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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27화 (127/369)

127화

민국이 커피숍에 들려서 잘난체를 뽐내고 있는 시간, 유이는 강철남과 함께 파뿌리 TV 빌딩을 내려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머지않아 1층에 도착하여 길을 거니는 동안, 유이는 선두로 서서 걷고 있는 강철남의 뒷모습을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

두 손에 땀이 섞였고 자꾸만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강철남에게만 선보일 수 있는 면모였다.

이윽고 유이와 함께 밖으로 나온 강철남이었다. 잠시 마주하길 머뭇거리던 강철남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부드럽게 흘러가듯 움직여 자신을 마주하는 강철남의 모습에 유이도 걸음을 완전히 멈추었다.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그를 쳐다보는 유이였다.

“유이 씨.”

“…….”

“여기서 대화를 나누기는 좀 불편하시려나요? 하하….”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하게 웃음 짓는 강철남이었다. 유이는 그 말에 느리지만 확고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녜요….”

“…….”

어디서 대화를 나누든 결과적으로 나눌 대화는 한정되어 있었다. 유이는 차마 시선을 마주할 수는 없어 눈길을 발치 쪽으로 내렸다. 그때 맞은편에 있던 강철남이 허리를 수그리면서 인사했다.

“그땐 죄송했습니다…! 유이 씨!”

“…….”

그것은 진심 어린 사과였다. 적어도 유이가 보기에는 말이었다. 강철남은 정말 폐를 부렸다는 듯 유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고, 유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강철남이 입을 열었다.

“유이 씨에게 그런 행동을 했던 건 어디까지나 제 자괴감이랑 열등감이 만들어낸 것이었어요…. 하지만 전 그때도 유이 씨를 계속 좋아했습니다. 아니, 좋아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유이 씨를. 하지만….”

‘유이 씨는 혼자서도 무엇이든 다 해쳐나가더군요.’라고 말을 덧붙이는 강철남이었다. 그 말에 유이는 고개를 느리게라도 젓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누구든 간에 그녀가 어떤 고난이든 고역이든 다 해쳐나가는 걸로 보였을 터였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녀의 내면을 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르겠지.

‘유이 씨는 단단한 여자군요 엇흠.’

왠지 여기에 오기 전, 그녀의 집에서 그리 중얼거리던 민국의 대사도 떠올랐다. 유이가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있자 강철남이 허리를 들면서 말했다.

“정말 미안했어요 유이 씨.”

“아녜요….”

어렵게 말을 꺼내는 유이였다. 강철남은 드디어 생긴 그녀의 반응에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베시시 웃음 지었다. 유이는 그의 미소를 오랜만에 보게 되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마음만은 아직도 그를 향해 뛰고 있음을 유이는 곧잘 알 수 있었다.

“유이 씨.”

“…….”

“비록 끝이 안 좋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시작할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은 굉장히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금까지의 행보를 볼 때 어느 정도는 유추할 수 있던 것이었다. 이윽고 유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강철남이 용기 있게 몇 발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보드라운 한 손을 양손으로 꽈악 잡는 강철남이었다.

유이는 일순간 움찔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얼마지 않아 다시 걸음을 앞으로 회수하게 되었다. 강철남의 눈빛은 그 여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제가 유이 씨에게 잘못했던 것들, 다시 원점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

“그리고 유이 씨에게 상처 주었던 것들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하고 올바른 길로 바꾸고 싶어요. 유이 씨에게 상처 주었던 것들… 유이 씨라고 상처를 안 받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 그리고 결과적으로 유이 씨를 지키고 싶은 이 마음….”

느끼할 수도 있는 멘트였지만 오히려 유이에게는 그것이 더 와닿는 순간이었다. 유이의 시선은 어느새 강철남의 시선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저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유이 씨.”

“…….”

“우리, 다시 한 번 시작해서….”

“아….”

유이는 돌연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져 오는 걸 느꼈다. 유이는 여자의 본능적인 느낌으로 그의 양손에서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났다.

