곁에 있는 거라구요!"
"뭐, 무, 무슨 이런 여자가 다 있어?!"
강은별이 얼굴을 조금 붉히면서 양손으로 허벅지를 가렸다. 물론 작디 작은 그녀의 손으로는 반밖에 가려지지 않았다. 이윽고 은별이 노려보면서 소리쳤다.
"서민국이 내 노출을 보고 좋아하는지! 아니면 진짜 나를 좋아하는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예나가 손가락을 내리면서 소리쳤다.
"전 알 수 있어요! 민국이랑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이니까…!"
솔직히 억지스러운 논리이긴 했다. 머리 좋은 예나 딴에서도 그건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기 싫었다. 말싸움이란 본래 그런 것이었다. 이윽고 '오랫동안 알아왔던 사이'라는 문장이 심히 거슬렸는지 은별이 허벅지를 가리던 손을 때면서 말했다.
"자꾸 소꿉친구 시절을 강조하는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봤자 결국엔 일 년밖에 안 만난 나를 더 좋아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거든요?"
"윽…."
"그리고! 그렇게 오랫동안 만났으면서 스킨쉽이라도 한 번 해본 적 있으세요? …없잖아! 안아보기라도 했어! 아니면 손이라도 잡아봤어?!"
"다, 당신은 해봤다는 건가요!"
"그럼…! 어제 방에서도 봤겠지만 나는…!"
부리나케 화를 내며 소리치던 은별이었다. 뒤늦게 수치스러운 장면이 떠올랐는지 은별이 '아…!'하고 탄성을 지었다.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은, 어제 민국의 쾌락 행위를 도와주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예나도 애써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두 눈을 토끼처럼 뜨다가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역시 당신은 변태예요!"
"아, 아니거든!"
"어떻게… 제가 거실에 있는데도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던 거죠? 분명히 민국이가 당한 걸 거예요!"
"…뭐?"
"거실에 제가 있는 걸 아는데도 미, 민국이가 먼저 그런 제안을 할 리가 없잖아요! 분명 당신이 요구한 걸 거예요! 허벅지를 그렇게 드러내고 다니는 거 보면 답이 나와요!"
"…진짜 어이없어! 핫팬츠는 취향이거든요? 존중해주시죠!"
"이 파렴치한!"
"내가 파렴치한이면 당신은 파김치야!"
이젠 논리란 건 씹어먹고 무조건 말싸움 배틀을 뜨는 둘이었다. 일종의 인터넷 키보드 배틀에서나 나올 법한 둘의 대화에 길을 지나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고정되었다.
얼굴을 붉히며 씩씩 화를 내던 두 사람은 얼마지 않아 주변을 감지했는지, 곧 흥분을 가라앉히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예나가 대답했다.
"안에 들어가서 얘기해요…."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그리고 계단을 오르는 문을 열고, 2층까지 높이 쌓여 있는 계단을 차츰차츰 딛기 시작하는 둘이었다. 둘의 감정이 얼마나 다운되어있는지, 말없이 올라가는 와중에도 분위기가 삭막했다.
"흥!"
은별은 뒤에서 차츰차츰 올라오는 예나를 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짜증이 미친 듯이 솟구쳤다. 민국에게 대시를 하는 것도 죽겠는데, 전체적인 스팩도 은별이와 비교를 할 때 전혀 후달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심 불안하여 더 견제하는 것도 있었다.
"……."
그러나 그건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예나 역시도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은별이의 뒤태를 보고 있노라니, 도무지 자신은 상대도 안 될 것 같았다.
실제적으론 둘이 비슷비슷했지만, 그래도 은별은 뭐랄까. 운동을 좋아하는 여인답게 탄탄하고 보드라운 느낌이 넘쳐난다고 할까…. 건강한 남자부터 옆집 아저씨까지 한 번쯤은 야시시한 상상을 해볼 법한(?) 그런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아니야… 정신차려 한예나. 넌 할 수 있어.'
절대 기세에서 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은별과 예나였고, 그렇게 두 사람이 2층에 올라온 찰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