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유이가 강철남을 잊었다면 사실 그건 거짓말이다. 강철남이 정확히 어떤 남자인지 확실히 아는 건 없었다.
만난 지 거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헤어졌으니까 말이었다. 하지만 유이는 그를 적어도 다른 남자들보단 특별하게 여기고 있었고, 그 역시도 단순히 유이의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탐하기 위해 접근하지 않았었다. 물론 유이는 처음엔 그를 믿지 않았다.
그가 일편단심에 매너 있고 자상한 남자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그저 처음에는 얘기를 들어볼 때 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자신과 같은 처지로 민국에게 이리저리 방송에서 치이던 게 동질감이 느껴져 고백을 받았던 게 있었다.
망신과 더불어 복수하고 시던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좋아합니다 유이 씨.'
때문에 유이는 아직 그를 잊지 못했다. 미련이었다. 헤어진 것도 사실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강철남이 유이의 그 뛰어난 능력들을 뒷받침 해줄 자격이 안 되었고, 그에 대해서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유이의 본 능력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그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
어쩌면 유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사실상 예나가 아닌 강철남을 두고 하는 이야기일 지도 몰랐다. 이윽고 유이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했던 예나였다. 한참동안 초점이 흔들리던 예나는 곧 자문하게 되었다.
'늦었다고 생각해도… 붙잡아주었으면….'
예나가 다시금 민국에게 대시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질까? 사실상 말의 맥 자체가 맞지 않는 입장이었다. 민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예나를 포기한 게 아니라고, 예나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 은별이만을 사랑하자고 결심한 거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는걸.'
어떻게든 잊어보려고 해도, 어린 시절부터 쭈욱 한결같았던 그녀의 짝사랑이었다. 그 길고긴 짝사랑이 이렇게 비극처럼 끝나는 걸 과연 예나는 원할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건 예나 스스로도 자각하는 바였다.
'붙잡아주었으면 하는 바램….'
예나는 생각했다. 사실상 붙잡고 싶은 건 자신이라고.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붙잡아보고 싶다고. 말의 어폐에 모순된 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유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고마워요 유이 씨."
"……."
잠시 강철남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던 유이가 예나의 말에 쳐다보았다. 예나는 흔들리던 눈을 바로하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정말로요."
"……."
"저 잠시, 일어나볼게요."
집에 간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어딘가에 볼 일이 있었다. 고로 예나는 의자에서 일어났고 식당에 남은 건 유이 홀로였다. 유이는 웅성웅성거리면서 이쪽을 자꾸만 쳐다보는 남자들을 신경쓰다가 다시금 한 입 김밥을 입에 담을 따름이었다.
"요즘 엄마보다 민국이랑 같이 있던데 진도는 많이 나갔니?"
"아, 아니야! 무슨 소리야 지, 진도라니!"
"어머… 내 딸 말 더듬거릴 땐 항상 뭔가를 숨기는 건데… 콘돔은 잊지 않았지?"
엄마와 통화를 나누고 있는 은별은 얼굴이 붉어져서 '@*#@*(#[email protected]'하는 식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역시나 오랫동안 산 경험 때문인지 성에 관련하여 좀 더 편하게 대화를 하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아무튼! …지금 다시 식당 들어가봐야하니까 이따 전화할게."
"일찍이 손주를 보고 싶구나."
"엄마도 참…!"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죽겠는지 은별은 외치면서 통화를 끊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면 진짜 손주를 보게 될 지도 모르겠어.'
통화를 끊은 뒤 은별은 다른 잡념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게 민국과 벌써 진도가 입…까지 나가버리지 않았는가? 아니, 사실상 말하자면 전부 다 나간 상태였다. 이제서야 뒤늦게 은별이 자기 몸을 아끼기 시작한 것이었고.
"으으! 정말…!"
머리가 쥐어터지겠다는 듯 소리를 치던 은별이었다. 식당으로 들어가려던 그녀는 자리에 유이와 예나만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멈칫했다.
"서라는 화장실에 간다고 했었고, 이 변태는 어디 갔지?"
