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25화 (125/369)

125화

<스폰서>

"스폰서 계약하러 왔다고요? 어디 스폰이요?"

유이가 흘긋 고개로 건물을 가리켰다. 민국이 들어가려고 하는 건물이었다. 민국은 순간 넋을 잃었다가 스폰서의 내용이 적힌 종이를 보고는 확신했다.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이럴 수가, 정녕 나에게 반해서 쫓아온 게 아니란 말인가!"

"……."

"최유이, 역시 어려운 공략 캐릭터야!"

무슨 미소녀 연애 시물레이션을 하는 남자 주인공마냥 지껄이는 서민국이었다. 유이는 이제야 말도 안 되는 오해가 풀렸음에 조금 속이 시원해지는 모양이었다. 민국이 스폰서 종이를 건네면서 유이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런 거면 진즉에 말씀을 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유이 씨. 정말이지 남자를 오해하게 만들려는 재주가 타고난 여인이군요."

"그건 민국 씨가 혼자…."

"후! 설마 내가 고단수의 어장관리에 휩쓸릴 줄이야, 나도 참. 아직 눈썰미를 더 키워야겠어."

"……."

그렇게 민국의 말에 할 말을 잃는 유이였다. 이미 두 번은 때렸는데 한 대 더 때렸다간 불쌍할까봐 참아주며, 선두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민국을 따라 들어갔다.

"그럼 유이 씨도 저랑 같은 스폰을 하는 거군요. 제품은 같으려나? 스폰 쪽으로 연락 온 사람이 여성이었습니까?"

"네……."

"허허, 그렇구만. 같구만."

높고 굵고 아름다운 건물 안의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며 층수를 누르는 민국이었다. 유이는 그런 민국의 뒤에 가만히 서서 대기했다.

이윽고 이 건물의 직원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점심 시간이 끝난 듯 엘리베이터에 꽉 들어차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만석이 되기 시작하는 엘리베이터 공간에 민국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자연스레 유이의 옆에 다다르게 되었고, 둘은 졸지에 구석진 곳에 옹겨 붙게 되었다.

"……."

조용조용하고 과묵한 분위기가 풍기는 직원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서서히 층수를 올라가기 시작한다. 민국은 옆에 있는 유이를 내려다보다가 돌연 팔꿈치에 어떤 압박이 느껴지는 걸 느꼈다.

'은별이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의 감촉이 느껴진다!'

"……."

"엇흠! 콜록 콜록!"

민국은 기침을 하는 척 리액션을 하며 잠시 입 근처로 올렸던 손을 다시금 내렸다. 그러자 자연스레 다시금 유이의 풍만한 옆면에 촉감이 느껴졌다. 유이 역시도 그것을 느꼈는지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하지만 뭐라 할 수 없는 게… 현재 상황상 이 비좁은 공간에서 서로의 몸이 접촉되는 건 별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유이의 그것은 흉악하다 못해 무기라고 불리어도 과언이 아닐 지라… 부피와 크기상 닿는 건 별 수 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자꾸만 노골적으로 접촉이 느껴지자 유이가 조금씩 경계심을 드러내며 민국을 쳐다보았다.

'만진 것도 아니고 손을 늘어뜨리고 있을 뿐인데 닿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제 손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

눈으로 그리 표현하는 민국의 모습에 유이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냥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층수가 올라가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몇 번이고 열렸다. 건물의 직원들이 차례대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고 서서히 사람들이 줄어들어 마침내 단 둘만이 있게 되었다. 민국은 그제야 '후우'하면서 옆으로 몸을 때었다.

"어이구, 이거 저도 모르게 실례했습니다."

"……."

"때리지 마세요! 이건 제 잘못 아닙니다?"

확실히 민국의 음흉한 감정이 일말 느껴지긴 했지만 민국의 탓은 아니었다. 손을 아무리 오므린다 한들 유이의 그것이 너무나도 흉악해서 어찌 됐든 닿았을 것이었다.

민국도 그래도 나름 여자 친구가 있다고 최대한 조심하려고 노력(?)했고 말이다. 띵동.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고대하고 고대하던 13층에 도착하게 되었다.

승강기의 문이 열리고 민국과 유이는 차례대로 내렸다. 그리고 근처의 사무실로 향하자 한 여자가 둘을 발견하고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뜸 앞장 서 있는 민국에게로 다가와 악수를 청하는 검은 정장의 여자.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반갑습니다 누님. 오랜만이군요."