역시나 과거에 그에게 일갈을 당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아무리 좋아한다고 한들 신뢰의 감정은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녀의 언동에서 그 느낌을 받을 수 있던 강철남은 비워진 양손의 느낌에 잠시 침묵했다.

‘아….’

유이는 손을 회수하고 나서야 또 다른 감정을 느꼈다. 오히려 자신의 이렇게 내빼는 행동을 통해서 그가 잘못된 오해를 갖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여자의 방어적인 행동에 남자들은 사소한 오해를 짊어지곤 했으니까.

“아니… 그게… 저….”

“…….”

유이는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혼동했다. 그런 유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철남이 곧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아….”

“유이 씨의 마음이 정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죠….”

유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강철남의 마음은 돌아선 것일까? 유이는 그를 다시금 붙잡고 싶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유이 씨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앞으로도 노력하는 수밖에.”

“…….”

“무모한 제안일 수도 있지만, 오늘 밤에… 시간 괜찮아요?”

포기하는 건 줄 알고 머뭇거리던 유이였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강철남이 용기 있게 건네는 그 제안에 유이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제안에 승낙을 표명했다.

“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금 전진하는 느낌이 드는 듯싶었다. 강철남은 제안을 승낙해준 유이의 언동에 환하게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곧 밝아진 목소리로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정말 고마워요 유이 씨!”

“…….”

“저, 정말… 노력할게요!”

그리고는 유이를 마주한다. 유이는 어릴 때부터 미소를 짓는다는 게 어색해서 잘 안 됐지만, 나름 노력하는 표정이라도 지으려고 했다. 그때 강철남의 휴대폰이 우우우웅거리고 진동했다. 유이와 더 대화를 나누려고 했던 강철남은 그 휴대폰의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아’ 탄성을 터트리며 말했다.

“유이 씨. 저 잠시만 화장실 갔다 올게요. 친구 전화라서요.”

“네….”

“늦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요! 어디 가지 마시구요!”

그리고 강철남은 휴대폰을 쥐고 후다닥 1층 화장실로 뛰어가는 모습이었다. 무려 10분간의 짧은 대화. 그러나 유이는 그동안 얽매여 있던 갈등이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싹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에 뭉쳐 있던 옹아리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허억 허억.”

그렇게 뛰어가는 모습을 취하면서 유이에게서 멀어지던 강철남이었다. 이윽고 빌딩 안으로 들어와 화장실 근처에 다다르자 강철남은 홱하고 고개를 돌려 밖에 있는 유이의 자취를 확인했다.

정작 강철남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모르고 유이는 꽤나 설레하는 모습 같았다. 이윽고 강철남이 휴대폰의 발신자를 다시금 확인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친구, 동성 친구였지만 왜 속히 말하는 픽업아티스트였다. 강남이나 명동 같은데서 맘에 드는 여자들만 콕콕 짚어서 번호를 전부 저장한 뒤, 연락을 하면서 몸까지 공략을 하는 게 취미랄까….

“하나같이 다들 속아서는. 이래서 여자들이 멍청한 거지. 삼류 드라마에 진탕 빠져서 이런 연기 한 번 취하면 다들 속고 들어가니까.”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철남의 안색은 금세 변하고 말았다. 이윽고 전화를 받는 강철남이었다. 목소리도 언제 소심했냐는 듯 극도의 자신감으로 뭉쳐 있었다.

“어, 자식아 왜. …낄낄낄! 그러냐? 아, 나는 예전에 찼던 여자 말이야. 자꾸 스퀸십 거부하길래 안 되겠다 싶어서 찼었는데 계속 떠오르더라고.”

강철남은 풍만한 유이의 몸매가 떠오르는지 침이 흘러나오는 걸 닦았다. 어느덧 화장실까지 다다른 강철남은 안으로 들어간 뒤에 바로 세수를 하는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쏴아아 틀었다. 휴대폰을 어깨에 대고 받으면서 양손을 닦는 그였다. 행동이 아주 여유로웠다.

