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이로써 강철남과 유이의 관계는 완전히 끝난 셈이었다. 더 이상 강철남이 붙잡는다 한들 유이는 그를 믿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강하게 밀쳐낼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현상이 마냥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늘 사람을 믿지 못했고, 사람에게 정을 주기 싫어했던 유이의 마음을 완전히 닫게끔 만드는 계기가 될 지도 몰랐으니까.
“…….”
민국은 유이가 웃으면서 무심코 던졌던 그 말을 떠올렸다. 다 가달라는 그 말엔 필시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유이의 말대로 민국도 이제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닐까?
‘어떻게 될지 알고 그냥 두고 가냐.’
오지랖이라면 오지랖이겠지만, 그래도 민국은 현재 유이의 상태가 굉장히 불안했다. 제3자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을뿐더러 자살기도를 해도 이해가 충분히 될 정도였다. 민국은 주저앉아있던 자리에서 찬찬히 일어났다. 강철남이 때렸던 복부랑 얼굴이 살살 아파왔다.
‘마지막에 한 대는 쳤어야 하는데.’
남자로서의 오기를 보이면서 민국은 유이를 돌아보았다. 유이는 어느새 미소를 지운 상태였다.
애초에 그 미소는 거의 가식적으로 만들어낸 가짜 미소나 다름없었다. 그건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정작 유이가 지으려고 했던 진짜 표정은 슬픔과 울음이었으니까. 그것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지어낸 미소가 결코 아름다울 리 없었다.
“민국 씨도….”
유이가 입을 열었다. 말미를 흐리면서 던지는 그 말엔 민국도 이제 슬슬 사라져달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민국은 당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집안까지 데려다드리죠.”
“…….”
“절 믿건 말건 그건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제가 뒤에서 덮친다 한들 그쪽이라면 싸움으로 이길 자신도 있잖아요?”
너스레 떨 듯 던지는 물음이었지만 그래도 논리적인 건 사실이었다. 유이는 혼자 있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민국의 상당히 진지한 표정에 열던 입을 다물었다.
이미 강철남을 통해 사람에게 완전히 문을 닫게 된 지금, 그녀 딴에선 그 어떤 일이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든 아무래도 좋은 것 같았다. 설사 서민국이 덮친다 한들 가만히 있을 지도 몰랐다.
“…….”
이윽고 유이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민국도 뛰어 들어갔다. 신발장 앞에서 신발을 벗고는 천천히 복도로 향하는 유이. 민국은 다급히 신발을 벗은 다음에 유이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화장실 가실 겁니까?”
“…….”
“그럼 전 여기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게 유이 씨가 편할 거 같으니까요.”
나름대로 배려를 하는 민국이었다. 유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으로만 걸어갔다. 이내 화장실로 들어간 그녀. 쏴아아아… 하는 세안대 물소리가 들려오고 민국은 복도에 우두커니 선 채로 가만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약도 마시고 마음 진정되는 것까진 보고 가야겠구만.”
지금 상태에서 결코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직감하며 민국은 유이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신발장 서랍 위에 있는 액자가 무심코 눈에 들어왔다. 아까 아침에 올 때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었지만, 유이의 가족사에 대해서 전부 알게 된 민국으로서는 이제 놀랄 수밖에 없었다.
“…….”
그것은 천하의 민국조차 말문을 닫히게 하는 사진이었다. 쨍쨍한 여름, 언제 찍은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커다란 해바라기가 등 뒤에 넝쿨처럼 서슴없이 피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 해바라기들을 등에 지고 한 여인이 미소 지으며 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허리를 살짝 구부린 모습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도, 그렇다고 자매라고 할 사람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누군가가 촬영해서 찍어준 듯한 그 사진의 여인에게는 씁쓸한 미소만이 담겨 있었다. 마치 한 번 웃어보라는 강요에 인위적으로 지은 듯한 웃음.
“하, 참….”
민국은 어느새 손에 들리고 있던 액자를 서랍 위에 다시 내려놓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벽에 몸을 기댔다.
“강철남 이 새끼 진짜 못된 새끼네.”
진심을 주었던 유이의 믿음을 오히려 역이용하면서 이득을 노렸던 강철남이었다. 실로 이기적인 행위였다. 어떻게 자신에게 호감을 비친 사람을 이렇게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후우, 유이 씨의 마음이 한 편으론 이해가 되는구만.’