민국도 반갑게 악수를 신청하였다. 안경을 쓰고 민국에게 누님이란 호칭으로 불리우는 여자는 딱 봐도 이 13층의 사무실에서 어느 정도 직계가 되는 여인 같았다. 나이도 도무지 스무살 초반처럼 발랄한 느낌이 들지 않았고, 회사에서 반복되었던 여러 신경전 어린 싸움 속에서 살아남은 성숙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반가워요 유이 씨. 실물은 처음 보는군요."

"네…."

다음 타자로 그 여인은 유이를 상대했다. 비지니스용 눈웃음을 그리며 유이에게 악수를 청하는 그녀. 유이는 소심하게 그 악수를 받았다. 이윽고 여인이 주머니 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유이에게 건넸다.

"여기 제 명함이에요. 받으시고 앞으로 중요한 일 있을 때 연락 꼭 주시기 바랍니다."

"……."

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받은 명함에는 김은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윽고 김은주가 손뼉을 짝하고 치더니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디 지금 사무실에 사람도 비었겠다, 한 번 이야기나 진행해볼까?"

"이래봬도 바쁜 사람이니 빨리 빨리 진행해주시죠 누님. 엇흠."

"어휴~ 그러셔요? 키만 크고 성숙하진 않은 우리 아들님아?"

거만하게 말하는 민국의 머리를 실실 웃으면서 쓰다듬는 김은주였다. 실로 노련한 놀림이었다. 역시 사회에 진출한 성인다운 노련함이라고 할까? 민국이 아이 취급을 받는 모습을 보는 것은 유이도 생소했던 지라 신선했다. 이윽고 민국이 자리에 앉고, 일어서 있는 유이를 바라보며 김은주가 입을 열었다.

"앉으실까요?"

"……."

고개를 끄덕이며 민국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는 유이였다. 이로써 스폰서 제안을 받은 두 남녀가 한 사무실에 모인 가운데, 그 둘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김은주가 씩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민국이 너 유이 씨랑 같이 스폰 받은 줄은 꿈에도 몰랐지?"

"말을 해주셔야 알지요. 저는 유이 씨가 저 좋아해서 여기까지 따라온 줄 알았습니다."

"푸하! 어떻게 따라오는 줄 알아? 도중에 만나서 왔어?"

"예, 뭐 그렇게 되었어요."

민국의 말에 김은주가 유이를 돌아보았다.

"유이 씨. 어때요 민국이? 실제로 보니까 느낌 전혀 틀리지 않아요?"

"똑같…."

"똑같댄다 푸하하! 유이 씨도 네가 어떤 애인지 대충 아는 모양이구나?"

민국은 '쩝'하고 입만만 다셨다. 확실히 사회를 겪은 어른이란 건 차원이 달랐다. 특히 그것이 높은 직위에 한 번쯤 올라본 여인이라면 더했다. 민국이 가진 소위 '변태 매력 없애기' 가면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것도 스폰서를 받고 있는 김은주였다.

"어찌 됐든 이번엔 무슨 스폰입니까? 또 돈 말고 무슨 쿠폰이나 제품 주겠다고 광고해달라는 스폰이면 사절이에요."

민국도 돈에 관련된 건 항상 신중해야 했기 때문에 철저히 비즈니스적으로 나갔다. 그런 진중하고 업무적인 민국의 면모도 매우 생소했던 지라 유이는 조금 신선함을 느꼈다.김은주가 눈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이번엔 쿠폰이나 제품 같은 거 말고 돈을 줄 거야. 컴퓨터 업체에서 연락이 왔거든. 너희들이랑 계약을 하고 싶다네. 다만 우리 파뿌리TV를 거쳐서 하는 계약이 너희들 딴에도 믿음이 가고 안전할 테니, 3자 계약으로 진행될 예정이야."

옛날에는 2인 계약을 진행했었다. 그저 파뿌리 TV 비제이와 광고를 부탁할 업체가 교류하여 이야기만 나누고, 일정 돈을 통장에 입금한 뒤 메인에 광고를 해주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파뿌리 회사에서도 그 스폰에 끼어들고 있었다.

비제이가 방송을 위해 사용하는 사이트가 파뿌리 TV이니 만큼 자신들에게도 합리적인 대가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 는 명분하에 진행되는 것이 제3자 계약이었다. 민국과 유이는 가만히 김은주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갔다.

