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민국이는 철남 씨랑 아는 사이지? 실제로 둘이 방송하던 걸 본 적이 있는 거 같아서."
합석하게 된 자리에서 김은주가 물었다. 유이의 옆에 앉은 강철남은 꾸벅하고 고개를 까닥이듯 인사했다. 유이는 그런 강철남을 경직된 얼굴로 쳐다보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이 그런 유이를 흘긋 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 예전에 서라 통해서 같이 합동 방송을 했던 적이 있으니까요."
"서라? 아, 콩딱지 님?"
"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분에게도 스폰 제의를 한 적이 있는데 왜 항상 거절일까? 민국이 넌 혹시 이유를 아니?"
민국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요? 방송으로나 친한 사이지 실질적으로 아는 건 없어서요."
"그래? 흐음, 아쉽다."
강서라가 스폰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때문이었다. 파뿌리 TV 업체를 비롯해 스폰서에만 밝혀질 테지만, 그래도 입소문이란 건 상당히 위험했다. 입술이란 게 항상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면 근질근질거리니까.
"……."
유이는 이런 급작스런 만남에 순간적으로 두뇌까지 경직된 모습이었다. 원래부터 말이 없는 그녀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비즈니스적인 업무의 대화조차도 어려운 형편 같았다.
강철남은 유이와 만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왔는지, 조금은 그래도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 같았다. 민국이 그런 둘을 계속해서 지켜보다가 김은주에게 말했다.
"누나."
"응?"
"잠깐 밖으로 나와봐요."
그리고 먼저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민국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김은주가 그 뒤를 따라 나갔다.
"뭔데 그래?"
"은주 누님. 사람이 왜 그렇게 냉철하십니까?"
"내가 뭐?"
김은주는 진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민국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저기 두 사람 사귀었던 거 모르세요?"
"알지. 지금도 사귀는 거 아니야?"
"헤어졌어요."
"뭐? 진짜?"
"네. 그런데 저 둘을 같이 붙여놓으면 어떡합니까?"
"나야 몰랐지. 파뿌리 TV 쪽에도 얘기가 된 적이 없고, 애초에 방송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여전히 둘이 사귀는 줄 알았지."
"끄응. 뭐 그럼 일단 여기서 계약 얘기는 하고, 나중에 정식으로 계약할 때는 떨어져서 계약하게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래봬도 유이 씨 아직 저 문제로 많이 얽매여 있는 거 같거든요."
그 말에 김은주가 '오오~'하면서 감탄하는 얼굴을 짓더니 민국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서민국~ 너 여자 친구 있는 거 아니었어? 다른 여자에게 이렇게 호감을 보여도 돼?"
"그래도 같이 방송을 했던 비제이로서 예의만 갖추는 겁니다."
진지한 민국의 모습에 김은주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민국의 가슴 쪽을 은근슬쩍 터치하더니 말했다.
"너 운동하나 보다? 가슴 근육이 좀 튀어나온 거 같네."
"살 찐 건데요?"
"아 그래."
1kg 찐 서민국이었다. 물론 그 정도 쪘다고 해서 얼굴에 큰 형태의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잘 생긴 상태였으니까. 만일 서민국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더라면 김은주도 한 번쯤은 그에게 대시를 했을 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다시금 사무실로 돌아온 둘이었다.
어색한 공기 속에서 둘이 침묵하며 앉아 있던 유이와 강철남. 다시금 돌아오는 모습에 유이는 조금 안도하는 모양새였다.
"아무튼 그럼 강철남 씨도 왔으니 간략하게 계약에 대한 이야기 해드릴게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강철남 역시 계약에 관련된 명목들을 차례대로 들어보기 시작했다. 강철남은 사실상 정규 비제이가 아니었었다. 그러나 콩딱지와 현대왕의 합동 방송에 참여하게 되어 배틀필드의 고수로 이름을 날리게 되자, 배틀필드를 즐겨 하는 몇몇 유저들이 강철남의 방송을 보고 싶어 쪽지를 보냈던 것이다.
