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통화를 끊은 유이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드르륵 의자에서 일어난 그녀는 컴퓨터 전원을 잠깐 끄기로 했다.
어질러져 있는 자신의 방. 독서책부터 비롯해 문서집들까지 침대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덕분에 유이가 자는 곳은 침대가 아닌 비어 있는 바닥 한가운데였다.
벌레들이 꼬일 걱정이 적잖이 있는 그곳에서 유이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입는 옷들에는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이윽고 현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는 유이였다. 오후의 햇볕이 눈부셔 밀짚모자를 쓰고 밖으로 걸어 나온 그녀는 민국이 있을 곳을 찾기 위해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날씨도 슬슬 쌀쌀해지고 있고 가을이란 계절이 찾아오고 있으니, 유이는 타인들의 시선을 받는 게 조금이나마 덜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풍만한 그녀의 가슴은 항상 남녀노소 불문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뜨게 하며 시선을 집중시켰으니까. 한참을 걷던 유이가 마침내 시장 바닥에 도착했다.
그녀가 휴대폰을 들어 아직 친구 추가가 되어 있지 않은 번호를 입력했다. 서민국이었다.
뚜루루루루. 통화 연결을 한 뒤 휴대폰을 귓가에 댄 유이는 민국이 전화를 받자마자 입을 열었다.
“어디….”
“네 가슴속.”
“…….”
“은 농담이고 여기가 대체 어디죠? 저는 누굽니까? 유이 씨는 누구죠?”
정말이지 지나칠 정도로 농담을 따먹는 서민국이었다.
“저 시장 앞….”
“아, 시장이에요? 그럼 저 좀 찾아주십쇼. 저는 당신의 아이, 부모가 고아 된 아이를 찾는 건 당연한 의무 아닙니까?”
“…….”
“물론 아이가 길을 잃었다고 혼내키지는 마세요! 어리면 누구나 한 번씩은 그럴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가 이렇게 장난친다고 만나서 구타할 생각은 관둬달란 얘기였다. 유이는 주변을 느리게 둘러볼 때마다 자신을 비껴 지나가며 스리슬쩍 상복부를 쳐다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느꼈다. 또 한 번 그런 눈길이 싫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린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한참을 찾던 끝에….
“어머니!”
“…….”
민국을 찾을 수 있었다.
‘와, 시발 대한민국은 아직 죽지 않았어!’
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유이를 발견하고는 서민국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금방에라도 만세 삼창을 할 듯한 표정으로 민국은 유이와 대면했다.
“유이 씨를 통해 저는 다시 한 번 한국의 뜨거운 감동을 느꼈습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육중… 아니 풍만한 따뜻함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여자입니다.”
“…….”
“고로 저랑 결혼해주시지요.”
민국의 갑작스런 청혼에 유이는 고개를 느리게 가로저었다.
“싫어요….”
“쓰읍! 가슴만 큰 주제!”
“…….”
유이의 발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이젠 하도 맞다 보니 그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던 민국이 한 걸음 잽싸게 물러나며 소리쳤다.
“가슴도 예쁘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고 모든 면이 완벽한 유이 씨 주제에!”
“…….”
“이렇게 서라처럼 연기 좀 해보고 싶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유이 씨.”
서라라도 유이에게 그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유이는 등이 보이게끔 몸을 돌려 자신이 걸어왔던 시장의 맞은편을 보고 중얼거렸다.
“따라 오세요….”
집 위치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자기 집을 남에게 보여주는 일은 함부로 하지 않는 유이였다. 하지만 앞으로의 미래도 있었고,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느 때든 서민국도 유이의 집에 찾아올 줄 알아야 했다. 그 사실을 소극적인 유이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를 집으로 인도하려는 것이었다.
“예. 갑시다. 근데 유이 씨 오늘은 왜 긴팔 입고 오셨습니까? 유이 씨에겐 딱 달라붙는 와이셔츠 같은 게 좋은데 말이지요.”
“…….”