확실히 비즈니스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한 그녀답게 단어 하나 하나가 신중하고 설득적이었다.

"계약은 2년이야."

"상당히 많군요. 그럼 그 계약 기간 동안 사이트 메인에만 올려두면 됩니까?"

"그건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누어지지. 방송 하단에도 광고를 올려주면 더 비싼 금액을 주긴 할 거야."

그러고는 김은주가 먼저 받은 계약서를 두 사람에게 하나 하나 건네주었다. 계약서를 양손으로 짊어진 유이가 천천히 항목들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법적인 항목들이 자연스레 나열되어 있었다.

"유이 씨는 처음이라서 조금 어려우시죠?"

"아니에요…."

유이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사실 이런 계약서를 처음 접목하는 사람이라면 머리가 어지러울 테지만, 그래도 유이의 머리는 천부적인 공부 기질을 타고난 것이었다.

완연히 이해는 못해도 어느 정도 내용들을 하나 하나 이해할 수 있었다. 이윽고 민국과 유이가 심도 있게 계약서를 훑어볼 때 웃음 지으며 이를 지켜보던 김은주가 손목의 시계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이제 슬슬 올 시간이 됐는데."

"누구 또 오기로 했어요 누님?"

"응. 한 분 더 불렀거든. 곧 올 거야."

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김은주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국과 유이의 고개가 자연스레 문 쪽으로 돌아갔다. 유이의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반가워요. 강철남 씨."

"……."

"……."

하필 그곳에서 맞이하게 된 사람은, 유이의 옛 여인인 강철남이었다. 강철남은 유이가 사무실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자 그녀와 마찬가지로 얼굴이 경직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손을 건네는 김은주에게 짐짓 미소를 지으면서 대꾸했다.

"반갑습니다…."

"……."

*

"이상한 닝겐님이 고민으로 쪽지를 보내주셨네요. 저 초등학생인데 형들이 담배 피는 걸 보니까 한 번 펴보고 싶어지더라구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으음… 방법이 하나 있어요."

방송 중에 있는 강은별의 말이었다.

"엄마한테 가서 얘기하세요. 엄마 나 초등학생인데 담배가 너~무 피고 싶어. 나 어떻게 해야 돼? 그럼 엄마가 알아서 해줄 거예요."

[ㅋㅋㅋㅋㅋㅋ]

"집안에 뭔가… 어, 이게 뭔가 어감이 이상하실 수 있는데 이상하게 듣지 마요? 집안에 길고 딱딱한 게 있으면 그걸로 엄청 쳐맞게 될 거예요. 그게 빗자루일 수도 있고 청소기일 수도 있고 골프채일 수도 있고… 그냥 모조리 있는 걸로 존나 다 쳐맞을 거예요. 그리고 맞다 보면 사람이 죽을 거 같으면 금연하게 되어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간만에 대학교 수업이 없는 날이라서 집안에서 대낮부터 방송을 하는 은별이었다. 파뿌리 TV에서 대상을 받아 더욱 유명해진 강은별인지라 시청자수들도 부쩍 늘어난 추세였다. 그리고 예전에 민국의 몰래 카메라 이후로 안티가 조금 생기게 되었지만, 그것도 은별의 성실한 노력으로 서서히 잠잠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서민국….'

하지만 그런 은별의 성실함을 자꾸만 방해하는 한 존재가 있었다. 실체함과 더불어 지금은 여기에 없는 존재. 곁에 없기 때문에 더욱 불안이 가시는 존재! 민국의 음탕한 웃음이 자꾸만 눈에 비쳐서 은별은 슬슬 미칠 지경이었다. 짐짓 웃으면서 시청자들을 향해 인사하는 은별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고마워요 시청자들. 사랑해~."

[으아 남고딩 가지 마 ㅜㅜ]

[츤츤을 보여줘! 츤츤고딩!]

"즐 꺼져."

그리고 방송을 끄는 은별이었다. 은별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침대로 천천히 향했다. 폴싹하고 오르가슴 사건이 있던 그 침대에 누운 은별은 배게에 얼굴을 대고는 눈을 감았다.

"미쳤어 정말…."

'으아!'하면서 배게에 얼굴을 묻고 비명을 지르는 은별. 자꾸만 떠오르는 그의 얼굴이 애석하고 얄미울 따름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은별. 애꿎은 침대가 거칠게 흔들렸다. 흔들리지 않는 침대, 시몬트 침대의 구입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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