강철남은 어쩌다 보니 방송을 키고 배틀필드 영상을 찍게 되었고, 몇 개월 동안 그 행위를 반복하다 보니 스폰을 받을 정도의 비제이가 된 것이었다. 물론 서민국이나 유이에 비해 방송 경력이 짧았기 때문에 스폰서들이 제안하는 금액은 조금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중요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난 거 같으니 스폰 업체에서 연락이 오는대로 안내해드릴게요. 잠시 동안 휴식을 갖기로 하구요."
그리고 김은주가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수를 건네는 그녀였다. 강철남이 먼저 악수를 받으면서 고개를 숙였고, 다음이 유이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서민국.
"자식."
김은주는 서민국에겐 악수는 하지 않고 등을 팡팡 두드린 다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서민국은 '끄응'하면서 말을 중얼거렸다.
"저를 아이처럼 대하는 사람은 누님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아이처럼이 아니라 진짜 아이니까 이렇게 대해지는 거 아닐까?"
"허허, 누님이 저를 모르는군요. 저도 밤에 깊은 야수가 되곤 합니다?"
"어쭈~."
민국의 그 도발적인 말에 은근슬쩍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콕 지르면서 김은주가 야한 눈길을 보냈다. 얼굴을 슬쩍 들이밀면서, 그녀는 성숙한 여인의 채취가 담긴 목소리로 민국에게 들릴 만큼의 성량으로 속삭였다.
"그렇게 깊은 야수가 될 정도면 날 한 번 흥분시켜볼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래 그래."
천하의 성드립 제왕 서민국조차도 까딱할 수 없는 존재, 김은주였다. 이윽고 김은주가 민국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럼 이따가 뵙도록 할게요."
"예 알겠습니다…."
"……."
"이따 봐요 누나."
고개를 끄덕이듯 인사하는 유이. 그렇게 3인이 모두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을 때였다.
'잠시 커피숍에서 시간이나 보낼까. 어차피 다시 집까지 가서 기다리고 있기도 뭐하니까.'
집에서 스폰서까지 왔다갔다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냥 적당한 커피숍에서 죽치고 앉아서 전화 통화라도 하고 있으면 시간이 지나갈 듯 싶었다.
'그나저나 저 둘은 어떻게 할까.'
민국은 흘긋 유이와 강철남을 보았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서 인지 여전히 어색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딱 보아도 둘이서 무언가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민국은 적당히 이야기를 맞춰주고 몸을 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오랜만에 뵙게 된 강철남이니 민국은 한 차례 인사하기로 했다.
"철남 씨 오랜만입니다."
"아, 현대왕 님."
"어이쿠, 여기선 현대왕이라 부르시면 안 되지요. 저격고추님."
"……."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발음이 새어 나왔네요. 아무튼 둘이서 할 얘기가 있는 거 같으니 저는 먼저 자리를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아, 예."
민국의 말에 유이가 고개를 들어 민국을 쳐다보았다. 민국은 '잘해보세요 슴가 여왕!'하는 눈빛으로 유이를 쳐다보았다. 유이는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강철남을 보았다. 서서히 멀어지는 민국을 뒤로하고, 강철남과 유이의 시선이 조용히 마주하였다. 이윽고 강철남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에요 유이 씨."
"……."
유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강철남 앞에서는 왠지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네…."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그 말에 유이는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얼마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번은 둘이 만나서 대화를 나눌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네…."
*
"어느 커피숍이 좋으려나."
민국은 길을 거닐면서 괜찮은 커피숍을 찾기 시작했다. 이윽고 얼마지 않아 적절한 커피숍에 도착한 민국은 폼나게 코트를 휘날리면서 그곳으로 향했다. 문을 염과 동시에 종소리가 울리고, 카운터에 있던 여직원 셋이 소리쳤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
"어서 오세요!"
들어오는 민국의 얼굴을 먼저 보게 된 한 여직원은 말미를 흐렸다. 민국의 얼굴에서 퍼져 나오는 강렬한 후광에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말을 잃고만 것이었다. 이윽고 그 후광이 다른 여직원들에게도 전염되었다.
'나란 남자란 참. 이러다가 많은 여자들이 실명하게 생겼어.'