“아, 오해 마십시오. 전 그저 어울린다고 얘기한 것뿐이지 그게 유이 씨의 바스트와 어우러져 섹시함을 뽐내기 때문에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그냥 제 취향이 그렇다구요.”
자기 취향을 여기서 왜 이야기하는지…. 유이는 반쯤 돌려 쳐다보던 고개를 다시 앞으로 향하게 한 뒤 걸음을 지속했다. 얼마지 않아 그녀의 걸음이 시장 바닥을 가로질러 허연 골목길 앞에 다다랐을 때일까. 몸을 좌측으로 홱 꺾더니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유이였다.
민국은 돌연 멈춰선 그녀가 어딘가를 쳐다보는 모습에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2층짜리 집 한 채가 그곳에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호오, 혹시 여기입니까 유이 씨?”
“…….”
유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야, 예상이랑은 조금 달라서 안타깝네요.”
“……?”
의외로 부잣집 딸일 지도 모르겠단 민국의 예상은 빗나갔다. 유이의 의혹 서린 시선이 순간적으로 민국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 고개를 돌려 천천히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유이 역시 좋은 편에 속하는 집에 살고 있었다.
은별이 집보다 조금 작을 뿐, 대가족이 모여 살아도 괜찮을 만한 집이랄까. 민국은 조용하게 현관문을 열고 있는 유이의 등을 보면서 물었다.
“여기 길을 외워두어야겠구만.”
“…….”
“그런데 유이 씨는 가족 누구랑 사십니까? 설마 혼자예요?”
“…….”
열었던 현관문의 손잡이를 붙잡고 당기려던 유이의 손짓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민국 딴에선 그냥 무심코 던진 질문일 뿐이었다. 이윽고 유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호오! 그래도 50평은 남짓할 집인데 혼자 사용하면 또 다르겠네. 설마 당신이 한국의 부잣집 딸입니까?”
“…….”
그 말에 유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유이를 보면서 민국은 당차게 따라서 들어왔다.
복도는 꽤나 넓은 편이었다. 아니, 혼자 사는 집이라 감안할 때 정말이지 괜찮은 편이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도 높았고, 커다란 거실부터 비롯해 거실이 고스란히 비추는 창문까지…. 가족이서 모여 사는 게 아니라 혼자 사는 집이라면 큰 편에 속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2층에서 보는 전망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생각 이상으로 천장이 높구만.’
“여기….”
유이가 말미를 흐리면서 1층 거실 쪽을 가리켰다. 거실의 불을 키고 그쪽을 손짓하는 모습에 민국이 ‘아’하면서 말을 이었다.
“너무 진도가 앞서가시는 거 아닙니까?”
“…….”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저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닙니다.”
그리고 유이가 무서운 반격(?)을 취하기 전에 허겁지겁 거실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민국이었다. 그 모습에 할 말을 잃었던 유이는 이내 부엌으로 향하더니 컵 두 개를 꺼내기 시작했다.
“커피… 아니면….”
“물 한 잔 주시면 되요.”
어차피 이따가 스폰 계약을 할 때 거쳐가는 누님과 조우함으로서 커피 한 잔 거하게 마실 것이었다. 유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쟁반 위에 컵 두 잔을 내려놓고는 냉장고의 차가운 물을 꺼내 따르기 시작했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뒤로하고 민국은 계속해서 거실을 둘러보았다.
‘흐음, 예상 이상으로 크구만. 근데 뭔가 빈 느낌이 들기도 하네.’
마치 뭐라고 할까. 사람이 사는 집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귀신이 사는 집 같은 건 아니었고, 묻어나야 하는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할까. 그녀다운 집답게 굉장히 조용하고 고요함이 묻어났다.
“…….”
이윽고 유이가 컵 두 잔에 물을 따르고 쟁반 채로 가져왔다. 사각형의 작은 높이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는 모습에 민국이 천천히 컵 하나를 손에 쥐고는 홀짝거렸다.
“! 이 맛은!”
“…….”
“물맛이군요.”
