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24화 (124/369)

124화

“흐암, 아무튼 이제 슬슬 나가보겠습니다. 내일은 유이 씨가 제 집으로 찾아오는 거 잊지 마시구요.”

“…….”

끄덕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였다. 이로써 두 사람의 용건도 이제 끝난 것 같았다. 민국은 이제 고대하고 고대하던 스폰서 업체 쪽 회사로 향하기 위해 전철을 탑승할 때가 되었다. 유이와 간략하게 인사를 나눈 뒤 복도로 향하여 신발을 신는 민국. 그런데 무슨 연유에선지 유이도 옆에서 따라 신발을 신고 있었다.

“허허, 배웅해줄 생각입니까? 이런 가슴처럼 마음도 풍부한 여자 같으니.”

“아니 저도….”

유이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을 이었다.

“나가봐야 해서요….”

“후후, 그런 식으로 다들 핑계를 대지요! 역시 여자들이란. 명분을 참으로 중요시하는 동물이란 말이지 귀여워.”

“…….”

유이가 괜히 민국 하나 만나겠다고 이렇게 옷을 예의 바르게 입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 딴에서도 중요한 용무가 하나 있던 것이다. 고로 유이는 현관문을 나가면서 필요한 물건들만 주머니 속에 넣었다. 민국은 먼저 밖으로 나와 유이를 기다렸다. 이내 유이가 밖으로 나오자 민국이 물었다.

“어디 가시려고 합니까?”

“역에….”

“호오~ 역까지 데려다주실 심산이세요? 역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라도 갑자기 생기셨나요? 후후.”

“…….”

말로는 차마 이길 수 없으니 그냥 관두는 유이였다. 이윽고 민국이 선두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유이도 그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두 사람은 한쌍의 어울리는 커플과도 같았다. 비록 분위기는 일반 커플들과는 다르게 애매한 구석이 있었지만. 이윽고 민국이 길을 걷다 말고 말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더라.”

“…….”

“유이 씨가 앞장 서시죠. 레이디 퍼스트니까요.”

이럴 때만 레이디 퍼스트다. 어차피 민국의 뒤를 쫓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 유이였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앞에 섰다. 민국은 기다렸다는 듯 유이의 뒤에서 걸어가면서 그녀의 뒤태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흠흠!”

“…….”

“아주 좋아, 예술상의 한 모습이로군.”

턱에 손을 얹고 고개를 끄덕이는 민국은 심히 예술적인 작품을 보는 것마냥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가 지나친 드립이 순간 나오고 말았다.

“이야, 저 풍만한 엉덩이 보소! 가슴의 뒤를 잇는 제2세의 섹시함이네!”

두두두두두두두! 성드립에 가까운 말에 유이가 잽싸게 몸을 돌리면서 발을 놀렸다. 민국은 오늘도 한 번 쨍쨍한 햇볕 아래에서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지붕의 새들조차 깜짝 놀라서 이를 지켜볼 정도였다. 설마 인간이 저 정도로 하늘을 날 수 있을 줄이야, 우리 동족인가? 의문을 품을 정도였다.

“끄어어어어….”

“…….”

좀비 소리를 내며 입을 벌리고 쓰러진 민국을 보며 유이는 발을 회수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치마를 입고 있었단 사실을 자각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람 한 점 없는 골목길이었다. 이윽고 유이가 쓰러진 민국을 보고는 조곤거리듯 옹알거렸다.

“야한 건… 싫어요….”

“죄,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 목숨만은….”

“…….”

“저는 집에 기다리는 아내도 있고 제가 오기를 나날이 기다리기만 하는 어여쁜 딸과 아들 둘이….”

없는 소리까지 중얼거리며 사정사정하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유이가 몸을 홱 돌려 다시 정면을 보았다. 또각또각 걸음을 이동하는 유이의 뒷모습을 보며 민국은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났다. 그래도 인간의 적응력이 참 무서운 것이, 처음엔 그토록 강렬하던 고통이 이젠 서서히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쩜 격투기 선수를 꿈꾸는 수많은 어린 양들에게 유이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맞게 한다면 지구 최강의 맷집을 소유하게 되지 않을까? 민국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이 갑시다. 가슴을 잇는 또 다른 섹시한 부위를 가진 유이 씨.”

“…….”

그리하여 전철역에 도착한 두 사람. 민국은 그래도 유이가 보기와는 다르게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배웅도 하는 여자구나 생각했다.