민국도 어렴풋이 유이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묘사를 하거나 강조한 적은 없었지만, 민국도 죽을 고비를 한 차례 넘긴 적이 있었다. 목에 생긴 희귀병으로 말미암아 편도선 제거조차도 불가능한 실정일 때, 민국이 아프단 사실을 듣고는 내밀던 인맥의 손길이 싸그리 사라졌던 것이다.
‘그때 남아주었던 건 한예나 뿐이었지.’
강은별은 그때 민국이 아프단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애초에 그때는 비제이로서의 관계만 갖추고 있었으니까 말이었다. 실질적으로 그때 가장 친한 편에 속했던 건 한예나였다.
{좋아해!}
{단순히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좋아해! 정말로!} 그리고 그런 예나가 끝끝내 민국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호감이 있다면서 말이다.
어차피 예나의 마음은 이전부터 알고 있던 민국이었지만, 그래도 강은별을 선택했던 실정이었기 때문에 예나를 양다리 걸치기는 조금 뭐했었다. 그런데 그런 자기 처지를 마치 이해(?)라도 한 마냥 한예나가 적극적으로 대시를 해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은별이랑 예나가 만나서 대화 좀 하겠다고 한 거 같은데.’
민국은 오늘 아침 은별과 메시지를 하면서 들었던 내용을 돌이켰다. 아무래도 어제 한예나가 소리쳤던 그 내용의 건을 관련하여 진탕 말싸움을 벌일 게 분명했다.
‘주먹 싸움이라도 나지 않으면 다행이겠네.’
애초에 여자들이니 주먹으로 때리는 가혹 행위는 안하겠지만, 그래도 막장 드라마에서 보듯 머리를 잡고 ‘꺄아악~’ 비명을 지를 가능성은 좀 있었다. 심지어 둘 다 성깔이 있는 여자였기에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쉽게 끝날 것 같진 않았다.
‘오, 부디 신이시여. 제가 여기에 있는 동안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기를.’
불안한 상념 속에서 신에게 기도를 하며 민국은 유이가 나오길 기다렸다. 끼이익. 마침내 세수를 끝마친 유이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민국은 그런 그녀를 확인하고는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순간 말문을 닫고 말았다.
“…….”
머리를 감고는 수건으로 조금도 행구지 않은 듯, 물기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머리 사이로 비추는 그 살아있던 눈동자는 완전히 식을 대로 식어서 차갑기 그지없었다. 천천히 거실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유이를 보면서 민국도 뒤늦게 따라 나섰다.
“유이 씨.”
“…….”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약 마시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거실에서 걸음을 멈추었던 유이가 민국의 말에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부디 그러지 말고 가달라는 의미 같았다. 하지만 자꾸만 그녀의 기운이 불안하게 보였던 민국은 말을 이었다.
“그것만 마시는 것까지 보고 들어가겠습니다. 정 뭐하면 지금 여기서 드시면 됩니다.”
“…….”
유이의 주머니에 고스란히 담긴 그 약통. 민국은 그 약통에서 딱 한 방울만 찍어 마시는 것만 보면 되었다. 하지만 유이는 그런 간단한 행위조차 지금은 원치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 행위를 거부하는 순간부터 그녀가 자기 인생을 반쯤 포기했단 사실을 민국도 가늠할 수 있었다. 이윽고 거실의 테이블에 천천히 앉는 유이였다.
민국도 그녀를 따라 소리 없이 테이블에 앉았다. 높낮이가 낮은 그 테이블을 빤히 내려다보며 바닥에 앉은 그녀. 표정을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유이 씨.”
“…….”
“어떤 심정인지 다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놈은 잊으셔야 합니다. 고작 강철남 그 양반 한 명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 유이 씨에게만 곤란한 일이에요.”
민국은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없었다. 세상엔 나쁜 사람도 있었고 좋은 사람도 있었다.
넷상에서나 현실에서 항상 논란이 되는 일을 나쁜 사람이 많이 벌였기 때문에, 가해자들의 비중이 크게 많은 것처럼 보일 뿐 실질적으로는 올곧게 노력하며 살아가는 착한 사람들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착한 사람 중에는 유이 역시 포함될 것이었다.
“유이 씨도 비록 혼자였지만 열심히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
“그런 유이 씨를 언젠간 이해해주고 보듬어 줄 남성이 반드시 올 거예요. 왜 벌써부터 인생을 포기하려고 하십니까?”
