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흐으음.’
그리하여 민국과 최유이는 커피숍에 당도하게 되었다. 커플들이 북적한 그곳에서 커플이 아닌 남녀가 한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으니, 은별이 이 장면을 목도한다면 상당히 의심 어린 시선을 지을 것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유이에게 질문했다.
“커피는 뭐 드실 겁니까? 그냥 제가 막 시켜요?”
“…….”
“쩝.”
유이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민국은 그냥 자기가 시키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 카운터로 향했다. 아까 전에 커피를 먹고 크게 탈이 났던 민국인지라 이번엔 그냥 과일 주스 쪽으로 시켰다. 물론 설사를 하고 난 상태였기 때문에 차가운 걸 많이 마시면 또 탈이 날 테니 마시는 걸 최대한 자제할 생각이었다.
“옛다.”
그리하여 민국이 최유이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자기 자리 앞에 과일 주스를 내려놓은 후였다. 다시금 제자리에 앉아 맞은편의 그녀를 바라보는 서민국이었다.
‘허허, 은근히 미치겠네.’
유이는 본래 말이 없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본래 말이 없는 것과 지금 말이 없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있으리라. 유이의 눈동자는 정말로 죽어 있었다. 그건 누가 봐도 그렇게 느껴지리라. 마치 감정이란 것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다는 듯 죽어 있는 그 눈동자에 민국은 자신의 말이 들리기나 할까 싶었다.
‘하, 은별이었으면 성드립 좀 치다가 진지하게 얘기하면 될 텐데. 이 여자랑은 그리 친한 것도 아니라서 말이지.’
어떻게 잘 놀고 다니긴 했지만 결코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말 한 마디 꺼내지도 않는 어려운 여자였으니까. 민국은 결국 조바심에 과일 주스 한 잔을 쭉 빨다가 입을 열었다.
“요즘 뉴스 통계에 따르면 한국 성별 비율이 남자가 더 많답니다.”
“…….”
“고로 세상엔 남자도 많고 땅도 넓으니 그리 괴로워 할 필요가 없어요. 암요.”
“…….”
“음, 실수했군.”
마지막 말은 자기만 들을 수 있도록 조용하게 중얼거리는 민국이었다. 이런 드립 자체가 씨알이라도 먹혀 들어간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것이었다. 민국은 다시금 유이를 보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무표정과는 차원이 다른 무표정에 민국은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스폰은 오늘 미루는 게 좋겠군요.”
“…….”
“계약은 제가 은주 누나에게 잘 말씀드려서 미뤄둘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민국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김은주와 전화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김은주는 갑작스런 민국의 전화와 말미암아 그의 통보에 꽤나 의문을 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직 스폰 약속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상태였으니 날짜를 미뤄도 큰 민폐는 아니리라.
1층 내부 건물에서 무슨 소란이 있었는지 몰랐던 은주는 민국의 간곡히 하는 부탁에 한숨을 짓고는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간곡하게 얘기하는 거 보면 꽤나 중요한 일 같으니까 일단 스폰서 사장님에게 연락해둘게.”
“예, 고마워요 누님.”
“아니야. 나중에 술이나 한 턱 쏴.”
“하하. 술 마신 누님에게 덮쳐지고 싶진 않군요.”
변태력으로 대립하기에는 김은주가 너무나도 강렬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민국은 다시금 자리로 돌아갔다. 여전히 커피는 방금 전 민국이 놓은 그 자리 그대로에 있었고, 유이의 시선 역시 아래로 곧게 향해 있었다.
“후우우.”
농담을 할 상황이 아님에 민국도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좋아하셨군요. 강철남 그 양반을.”
“…….”
유이의 고개가 그제야 느리게나마 올라가기 시작했다. 죽은 그녀의 눈동자가 민국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 점 흔들림 없는 그 초점은 오로지 ‘강철남’이라는 이름하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민국은 등받이에 등을 편안히 기대면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숨을 뱉듯이 중얼거렸다.
“저도 화장실에서 그 양반이 하는 소리를 듣고는 크게 놀랐습니다. 굳이 얘기는 안했지만요. 설마 픽업 관련 종사자일 줄이야.”
“…….”
“솔직히 지금 제가 유이 씨에게 무슨 위로의 말씀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민국의 진지한 심정이었다. 어떤 위로를 해야 할까? 부모도 없고 고아인 채로 살아왔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늘 의심해왔으나 반대로 사람들의 따스함을 받고 싶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맘을 드러낸 한 남자가, 사실은 자기를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했단 게 밝혀졌는데…. 거기서 오는 커다란 충격을 과연 민국의 몇 마디가 따스하게 위로해줄 수 있을까? 민국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오히려 연민삼아 무심코 툭툭 던지는 말들이 도리어 그녀를 가슴 아프게 할지도 몰랐다.