가볍게 장난을 치고는 물잔을 다시금 내려놓는 민국이었다. 유이는 물잔의 물이 진짜 물맛이었기 때문에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주변을 다시금 둘러보던 민국은 상당히 고요한 분위기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해도 이렇게 남자를 함부로 초대해도 괜찮은 겁니까?”
“그건 민국 씨가 저랑….”
“뭐요? 민국 씨가 저랑? 이럴 수가, 설마 그만큼 저를 신뢰하는 겁니까? ‘저, 저는 민국 씨면 상관없어요! 설사 제 몸을 만진다 하더라도…!’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
“미안합니다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마지막 기회였다.
“그건 그렇고 유이 씨랑 이렇게 단 둘이 만나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요. 왜 초면 때 실제로 한 번 만난 거 이후로 처음 아닙니까?”
“…….”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였다.
“그때 그러고 보니 유이 씨 가면을 썼었는데, 이제는 그 가면도 벗고 다니는군요. 시상식 때도 가면을 벗고 왔었고! 설마 저 때문입니까? 저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겁니까? 깔깔깔!”
“…….”
“이건 고개를 안 끄덕이는군요 쩝.”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였다. 민국도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런데 무슨 말 좀 해보십시오. 왜 이렇게 말이 없습니까?”
“…….”
“처음에 만났을 때는 그래도 흑흑 울거나 얘기라도 좀 하던데. 설마 저하고는 말도 아예 섞기 싫다는 의미입니까!”
“아니요….”
유이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그냥 할 말이 없어서….”
“후우, 보통 내 옆에 있으면 나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말을 거는 여자들이 이 세상천지인데 당신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보통이 아닌 걸?”
“…….”
솔직히 너무나도 잘 생긴 민국이 곁에 있으면 맘에 안 들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호감도 느끼고 이성적인 감정도 싹틀 것이었다. 하지만 유이는 그런 소소한 감정에 취하기에는 감정이 많이 메말라 있는 여성이었다. 강철남을 통해 더 그렇게 되었고 말이었다.
“옛다. 받으세요.”
“…….”
민국이 주머니 속에서 병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유이는 고개를 들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얀 액체가 담긴 하얀 병이었다.
“제 아기씨들입니다. 일회용이니 내일은 직접 받으러 오셔야 할 겁니다.”
“…….”
“아!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제 앞에서 드시지는 말아주세요! 또 두드려 맞을라.”
민국은 하얀 액체를 입에 담자마자 처절하게 두드려 패던 유이가 떠올랐다. 어쩜 그녀와 결혼한 남편은 정말이지 다른 의미로 몸이 하루 쉴 날도 없지 않을까 생각됐다.
이윽고 유이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 병을 쥐려고 했다. 하지만 어제의 그 맛 때문인지 잠시나마 머뭇거렸다. 이윽고 그것을 손에 쥔 유이가 품속으로 가져오면서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예. 고마운 거 알면 됐습니다. 그리고 유이 씨는 뭐 큰 문제는 없죠?”
민국의 질문에 유이가 고개를 돌려보았다. 민국이 다소 진지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예전에 사고 있었잖아요. 그때 유이 씨도 크게 다쳤었고, 솔직히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으니까. 그에 대한 트라우마라던가 그런 게 남아 있나 싶어서요.”
“…….”
좀 의외스러운 모습이었다. 예나가 곁에 있어서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일 대 일로 마주한 상황에서 유이에게 진심으로 염려되어 묻는 질문. 유이는 그 의외의 자상한 면에 새로운 감정을 느끼면서도 한 편으론 여전히 경계했다.
“없어요….”
“그렇습니까? 흠, 유이 씨는 자세히 보면 볼수록 단단한 여자로군요.”
“…….”
단단한 여자. 아직 민국이 모를 뿐이지 천재적인 능력도 탁월하고, 싸움도 굳이 배우지 않아도 우월한 편에 속했다. 재능 있는 유전자들을 모두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녀. 때문에 민국의 그 표현이 어느 정도는 틀린 게 아니었다.
누가 건드리든 그게 마법을 쓰는 비상식적인 존재가 아닌 이상 꿈쩍도 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한정되어서 표현되는 말일 뿐 실질적으론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