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직원들이 오가는 정문의 파뿌리 TV 앞. 유이는 산산한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면서 강철남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어연 10분이 지났으나 그의 기척은 일말도 느껴지지 않는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염려하는 마음에 유이는 고개를 돌려 1층 건물 내부 쪽을 돌아보았다.
그때 무언가 큰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파뿌리 TV의 경비를 맡는 경비원이 남자 화장실이 있는 쪽으로 향해 뭔가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경비원의 신호에 서서히 몰려드는 남자들. 여자 직원들은 차마 들어가지 못하지만 무슨 일인지 싶어 멀리서 구경하는 모습이었다.
“…….”
유이는 방금 전 그곳에 들어간 사람이 강철남이란 사실을 인지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몸을 돌려 찬찬히 걸음을 1층 내부로 옮기었다.
* *
경비원이 화장실의 난동 소리를 듣고 찾아오기 5분 전, 바지가 빼앗겨버린 강철남은 일어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이 아직 사람은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워낙 직원들이 많이 오가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언제라도 들어올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런 쪽팔린 망신은 겪고 싶지 않던 강철남이 얼굴을 붉히며 서민국이 있는 화장실 변기칸으로 달려갔다.
“내놔 이 새끼야!”
“이 문제를 맞히면 알려주지. 대통령 선거의 반대말은 뭐라고 생각하냐?”
“몰라 새끼야! 빨리 내놔! 죽여 버리기 전에!”
“대통령 발기부전 병신아! 네 바지는 평생 동안 변기 속에서 썩어 물들어질 거다! 어리석은 영혼 같으니.”
더 이상 못 참겠는지 강철남이 옆 변기칸으로 향했다. 그리고 변기 뚜껑을 내리고 위로 올라가서 서민국이 있는 옆칸으로 몸을 옮겼다.
“이이이익!”
“헐, 이 미친놈보소. 그렇게 네 바지가 소중하냐?”
양손으로 서민국의 머리카락을 붙잡으려하는 강철남이었다. 서민국은 기다렸다는 듯 입속에 모아둔 타액을 그의 얼굴에 쏘았다.
“퉷!”
“…씹!”
“퉷퉷! 퉷퉷퉷퉷!”
“씹! 새끼! 아악!”
“카악! 퉷!”
가래까지 섞어서 혼심을 다해 침을 뱉는 서민국이었다. 혀에 담긴 수분이 달아날 정도였다. 강철남은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 내더니 변기뚜껑에서 있는 힘껏 도약하였다. 콰당탕탕! 그리하여 마침내 서민국이 있는 변기칸으로 넘어온 강철남. 서민국은 기다렸다는 듯 변기칸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푸헤헤헤헤!”
그리고는 청소 도구칸이 있는 곳으로 후다닥 달려가서 긴 빗자루를 가져와서는, 변기칸의 문에다가 고정했다. 분노한 강철남이 변기칸의 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으나 이미 고정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소도구함에서 이번엔 커다란 양동이를 꺼낸 서민국이 세안대에서 물을 받아 강철남에게로 향했다.
“블루 브레스!”
혼신을 다해 커다란 양동이를 변기칸 위로 던져버리는 서민국이었다. 그 결과 변기칸 안에 있던 강철남은 ‘으아아아악!’하면서 온 몸이 차가운 물에 젖고 말았다.
“너 죽여 버릴 거야 으아아아아!”
“네 다음 중2병.”
민국은 한 번더 양동이에 물을 담아 변기칸 안으로 뿌려버렸다. 하지만 이번엔 손을 삐끗해서 그만 자기에게도 반 정도 뿌려버리고 말았다.
“으아 슈발!”
민국도 비명을 지르고는 양동이를 바닥에 내던졌다. 미치고 환장하겠는지 강철남이 변기칸 안에서 주먹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민국은 그 소리에 혀를 내두르다가 중얼거렸다.
“너 같은 놈에겐 아무래도 유이 씨가 아까울 거 같다.”
“개새끼야아아아!”