“집에 갑시다. 유이 씨.”
“…….”
“오늘은 가서 그냥 쉬기로 해요. 그게 낫겠습니다. 제가 챙겨준 약은 꼭 먹고요.”
챙겨준 약이란 것은 민국의 액체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아무리 끔찍한 일을 경험했어도 마시긴 마셔야 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유이의 상태를 보노라면 왠지 죽음까지 각오할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보는 입장에서 민국은 상당히 불안하고 답답했다.
‘하! 신이시여! 우찌 저에게 이런 일을!’
극도의 남성혐오증 때문에 접촉도 까다로우니 민국은 일단 말로 그녀를 설득했다. 몇 분간의 종용 끝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민국은 그녀를 데리고 곧장 인도로 향해 택시를 기다렸다.
기껏 구매한 커피숍의 커피가 아깝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 상태가 우선이겠지. 우르르르 인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민국의 뒤로 선선히 걸어오던 유이. 이윽고 길을 거닐던 어떤 여자가 옆의 자기 친구를 보다가 그만 그녀와 부딪히고 말았다.
“꺄악!”
“…….”
유이는 말없이 그대로 무릎 꿇듯 쓰러졌고, 상대 여성은 친구의 부축으로 말미암아 주저앉되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택시를 잡던 민국은 비명을 듣고는 후다닥 유이 근처로 향했다. 그리고는 주저앉은 상대방 여성을 보면서 웃음 짓고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멍하니 벽처럼 서 있던 유이의 행동에 화가 났는지 인상을 찌푸리던 상대방이었다. 잘 생긴 민국이 눈웃음을 지으면서 나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털어버리고는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꾸벅하고 인사를 한 뒤 사라지는 상대방 여성과 그녀의 친구를 뒤로하고, 민국은 무릎 꿇듯 앉은 채로 가만히 있는 유이를 내려다보았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세요 유이 씨.”
“…….”
또다시 2분간을 설득한 끝에야 유이는 일어났다. 물론 이젠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그녀의 두 다리가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 타요.”
“…….”
이윽고 택시를 잡은 뒤 민국은 유이를 뒷좌석으로 인도해주었다. 혼자가게 해두었다간 무슨 짓을 당할지 불안했기에 민국은 앞좌석에 탑승했다.
“……로 가주세요.”
“예.”
유이가 사는 동네를 말하는 민국이었고, 택시 운전사가 핸들을 붙잡고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유이의 죽은 시선은 오로지 자신의 발치만을 향하고 있었다.
* *
“도착했습니다.”
“유이 씨, 내리세요.”
유이에게 그리 말한 뒤 민국은 돈을 꺼내 택시 운전사에게 전달했다. 이윽고 거스름돈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유이가 민국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뒷좌석에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인지… 그녀는 조금이나마 의식이 돌아온 모습이었다.
이윽고 거스름돈을 받아 자리에서 내린 민국은 먼저 밖으로 나와 있는 유이를 보면서 말했다.
“이제 좀 괜찮아요?”
부우웅. 탑승했던 택시가 매연을 뿌리면서 사라지는 가운데, 민국은 유이에게 물었다. 허나 유이는 이번에도 말이 없었다. 민국은 미치겠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스폰서 계약도 못하고 일은 이 지경이 되어버리고… 참 황당할 지경이었다.
“일단 집까지 데려다드릴게요. 가요 유이 씨.”
“…….”
상태가 상태였던 지라 오늘이라도 무사히 보내게끔 하는 게 민국의 최선 목표였다. 힘없는 걸음으로 유이가 터벅… 터벅… 이동하기 시작했다. 민국은 그런 그녀의 한없이 가냘퍼진 등을 바라보면서 뒤쫓기 시작했다.
“헉, 허억!”
10분쯤 걸었을까. 슬슬 유이의 집 근처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거칠게 호흡하면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국은 그 소리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임을 감지하고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이 새끼야!”
“으억!”
퍽! 강렬한 펀치 한 방을 얼굴에 맞고 마는 민국이었다. 잠시 휘청거리는 민국. 갑작스런 경우였지만 민국은 주먹의 주인이 누구인지 곧잘 알아차리고는 대처했다.
“죽어!”
“와이씨, 이 미친놈 보소!”
유이의 집 근처에서 미리 대기를 타고 있던 강철남이었다. 그가 매섭게 휘두르는 주먹에 민국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맞으면서 그대로 두 손으로 껴안고 들어갔다.