“확실히 몸매가 죽이긴 죽이지. 말은 진짜 답답할 정도로 못하고 무슨 벙어리 같이 구는데, 그래도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거 보면 진짜 아랫도리가 뜨끈뜨끈해서 미칠 지경이라니까?”

낄낄 웃으면서 강철남은 통화하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었다.

“너한테 소개시켜달라고? 미쳤냐, 안 그래도 얘 공략하는 게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운 마당인데 너 같은 애 소개시켜줬다간 나도 못 따먹을걸? 야, 그 정도로 어려운 애야. 픽업아티스트라고 무슨 여자들 다 먹고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수도꼭지를 잠그고 두 손의 물기를 터는 강철남이었다. 표정도 어느 덧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

이미 강철남은 스스로 픽업아티스트라 호칭을 불러도 될 정도로 많은 여자들을 공략한 이였다. 다만 파뿌리 TV에서는 접촉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초면인 사람들이었고, 어느 정도 탐색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심성을 두고 가면을 쓴 것이었다. 다만 그 가면의 겉과 속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게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심지어 애가 또 공부는 오지게 잘해요. 머리까지 좋더라? 근데 학교는 고등학교 도중에 자퇴했다고 하고… 야! 심지어 컴퓨터 C언어나 그런 것도 잘해. 걔 집에 가보니까 막 프로그램 서적들이나 그런 거 쫙 깔려 있더만. 돈도 지 혼자서 많이 번다고 하고. 파뿌리 TV 애들 싹 다 합해도 그 여자만큼은 못 벌 걸?”

세안대 쪽에 엉덩이를 걸터앉으면서 다리를 건들거린다.

“그래, 진짜 말로만 듣던 초천재지. 그런 애가 어째서 부모에게는 버림받아서 고아로 살았을까. 참으로 인생도 기괴해? 그래서 말을 그렇게 못하나? 낄낄.”

‘단순히 먹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애인데?’라고 말하는 발신자 친구였다. 그 말에 적극 공감한다는 듯 강철남이 입을 열었다.

“그렇지? 진짜 아깝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낄낄. 야, 이참에 그냥 걔랑 결혼해서 돈 다 내껄로 돌려버릴까? 막 이혼 소송해서 위자료도 받을 수 있지 않나? 아무리 요즘 시대가 여자들 위주로 돌아간다지만 그래도 이혼할 때는 정당할 거 아니야?”

유이는 강철남의 이런 속내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강철남이 너무나도 잘 숨겼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맘만 먹고 속이려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타고난 눈썰미가 있지 않은 이상, 발견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은별이가 민국 자신을 보며 은근슬쩍 속삭이던 말이 떠오른다.

‘난 저 남자 별로 맘에 안 들어.’

‘왜?’

‘마치 뭔가를 숨기고 있는 느낌이야.’

‘너의 속옷 안에 숨겨진 그 뿅처럼?’

‘죽을래? 어떻게 알았어!’

시상식 때의 뒷이야기를 떠올리는 변기칸의 민국이었고, 이미 휴대폰의 녹음기는 틀어서 강철남의 목소리 하나 하나를 세심하게 녹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강철남이 계속하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못 봐줄 정도였다.

“나만 계속 붙잡게 만들어야지. 원래 그렇게 남자 물정 모르는 여자랑 결혼해가지고 편한 살림 차리는 게 남자 꿈 아니겠냐. 요즘은 여자만 취집하는 게 아니라 남자도 취집하는 시대야 킥킥.”

벌컥. 변기칸의 문이 강하게 열어젖혀졌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강철남은 돌연 들려온 소리에 ‘어이쿠 시발’하면서 화들짝 놀랐다. 이윽고 변기칸 쪽을 바라본 강철남은 경직된 표정으로 굳고 말았다.

“세상에 나보다 미친놈이 있을 줄이야.”

“…….”

민국의 진심 어린 말이었다.

“미친놈은 몽둥이가 약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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