은별은 민국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자기가 나가자마자 바로 따라서 나왔던 것 같은데…. 바깥을 둘러보던 은별은 막 근처 전봇대 앞에서 전화통화 중인 민국이 보였다. 은별은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누구랑 통화 중이지?'
은별은 마치 남들에겐 들려줘선 안 된다는 듯 먼 곳에 가서 얘기를 하는 민국의 모습에 의문을 느꼈다. 그리고는 그의 통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미세하게나마 민국이의 대화 내용이 들려왔다.
'그럼 그때 시간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누나. 그럼 밤에 보는 건가요?"
'그래~ 누나가 잘해줄 테니까 옷 잘 차려입고 와.'
"허허, 이거 장소가 장소다 보니까 큰일 생기는 건 아니죠? 누님만 믿습니다."
'후후, 그거 가지고 오는 건 잊지 않았지?'
"아 고무 같은 원형의 그거요? 이름이 갑자기 기억이 안 나는데, 흠 가져가겠습니다."
'그래~ 내가 사러 갈 시간이 없어서 이러는 거니 대신 부탁할게.'
"예 그럼 내일 뵈요."
그리고 통화를 뚝 끊는 민국이었다. 전화 내용을 얼핏이나마 들은 은별은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누나? 방금 누나라고 했지?'
은별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민국이 누나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유이밖에 없었다. 유이말고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근데 대뜸 누나라니! 심지어….
'고무 같은 원형? …그건 설마.'
고무 같은 원형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건 단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은별은 서서히 머리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이윽고 몸을 돌려 식당으로 들어가려던 민국이었다. 뒤에 있는 은별을 발견한 민국이 크게 놀랐다.
"뜨허억!"
"……."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집주인에게 들킨 듯한 모습이었다.
"여친님? 어머님이랑은 통화 끝났어?"
은별은 일단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 여자 누구야?"
"어? 뭐가?"
이거 이거 숨기고 있다. 뭔가 수상하다!
"방금 통화한 여자 누구냐고. 누나라고 하던데."
"……."
"말 안하는 거지? 아님 못하는 건가?"
은별이의 눈빛이 서서히 불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고무 같은 원형이라는 거 들었을 때부터 이상했어…."
"앵?"
"언제부터였어? 언제부터였는데! 응?! 이 바람둥이 변태 새끼야!"
부리나케 화를 내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얼굴을 들이대는 은별의 모습에 뜨허억하고 놀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잠깐! 진정해라 강은별! 오해다!"
"오해는 무슨 오해야! 내 귀로 똑똑히 들었는데! 시치미를 떄고 싶어도 이미 늦었어!"
"아니 시치미가 아니라 진짜 오해라니까 이 여자야! 왜 사람 말을 이상하게 오해를 해!"
"오해를 안하게 생겼어? 고무 같은 원형이라며! 그게 뭔데? 응? 그게 뭐냐구우!"
"그건… 아!"
"모른다고 시치미 땔 꺼지? 역시 널 믿은 내가 바보…!"
"그거 뚜러벙!"
"…뭐?"
민국이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뚜러뻥이라고 뚜러뻥. 변기 뚫는 거."
"…변기 뚫는 게 왜 나와?"
"이 누나 화장실 변기 막혔다잖아. 뚜러뻥 사려는데 시간 없다고 내꺼 좀 빌려주라는 거고."
"……."
"그리고 나랑 방금 통화한 사람, 이번에 나랑 계약할 스폰서 누나인데 전에도 한 번 계약했던 적이 있었어. 이번에 다시 새로운 제품으로 계약을 하려는거지. 그래서 연락이 온 겁니다만?"
"……."
"푸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
은별의 속내를 밝혀낸 민국이 깔깔깔하며 웃기 시작했다.
"설마 바람피는 거로 보였어? 내가?"
"모…!"
상당히 창피한지 은별이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다가 말았다.
"모… 모… 모몰라!!!! 바보야!!!"
그리고 홱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그런 은별에게 다가가 와락 안으면서 말했다.