말을 하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민국은 생각했다. 유이의 심정을 이해한들, 그녀처럼 부모가 없고 홀로 발판을 딛으며 올라온 사람도 아니었다.
민국 역시 강철남이 언급하는 유이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심 놀란 상태였다. 컴퓨터 전문 언어를 비롯해 공부까지 만능인 그녀였다.
다재다능한 유전자를 갖고 자라나 고아였지만 홀로 성공한 그녀. 애초에 이 집을 혼자서 살 정도로 돈이 많다는 점에서 놀랐을 따름이었다. 이것도 부자라면 부자라고 할 수 있겠지.
“기운 내십시오 유이 씨. 예?”
민국은 몇 번이고 유이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 설득이 단순히 앉았다 일어나라는 형식의 설득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설득이었던 지라 유이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가주세요….”
“…….”
유이가 하는 말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평소 때라면 말을 들어주었을 민국도 이번엔 고집을 부렸다.
"약만 드시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
"차라리 그게 유이 씨 딴에도 편할 겁니다. 부디 제 말대로 해주세요."
완력을 행사해서 민국을 위협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유이 스타일상 맞는 대안법은 아니었다. 민국도 굉장히 진지한 눈빛으로 요구하고 있었고, 유이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민국의 의사를 들어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
"……."
이윽고 유이가 천천히 주머니 속에서 약통을 꺼내들었다. 내용물이 담겨 있는 그 약통의 뚜껑을 천천히 건드리는 유이였다. 뿅. 이윽고 약통의 뚜껑을 빼낸 유이가 천천히 입을 열어 그 약통을 자기 입 근처로 가져갔다.
"……."
액체가 그녀의 입속에 담겨졌고, 민국은 순간적으로 맞을 각오까지 하였다. 액체의 맛을 혀가 감지하는 즉시 유이는 민국을 본능적으로 구타했었으니까. 하지만 찔끔 눈을 감았던 민국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을 뜨자 유이는 그 액체를 목구멍 속으로 꿀꺽 삼키고 있었고, 그저 모든 것을 다 놓은 듯한 그 모습 자체로 굳어 있었다.
"……."
"……."
이제 되었냐는 듯한 모습이 유이에게 담겨 있었다. 민국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 씨."
"……."
그녀를 부른다. 하지만 그 부름도 머지 않아, 민국은 고개를 가로젓게 되었다.
'지금 어떤 말을 해봤자 절대 들릴 것 같지가 않아.'
그래도 일단 그녀가 약을 먹는 건 확인했으니,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민국은 혼자 있기를 원하는 그녀를 위해 천천히 몸을 물렸다.
"이제 가볼게요. 내일 또 찾아뵙겠습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유이 씨."
마치 비즈니스 사업가끼리 인사를 나누듯 작별을 고하며, 민국은 홀로 복도로 향했다. 그리고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빠져나왔을 때, 민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는 집을 돌아보게 되었다.
"……."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는 건 방금 전 그 모습으로 인지했다. 어쩜 그녀가 내일까지 살아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불안한 건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녀와 자신의 사이상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겠지. 유이도 민국을 향해 그나마 열었던 마음의 문을 다시금 닫은 것 같았으니까.
"가자."
민국은 집으로 유유히 향했다. 유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행동거지는 오로지 그거밖에 없는 것 같았다.
*
"……."
집안에 혼자 남은 유이. 이제야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쩜 이게 유이에게 가장 알맞는 분위기가 아닐까? 가족의 따뜻함도 모르고, 다가오는 사람의 애정도 외면한 채, 혼자서 방치되듯 살아가는 게….
"……."
한 순간의 따뜻함이란 건 애초에 그녀에게는 가혹한 행위였을 지도 모른다.
"……."
뚝. 뚜욱. 어디선가 빗소리처럼 물방울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물방울이 자꾸만 귀에 거슬려서, 유이는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향하게 되었다.
"……."
그러다 무심코 자신의 눈속에서 떨어지는 흔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차다 못해 식어버린 듯한 그 눈물 방울은 한 방울 한 방울 선선히 흘러내리는가 싶더니 얼마지 않아….
"……! …! ………!"
유이는 상의를 한 손으로 쥐어잡았다.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허나 울음 소리는 결코 내지 않았다. 자신에겐 그런 인간적인 행위조차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 유이는 마음 속으로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
그래, 이게 나 자신이다.
나는 이런 사람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기에….
유이는 마음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