퍼억! 휘잉! 쿵! 맞음과 더불어 체격으로 강철남을 깔아뭉개는 서민국. 하지만 강철남은 지치지도 않는지 있는 힘껏 서민국의 머리를 두 주먹으로 때려댔다. 퍽퍽!
“내 잘 생긴 두상 건드리지마 이 픽업아티스트 자식아!”
민국도 지기 싫다는 듯 고양이 특유의 할퀴기를 녀석의 얼굴에 시전하였다. 덕분에 강철남도 ‘아악!’하면서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댔다. 빠악! 하지만 서민국이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그의 복부를 차서 밀어버리는 강철남이었다.
“슈밤! 오늘따라 배만 엄청 아프네! 임신한 상태였으면 낙태했겠다!”
“개새끼야아!”
주저앉아있는 서민국에게 일어서서 달려들려던 강철남이었다. 저벅…. 돌연 들려온 발걸음 소리에 강철남은 서민국에게 달려들던 행위를 멈추었다. 민국의 고개가 자연스레 발걸음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고, 그건 강철남도 마찬가지였다.
“유, 유이 씨….”
“…….”
몸을 돌려 민국 쪽으로 다가온 유이. 그런 유이를 목도하고는 돌처럼 굳어버리는 강철남이었다. 아무래도 유이에겐 전과가 있었고, 그녀는 자기보다 실질적으로 강한 파이터 재능(?)을 소유하고 있었으니까… 선뜻 건드리기에는 위험했다.
“…….”
유이의 죽은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물론 그 초점은 거의 반쯤 죽어 있는 상태였다. 다만 지금 강철남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일말의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강철남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얼굴로 두 손을 허공에 움직이면서 변명했다.
“유이 씨… 아까 전에는 무슨 오해가 있던 거 같은데… 그거 서민국 이 새끼가 다 헛소리를 지껄인 거예요! 진짜 아니라니까요? 거짓말이에요 거짓말!”
“…….”
“하하하, 아니 우리 오랫동안 만났잖아요? 비록 한 달 사귀었다고 해도 그 뒤에 연락한 것도 몇 번 있었고… 설마 유이 씨 저 못 믿는 건 아니죠? 네?”
“…….”
“얼마나 서로 믿음을 주고받았는데! 제가 얼마나 유이 씨에게 잘했는데요! 비록 마지막에는 제 스스로가 초라하고 한심해서 미친 짓을 했다지만 정식으로 사과를 하고 다시 기회를 받았는데, 진짜 열심히 하려 했는데! 설마 그런 제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죠 유이 씨? 네?!”
“…….”
“유이 씨!”
“가주세요….”
거의 한 시간 만에 처음으로 꺼내는 유이의 말이었다. 유이를 쳐다보던 민국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강철남의 눈동자는 반대로 위기에 몰린 것처럼 커다래지고 있었다. 그가 더욱 긴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가달라뇨? 유이 씨! 우리 이렇게 끝내면 안돼요! 고작 서민국 저런 거짓말쟁이 새끼 때문에…!”
“부모도.”
유이의 목소리는 굉장히 작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녀가 갖는 목소리의 위압감은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소리치는 강철남의 음성을 순식간에 삼켜버리며, 유이는 그의 말을 끊고 말을 이어갔다.
“친구도.”
“…….”
“사람도.”
“…….”
“연인도….”
애초에 없었다. 그게 자신에겐 어울리는 것이었다. 늘 시기와 질투, 고독과 외로움을 견디며 싸워온 그녀였는데, 애초에 그런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리 전무했다. 유이는 그렇게 확신했다.
“다… 가주세요….”
유이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유이라는 여자에게서 굉장히 보기 드문 미소였다. 지켜보고 있던 서민국마저 눈을 크게 뜨게 될 정도였다. 강철남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그녀의 그런 미소에 강철남은 뭔지 모를 감정까지 느끼게 되었다.
“…….”
아니, 실은 그게 뭔지 자신도 곧잘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픽업을 하면서 해왔던 행동들이, 반대로 여자들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었다는 걸 애써 외면해왔을 뿐. 애초에 그런 여자들이었으니까. 삼류 드라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그저 드라마 같은 주인공과 달달하게 연애하는 게 꿈인 멍청한 여자들이었으니까.
“다….”
“…….”
하지만 유이는 달랐다. 애초에 그녀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멍청하게도, 강철남 역시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가주세요….”
그 미소가 어찌나 울상이던지, 강철남은 차마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 순간 고개를 내려버린 강철남은 금붕어마냥 입을 몇 번이고 열고 닫고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얼마지 않아, 찾아온 상당한 죄책감에… 그늘 진 얼굴로 표정을 숨기면서 몸을 홱 돌려버리고 말았다.
민국은 씁쓸히 사라지는 강철남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