"어휴 우리 은별이 또 삐지셨군요! 어디 이 잘 생기고 잘 나가는 제가 다독여드리겠습니다."
"이거 안 놔? 놔! 이씨! 놔…!"
"푸헤헤헤헤헤헤!"
"……."
그의 비웃음 소리에 마냥 창피하기만 한 은별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이렇게 질투를 하고 화도 낼 수 있는 것이리라. 민국은 아직도 오해할까 싶어서 전화기를 들어 스폰서라 정확히 적힌 그 이름도 보여주었다.
"…스폰서였으면서 말은 왜 그렇게 오해하게 하는데?"
"너의 질투가 낳은 비극이지!"
"밤에 만난다는 건 무슨 소리야… 술이라도 한잔 하겠다는 거야?"
"흠, 장소가 술집이긴 한데 그건 계약하는 사업가 중에 워낙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장소를 거기로 한 거야. 원래 점심쯤에 만나는 게 편한데 그러기에는 앞으로 할 일이 있으니까."
할 일이라는 건 네 여자의 필요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일이리라. 이윽고 은별을 껴안고 있던 민국이 몸을 물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 됐지?"
"……."
"가자."
그리고 은별의 손을 붙잡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비록 토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바람은 아니라서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그런 은별을 데리고 식당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어느 누군가가 식당에서 후다닥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이쪽으로 달려왔다.
"헉헉!"
"예나야?"
예나는 빠르게 달려온 탓에 잠시 허리를 수그리고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거칠어진 숨이 전부 사그라들자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민국과 은별을 보았다. 민국과 은별이 서로 오붓하게 붙잡고 있는 두 손은 그들이 커플임을 명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짝사랑을 해왔던 예나로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게 있었다.
'늦었지만 붙잡고 싶어지는 것도 있는 법이야.'
유이가 했던 그 말이 어렴풋이 기억에 떠오르면서, 예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민국이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예나가 '민국아!'하면서 용기 있게 소리쳤다.
"좋아해!"
"……?!"
"……!"
"단순히 친구로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좋아해! 정말로!"
예나의 기습적인 고백이었다. 그리고 그 고백은 평소에 당황하지 않던 민국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은별은 이게 무슨 현상인가 싶어서 한참을 놀라다가 소리쳤다.
"미…미쳤어?!"
"네! 미쳤어요! 그리고… 은별 씨!!"
붉어진 얼굴로 은별을 쳐다보는 예나였다. 예나의 눈에는 이전에 은별과 대립했을 때의 그 강인한 활력이 다시금 돌아오고 있었다.
"지지 않을 거예요…."
"……."
그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은별이 아무 말도 못하는 가운데 예나가 고개를 돌려 민국을 보았다. 벙을 찌고 있는 민국을 향해 예나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민국아. 너무 갑작스러웠지?"
"어음…."
"나 오늘은 이만 가볼게. 서라랑 유이 씨에게는 대신 말해주고. 내가 먹은 김밥은 내가 비용 냈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리 말하고는 예나는 눈웃음 짓던 눈동자로 민국을 쳐다보았다.
"내일 보자."
"……."
용기를 내서 소리내고는 홱 몸을 돌리는 예나였다. 은별은 졸지에 남자친구가 있는 앞에서 선전포고를 받은 여자가 된 것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멍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은별의 고개가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그녀의 눈빛이 냉큼 사나워졌다.
"…어떻게 할 거야?"
"……."
은별의 물음이었다. 만일 이 물음에 신중히 답하지 못한다면 지옥을 맞보게 될 것이었다. 은별 딴에서도 민국을 자신의 남자 친구로서 계속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그리고 민국 딴에서는….
"만세!"
"……."
퍽! 하렘 계획의 과정에 저도 모르게 만세 자세를 취하는 민국이었고, 그런 민국의 정강이를 한 대 팍 때리는 은별이었다. 하지만 은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내일 있을 그 폭풍우가 예나와 자기 사이에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지…. 그리고 민국도 모르고 있었다.
하렘 건설에 필요한 과정 중 하나가 얼마나 '치욕'적일 지 말이었다.
두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