민국은 화장실 밖으로 몸을 돌렸다. 옷이 물에 반쯤 젖은 탓에 이거 아무래도 스폰서 계약을 할 때 상당히 민폐일 것 같았다. 근처에서 싼값의 옷이라도 한 벌 사야하나 걱정을 하며 화장실을 나가던 때, 소란스런 소음을 들은 경비원 한 명이 후다닥 이쪽으로 뛰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아, 전 잘 모르겠는데 저기 변기칸에 이상한 남자가 있어요. 오줌 싸다가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요.”
민국은 애초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거짓말을 쳤다. 경비원의 고개가 자연스레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으아아아아!’지속해서 들려오는 비명 같은 외침에 슬슬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민국은 반쯤 젖은 옷을 뒤로하고, 강철남이 있는 변기칸을 보다가 스윽 고개를 돌려 사람들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뭐야? 무슨 일이지?”
“어떤 정신병자가 여기 화장실에 있다나봐.”
사람들의 웅성웅성거림을 뒤로하고, 마침내 1층 내부로 무사히 당도했을 때였다. 민국은 젖은 옷을 손으로 털면서 입을 열었다.
“하필 유이 이 여자는 골라도 저런 놈을 고르냐.”
민국이 하기에는 좀 요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말이었다. 역시 아무리 공부를 잘하든 물질적으로 성공을 하든 이성을 보는 눈이 없으면 인생이 망하는 건 한 순간이었다. 어쩌면 민국이 강철남의 속내를 일찍이 파악하게 된 게 참말로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론은 이제부터겠지.
“…….”
“…….”
옷을 털던 민국은 당면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이 방금 전 김은주와 상담을 할 때 함께 했던 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현재 화장실에 갇혀서 비명을 지르는 그 남자의 썸녀라는 것도.
“민국….”
유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그를 호명하다가 다물었다. 소란스러운 화장실 안에서 서민국이 유유히 빠져나오는 것을 유이는 멀리서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의 옷이 꽤나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위아래로 훑어봄으로서 자각했다. 민국은 언제 옷을 털고 있었냐는 듯 두 손을 정돈하더니 말했다.
“유이 씨.”
“…….”
“일단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저기 가서 얘기하죠.”
민국은 한 시라도 강철남의 곁에서 유이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게 원래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켜버리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에, 입수한 증거물을 토대로 언급해도 벗어나고 싶어하는 게 있었다. 유이는 잠시 침묵하다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기 화장실, 철남 씨가….”
“그놈에 관련된 겁니다.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으니 그냥 잠자코 따라오셔요.”
“…….”
하지만 유이는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민국은 하는 수 없이 손을 뻗어서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평소 남성기피증이 있는 유이 딴에선 그의 그런 행보가 결코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감지한 유이가 빠른 속도로 민국의 손을 내쳐버리면서 한 걸음 물러났다.
“…….”
“에휴.”
일말의 견제어림을 담고 있는 유이의 표정에 민국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농담이 아니었다. 만일 강철남과 서민국이 싸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최유이는 무조건 강철남의 편을 들 것이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슨 사정인지도 모른 채로. 그것은 최유이의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는 수 없지.’
조용한 곳에서 일을 쉽게 끝내고 싶었으나, 결국엔 방법은 이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서민국은 물을 방수해주는 최첨단 삼성 휴대폰, 갤럭시 s4 액티브를 꺼내들었다.
유이는 돌연 휴대폰을 꺼내드는 그의 행동에 물음표가 담긴 견제 눈동자를 지었다. 민국이 곧 이어폰을 꺼내들어 자기 귀에 하나 꽂더니, 나머지 한 개를 유이에게 건네주었다.
“받으십쇼.”
“…….”
“여기에 내가 왜 강철남이랑 싸웠는지, 그 이유가 다 들어있습니다.”
대놓고 먼저 강철남이랑 싸웠다고 얘기하는 민국이었다. 그의 갑작스런 발언에 유이는 움찔했지만, 곧 서민국이 내미는 이어폰과 더불어 휴대폰 액정에 비치는 녹음 어플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 그 이어폰을 짚는 유이였다.
“…….”