“보기와는 다르게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배웅도 하는 여자시군요. 이제는 됐습니다. 제 길 이제 저 혼자 갈 테니 굳이 그쪽도 따라올 필요는 없습니다.”

“…….”

그 말에 유이는 천천히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막 인사를 끝내고 계단을 먼저 올라가던 민국이 그것을 보고는 소리 질렀다.

“어헛! 굳이 따라오실 필요 없다니까요? 여자가 왜 이렇게 튕기지를 못합니까?”

“아니….”

“은별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튕길 줄 알아야지요! 그래야 여자입니다! 여자의 살결이 괜히 찰진 줄 압니까? 튕기기 때문에 찰지는 겁니다 세상에는 다 이유가 있어요!”

민국의 충고에 유이는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민국은 그런 유이의 모습에 이마에 손을 올리고는 ‘하아’하면서 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정말이지 안 되겠다는 듯 자뻑하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정말… 나란 남자… 어쩔 수 없는 남자….”

“…….”

“그래요. 같이 가드리죠 유이 씨.”

그리고 개찰구 앞에 도착한 뒤였다. 표를 찍는 민국. 띡. 그에 따라서 유이도 표를 찍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띡.

“어허? 이 사람이 그래도 또?”

“…….”

“아깝게 1600원까지 써가면서 꼭 저를 따라와야겠습니까? 언제부터 유이 씨가 그렇게 적극적이었어요?”

“저도 갈 곳이 있….”

“하! 됐습니다. 그런 핑계 더 이상 원치 않아요.”

그리고 전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민국이었다. 유이는 그런 민국을 할 말이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따라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민국은 과민반응을 하듯 ‘어허! 이 여자가 또!’하면서 선비처럼 으름장을 놓았다. 유이는 몇 번이고 발을 놀리려다 이미 한 번 때렸으니 참자고 생각했다.

이윽고 철도로 전철이 오는 모습이 보였다.

- 잠시 후 …역 차가 오니

“설마 제 전철 안까지 따라오실 생각은 아니지요?”

“…….”

“말이 없는 거 보니 이거 사실 같구만!”

민국은 처음엔 장난으로 하다가 이제 슬슬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거 언제부터 유이 씨가 날 좋아하게 된 거지? 설마 아까 그때인가?’

민국이 사고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냐고 자상하게 질문하던 그때였다. 본래 연애 공부 문답서에서 여자의 마음을 뺏는 비기의 기술을 확인하길, 나쁜 남자가 대세라고 했다. 차가 오는 차도에 여자를 밀어버린 다음에 차가 오면 꽈악 손으로 붙잡아서 자기 쪽으로 당겨 품안으로 안겨주는 그런 남자!

‘흠, 내가 늘 변태처럼 행동하다가 자상한 그 행동 하나에 반전 매력을 느낀 모양이군. 큰일이야 큰일. 이거 남도 아니고 은별이가 앞으로 고생하겠어.’

예나로도 상대하기 족할 텐데 거기다가 슴가의 마왕이라 불리는 유이까지 붙고 말았다. 이거 실로 은별이 고생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기 있는 남자의 여자 친구는 원래 인생이 고달픈 법이다. 그 정도는 각오해야겠지.

“…….”

그리고 콧구멍을 벌렁벌렁거리며 전철 안의 기둥에 기대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있는 민국을 옆에서 보고는 가만히 서 있는 유이였다. 유이가 보기에 민국의 단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자뻑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호감이 없는 행동에도 ‘이 사람이 날 좋아하는 건가? 하! 나 참, 또 한 여자가 슬퍼하겠군.’하면서 아무 생각 없는 여자가 자길 좋아하는 것마냥 만드는 것! 비록 잘 생기고 워낙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보니 그런 도끼병도 납득이 된다지만, 그래도 병은 병이었다.

“…….”

다만 유이는 진짜로 민국과 함께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민국도 보아하니 무슨 약속이 있는 것 같았고, 유이 역시 약속이 있어서 어디론가 향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유이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하지만 내심 명분을 찾기 위해 물어보겠다는 듯 민국이 잘난체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유이 씨는 어디 가려고 전철을 타신 겁니까? 설마 내 마음?”

“일….”

“일? 하! 그렇군요. 훗.”

“…….”

