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19화 (119/369)

119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이 있다. 뛰는 놈은 걸어가는 놈보다 나태하지 않고 빠르며, 대신 단점으로는 심장이 힘들 정도로 열심히 뛰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놈은 신체에 부화를 주지도 않고 여유롭게 날아가며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사실상 뛰는 놈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끄어어어어억!"

하지만 여기, 날고 있되 뛰는 놈보다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는 놈이 있었다. 서민국, 그는 맞는 것을 대가로 하늘을 나는 천국을 맞보고 있었다.

"……."

입속에 담긴 그 징그러운 느낌이 끝까지 사라질 때까지 유이는 쉴 틈 없이 민국을 두드려팼다. 그 결과 민국은 유이의 구타를 최장시간 맞는 어마어마한 일을 만들고 말았다. 기네스북 조건으로 채워도 충분할 정도였다.

'이, 이런 폭력을 맛본다면 더 이상 다른 폭력에 만족할 수는 없어!'

늘 사디스트로서의 느낌만을 안고 있던 서민국에게 서서히 마조라는 새로운 감정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이윽고 서민국이 별천지인 나라로 향하기 위해 잠시 동안 기절했을 무렵, 서라가 대신해서 정신을 깨우게 되었다.

"읭. 의잉. 여긴 누구 나는 어디?"

"서라야 괜찮니?"

"앗! 마, 마사카! 이것은 혼또니 예나 언니찡은 허벅지?"

예나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있던 것을 자각한 서라가 짐짓 부끄럽다는 마냥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가 싶더니, 돌연 머리를 대놓고 예나의 허벅지에 비비기 시작했다. 예나는 간지러움과 더불어 민망함에 어색하게 웃음 짓다가 말했다.

"간지러워."

"간지러움의 대가로 저는 허벅지를 느끼져! 엇? 이익! 출렁출렁 마왕!"

"……."

막 민국의 액체를 삼킴으로서 잠잠해져 있던 유이였다. 그런 그녀를 발견했음에 서라는 다른 의미로 크게 놀랐다.

"이건 꿈인가효? 설마 액체의 효과인가!"

"…마시지도 못하고 기절했으면서 무슨 액체의 효과야?"

가만히 있던 은별의 핀잔에 서라가 '파르르르….'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병에 있는 나머지 액체들을 확인한 후 그것을 손으로 붙잡고 자기 품으로 가져오면서 말했다.

"다시 한 번 드셔볼게여."

그리고 손에 쥐어진 그 병에 스푼을 넣고 한 입 뜨려는 찰나였다. 알 수 없는 냄새가 콧속으로 스멀스멀 다가오자 서라는 다시 한 번 긴장한 모습이었다.

"타임!"

"또 왜 그래?"

은별이 묻는 가운데 서라는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휴대폰이었다. 잠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서라가 곧 어떤 음악을 켰다. 그 음악은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던 노래였다. 이윽고 서라가 이윽고 그녀가 세 여자가 쳐다보는 가운데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만일 기절했다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

"……."

"바로 여러분! 두둥!"

뒤에 '나는 너의~'하면서 노래가 퍼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서라는 내용물이 담긴 그 스푼을 입안에 담았다. 맛을 볼 생각도 없이 꿀꺽 삼킨 서라였다.

'으악!'하면서 다시금 예나의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듯 기절해버리는 서라였다. 은별은 그런 서라를 보면서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있었고, 유이는 원래 할 말이 없었으며, 예나는 그저 말없이 쳐다볼 따름이었다.

*

그리하여 민국과 서라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연 10분이 흐른 뒤였다. 10분 동안 깨어있던 세 여자는 각자 할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은별, 예나, 유이, 어느 누구도 분위기를 메이킹할 수 있는 인물은 없던 지라 결코 어색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윽고 민국이 서라에게 물었다.

"서라야. 먹었어?"

"웁! 얘기하지 말라능! 속이 우글우글거린다능!"

그 말에 민국은 잠시 여기 좀 와보라며 서라에게 손짓했다. 예나의 허벅지에 여전히 누워 있던 서라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민국에게로 다가왔다. 이윽고 민국이 그 누구도 듣지 못하게 서라의 귓전에 이렇게 속닥였다.

"이제 너는 내 아이를 임신한다."

"히이익!"

"심지어 아랫입이 아니라 윗입으로 아이를 토해낼 것이다."

저주에 가까운 발언에 서라는 옆에 있는 은별이에게로 다가가 붙잡았다.

"언니찡이 사귄 사람은 기어코 로리콘이었나여? 로리콘이었음? 로리콘인가여?"

"……."

직관력이 높은 은별답게 매서운 눈빛으로 민국을 쏘아보았다. 서라에게 이상한 소리를 했다는 걸 캐치했다는 것이다.

민국은 유이에게도 구타 당한 마당에 은별에게도 당하고 싶지는 않아 '오해입니다 마님!'하면서 부정했다. 어쨌든 그리하여 오늘의 일은 순조로이 해결된 것 같았다.

네 여자 모두 민국의 그것을 한 방울 삼키는데 성공했고, 앞으로 내일까지는 목숨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이건 가슴처럼 한 시간만 만지고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큰 일이네.'

민국이 현재에도 걸려 있는 가슴 저주는, 여자의 가슴을 한 시간만 만지면 하루를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고로 가슴에 두 시간 손을 얹고 있으면 약 이틀을 생존할 수 있었다.