그리고 민국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면서 카운터로 향했다. 홍조가 일다 못해 얼이 빠진 세 여자 중 한 명에게로 다가간 민국이 말했다.
"여기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아… 2, 2800원…."
"2800원이라구요?"
"네, 넷!"
민국이 돈을 꺼내 건네주었다.
"여기요."
"아… 고,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천만해요."
돈을 건네주는 것뿐인데 마치 신에게 곡식을 받은 사람마냥 멍을 때리는 여직원이었다. 민국이 코트를 찰랑이며 몸을 돌리자 순식간에 앉아있던 많은 여성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민국은 그 시선에 상당한 만끽함을 느끼면서 근처 의자에 앉았다.
'후후, 이것이 인생의 진리지.'
그렇다. 이것이 인생의 진리다.
'여기서 mp3 노래를 딱 틀고 아이언의 독기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고개를 흔들고 있으면 대박이겠구만.'
민국은 돌연 한 가지 시 같은 문장이 떠오르는 걸 깨달았다. 그는 마치 시를 낭송하듯 마음 속으로 그것을 낭송해 보았다.
'난 지금 미쳐가고 있다.
이 헤드폰에 내 모든 몸과 영혼을 맡겼다.
음악만이 나라에서 허락하는 유일한 마약이니까.
이게 바로 지금의 나다. 크큭.'
싸이월드에서 실존하던 오글 멘트를 떠올리면서 민국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감추었다. 이미지 메이킹에는 능수능란한 그였기 때문에, 여기서도 잘 생긴 남자다운 신비주의의 분위기를 풍겨야만 했다.
"여기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아, 예!"
*
'난 지금 미쳐가고 있다.
이 아메리카노 한 잔에 내 모든 몸과 영혼을 맡겼다.
커피만이 나라에서 허락하는 유일한 마약이니까이게 바로 지금의 나다.'
"으아아악!"
민국은 현재의 상황을 시로 낭송한다면 그런 느낌일 거라 생각했다. 그는 배를 부여 잡고는 화장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커피숍의 화장실에는 이미 변기칸에 사람이 있는 상태였기에, 하는 수 없이 파뿌리 TV 업체 건물의 1층 화장실로 달려갔다.
'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어! 화산의 그것처럼 끓고 있어!'
이건 아메리카노의 잘못이 아니다. 민국이 마신 커피는 정말이지 지극히 정상적인 커피였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갑자기 배를 부여 잡고 괴로움을 토하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자면… 까닭은 간단했다. 민국은 아침에 우유를 마셨던 것이다.
"으어어억!"
부글부글! 꼬르륵! 꽤애액! 별 이상한 괴음이 뱃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민국은 가까스로 경비원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텅 비어 있는 화장실의 변기칸 구석진 곳으로 후다닥 달려가 바지를 내리고 변기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와 동시에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소음이 민국의 엉덩이 속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아이고 배야!'
민국은 참고로 우유를 마신 날에 커피를 마시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 타입이었다. 위장이 워낙 안 좋은 타입에 속했기 때문에 차디찬 걸 많이 마시면 탈나기 때문이었다. 금세 얼굴이 야위어진 민국은 속을 비우는데만 초점을 다하기 시작했다.
'제길, 이미지 메이킹은 끝장났군.'
배를 부여잡고 커피숍 내부에서 난리 부르스를 쳤으니까 말이었다. 일단 민국은 속을 비우는데만 힘을 냈다. 열정적인 음악 소리처럼 안에서 쏟아져 나온 내용물들. 뜨거운 엉덩이를 뒤로하고 민국은 화장실의 변기물을 내렸다. 쏴아아아아.
"휴우…."
이제야 한숨 던 듯한 표정을 짓는 민국. 집중력이 아무리 뛰어난 격투기 선수라 할 지 언 정 자신의 복부에서 찾아오는 고통은 감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민국이었다.
"이제 일어나볼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화장실 문을 쾅하고 열면서 들어오는 누군가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아주 쉽게 속일 수 있겠더라고 키킥."
"엉?"
민국은 그 웃음 소리가 심히 익숙한 소리란 걸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