은별이 이를 봤으면 ‘미친놈….’소리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주변에서 소곤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이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저 남자랑 여자 봐 커플인가봐.”

“이야, 선남선녀네. 심지어 저 가슴… 우와.”

“지금 내가 A컵이라고 무시하는거야? 오빠 그렇게 가슴이 좋아?!”

“어! 아니야 자기야! 그런 게 아니라!”

“…….”

민국과 유이를 호기심 있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돌연 싸우는 커플을 보던 유이였다. 그러고 보니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민국과 유이를 흘긋 흘긋하고 있었다. 유이는 그 시선이 차마 내키지 않았는지 고개를 숙여 피하려고 했다. 그것을 느낀 민국이 말했다.

“아니 왜 그렇게 고개를 숙입니까? 그렇게 사람들 시선이 싫어요?”

“…….”

유이는 고개를 끄덕일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민국은 팔짱을 끼며 대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유이 씨. 사람에게 시선을 받는다는 건 실로 좋은 일이에요. 뭐 그렇다고 해서 연예인이나 그런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각광 받는 비쥬얼이 되니까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말로는 외모지상주의는 잘못되었다고 해도 그런 사람들조차 외모 있는 이성을 바란다고요. 그런 점에서 감안할 때 유이 씨는 좋은 것을 날 때부터 받아 태어난 인물이란 겁니다. 부모님에게 감사하다고 여겨야 한단 뜻이지요!”

“…….”

“고로 저처럼 자세를 잡고 있어 보십시오. 자, 어디 이걸 한 번 봐요. 이 뻔뻔함을!”

자기 자신이 뻔뻔한 것을 곧잘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민국의 말대로, 그는 자기 비쥬얼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었다. 때문에 그 자신감이 더욱 비쥬얼을 빛나게 해주었다.

유이도 나름대로 각광 받을 수 있는 비쥬얼이었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몸매를 비롯해서 외모까지… 어떤 면에선 민국이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유이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역시 민국을 따라하기는 벅찼던 것이다. 자신감을 내뿜던 민국은 ‘허참’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났고, 마침내 고대하던 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 이번에 내리실 역은 ……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저 따라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려 30분이 걸리는 이 거리까지 저를 배웅해줄 필요는 없었단 말입니다. 유이 씨.”

“…….”

“그리고 절 좋아하는 것도 알겠지만 이러는 건 저도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 전철 문이 열립니다.

이윽고 문이 열린 뒤였다. 민국이 발을 내디뎠고 유이가 발을 내디뎠다. 민국은 자신의 으름장에도 도무지 그칠 기미를 안 보이는 유이의 발걸음에 ‘후우!’하고 숨을 내쉬었다.

‘모르겠군, 될 대로 되라 그래!’

“…….”

그리고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가는 민국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유이.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약속한 장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

하지만 약속한 장소로 향하는데 어쩐지 가는 길이 같았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도 뭐했고, 민국은 정말로 유이가 작정을 하고 자신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마침내 스폰서를 받을 거대한 회사 앞에 당도했을 때였다. 민국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유이가 그 뒤를 따르려 했다. 민국이 소리쳤다.

“유이 씨! 그만하십시오! 이건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비록 그쪽의 풍만한 가슴에 무언가를 비벼보고 싶다 한들 이건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 같단 말입니다!”

“아니….”

“왜요? 이제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 겁니까? 설마 제가 스폰하는 곳까지 가서 ‘이 남자 제 남자예요! 왜 말을 못해요? 이 남자 제 남자다, 왜 말을 못하냐구요!’라고 소리치려는 겁니까? 정말 어이가 없어서….”

“스폰….”

“스폰이 뭐요? 제 스폰 말입니까? 하! 그래요 말씀드리죠. 저 스폰 받았습니다 무려 월 300! 그런데 그런 스폰이 한 개가 아니에요! 그래요 저 돈 많고 잘난 남자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저에게 반하겠지요!”

두다다다다다다다다! 더 이상 못 봐주겠는지 한 대 맞는 민국이었다.

“끄어어어어….”

“…….”

유이가 천천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어떤 종이였다. 맞고 나서야 퀵 마우스를 다물게 된 민국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것을 확인했다.

“이건 뭡니까… 종이?”

“스폰서….”

민국이 유이를 쳐다보았다.

“스폰서 계약하러….”

“…….”

그녀 또한 스폰서 계약을 하러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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