이윽고 이어폰을 귀에 조심스레 꽂는 유이였다. 민국은 곧바로 재생 버튼을 틀었다. 끼리리릭… 잠시 녹음 어플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익숙한 한 남자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유이의 두 눈동자는 커지게 되고 말았다.
‘확실히 몸매가 죽이긴 죽이지. 말은 진짜 답답할 정도로 못하고 무슨 벙어리 같이 구는데.’
“…….”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거 보면 진짜 아랫도리가 뜨끈뜨끈해서 미칠 지경이라니까? 낄낄.’
이어폰 안에서 들려오는 한 남자의 음성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익숙해서 믿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최유이의 커다란 눈동자가 민국을 올려다보았다. 민국은 조금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하였다. 유이의 눈동자가 조금씩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한테 소개시켜달라고? 미쳤냐, 안 그래도 얘 공략하는 게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운 마당인데 너 같은 애 소개시켜줬다간 나도 못 따먹을 걸?’
“…….”
‘심지어 얘가 또 공부는 오지게 잘해요. 돈도 지 혼자서 많이 번다고 하고. 파뿌리 TV 애들 싹 다 합해도 그 여자만큼은 못 벌 걸?’
믿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못 믿는다 한들, 단 한 사람. 이 남자만은 믿어온 그녀였는데, 그 신뢰마저 산산조각처럼 깨져나가고 있었다.
‘그래, 진짜 말로만 듣던 초천재지. 그런 애가 어째서 부모에게는 버림받아서 고아로 살았을까. 참으로 인생도 기괴해? 그래서 말을 그렇게 못하나? 낄낄.’
최유이의 고개가 다시 한 번 크게 들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흔들리다 못해 눈시울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던 중요한 사실. 부모 없이, 고아원에서 자라 오로지 혼자서 돈을 벌고 혼자서 살아왔던 그녀. 그래도 재능 하나는 타고나게 받아서 좋은 집에서 그나마 정상인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그런 재능이 있다고 해서 결코 인간으로서의 외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그래서 최유이도 한 명쯤은 좋은 남자를 손에 두고 싶었다.
그것이 진솔한 마음이었고 그래서 강철남에게 믿음을 준 것이었다.
‘가슴 아프구만.’
서민국은 직접 녹음했던 내용을 유이에게 들려주면서 그녀의 표정 변화를 하나 하나 감상하고 있었다. 결코 재밌는 일은 아니었다.
믿음을 주었던 상대가 실은 그 믿음을 이용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누구든 가슴이 저릿저릿하고 조여 올 것이었다. 그 감정을 곧잘 이해하고 있는 서민국이었기에, 최유이를 결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 개새끼가아!’
그리고 서민국과 강철남이 그 후 조우하여 싸우는 것도 음성에 담겨 있었다. 물론 그 음성부터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기에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었다.
이어폰을 빼지 못하고 있는 유이를 보면서 서민국은 자연스레 손을 뻗어 그것을 빼주었다. 유이는 차마 남성혐오로 말미암아 그 손길을 뿌리칠 자신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 순간 죽어 있었다.
“괜찮습니까?”
“…….”
질문하는 민국이었지만 결코 괜찮을 리 없었다. 그건 민국도 알고 있었다. 유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네.’
민국은 이제 이 선에서 자기 역할은 끝났다고 감안했다. 나머지는 최유이가 결정해야겠지. 그리고 그 순간 화장실에서 웅성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느 벼락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서민국 이 씨발 새끼야!”
자연스레 민국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사람들 품속에서 빠져나와 후다닥 이쪽으로 달려오는 강철남이 보였다. 그는 변기물에 적셨던 바지와 양동이 물에 젖어버린 상의 옷차림으로 혼신을 다해 달려오고 있었다.
민국은 그런 그를 피하지 않고 그냥 빤히 쳐다보았다. 강철남이 진심으로 분노한 표정으로 득달같이 얘기했다.
“넌 죽었…!”
“…….”
“!”
분노하여 달려들던 강철남이었다. 민국의 곁에 서 있는 유이를 발견한 강철남이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가까이 대치하게 된 그 상태에서, 강철남은 유이의 분위기가 일절 달라졌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유, 유이 씨.”
“…….”
이제 결정은 유이가 내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