허나 이번 네 여자가 얽혀 있는 조건은 결코 그렇게 순탄스러울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하루에 한 방울. 그 이상 마셔봤자 무조건 하루 동안 생존만 가능하기 때문에 매일 매일 민국의 집에 방문하여 그것을 마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마시지 않으면 금방 죽음에 달하고 마니… 어찌 보면 이거 매일매일이 위기라고 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이제 정리를 좀 해야 하나.'

민국은 현재 상황에서 주도를 해야 할 사람이 자신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근처에 예나도 있겠다, 민국은 이미지 메이킹에 최선을 다하며 눈웃음 짓고 말했다.

"자, 그래도 이렇게 모이게 된 것도 오랜만인데 식사 한 번 하는 게 어떨까요? 유이 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유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려고 했다. 그녀는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으시다구요? 알겠습니다."

"……."

하지만 이번에도 깔끔히 무시 당하는 그녀였다.

"예나 너는 어떻게 생각해?"

"아… 나는… 그래도 괜찮아?"

예나가 은별을 스리슬쩍 보다가 물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여전히 민국을 대하기가 껄끄러웠다.

만일 이런 필요 조건이 붙지 않았더라면 예나는 진짜 몇 년 동안 민국 앞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이고, 앞으로는 계속해서 민국을 보아야 할 터였고 민국은 그것을 감안해서라도 지금 예나와의 사이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재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서라는 어떠냐?"

"엣헴, 나님은 정치인들과 비정상회담을 나눌 정도로 바쁜 사람입네다!"

"밥값은 내가 내주지."

"읏흠! 비정상회담 약속 시간을 좀 늦춰야겠군! 때때론 사과박스보다 중요한 게 있쥐!"

그러면서 휴대폰으로 마치 연락을 하는 척하는 서라였다. 민국은 다음으로 은별을 돌아보았다.

은별과는 굳이 얘기를 나누지 않았지만 어떤 의사가 오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이미 라면을 먹어서 배가 어느 정도 포만감이 느껴지는 은별이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모일 네 사람을 위해 어느 정도 중제를 하려는 게 민국의 바램임을 알았기에 은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 갈게."

그리하여 다섯 사람은 식사를 하기 위해 집을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들이 그렇다고 해서 어디 비싼 곳으로 가서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평범하고 익숙한, 김밥천국에 나란히 5인이 등장하여 식사를 만끽하게 된 것이다.

"우와, 저 여자들 봐. 죽인다."

"대, 대단한데? 저 남자는 뭐라고 저렇게 많은 여자들을 데리고 다녀?"

"보니까 저놈도 한 인물하잖아.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나 보지."

"크다…."

김밥천국에 있던 몇몇 모임의 수근거림을 뒤로하고, 각자 자리에 앉는 민국 일행이었다. 음식 주문은 별 특별한 거 없이 진행되었다. 서라는 우동을, 유이는 김밥을, 예나도 김밥을, 은별은 일반 찌개류였다. 민국은 은별에게 들릴 정도로만 작게 소근대면서 기도했다.

"부디 저 찌개의 지방이 가슴으로 향하기를…."

"닥쳐줄래?"

탱탱거리는 은별을 뒤로하고, 식사에 전념하는 다섯 사람이었다. 물론 식사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가 조금씩은 오갔다. 유이는 거의 반쯤 공기 취급이었지만 그녀는 바캉스에서도 그랬기 때문에 익숙한 상태였다.

'…….'

예나는 반대로 이 순간순간이 어색하고 힘들었다. 민국과 조우한다는 게 어떤 의미에선 좋기도 했지만, 그가 자신에게 이성적 호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도무지 좋을 수만은 없었다. 우우우우웅.

"……."

이윽고 김밥을 먹고 있던 은별이었다. 옆에 있던 휴대전화가 울리자 그것을 확인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이 장난스레 물었다.

"누구? 혹시 남자친구?"

"맞을래? 우리 엄마거든?"

"아, 어머님이구나. 받고 와."

은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서 휴대폰을 받기 시작했다.

"나님은 화장실 점 갔다올게여."

이윽고 은별을 따라 화장실로 향하는 서라였고, 민국은 자신도 돌연 휴대폰이 위잉 울리는 걸 보았다.

'뭐지? 아.'

휴대폰을 확인한 민국의 눈이 커졌다. 잠시 근처에 있는 예나와 유이의 안색을 살피더니 휴대전화를 들어 일어나는 민국이었다.

"일단 둘이서 먹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으응."

"……."

민국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로써 자리에는 식사 중인 예나와 유이만이 남게 되었다. 물론 둘이 먹고 있는 것은 고작 김밥 두 줄이었던 지라, 식사를 한다고 할 수도 없었고 입이 오히려 심심할 때가 많았다. 예나는 천천히 유이를 눈길로만 쳐다보았다.

'유이 씨는… 민국이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

예나는 돌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라야 민국에게 동생으로서의 호감이 있어 대우를 받는 거라 쳐도, 유이는 무슨 연유로 바캉스에 놀러왔던 것일까. 여자들만 모이는 자리라면 오히려 오지 않으려고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쩜 그녀도 민국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유이 씨라면… 나랑은 다르게 민국이에게 저돌적으로 고백하지 않았을까?'

마음을 가지고만 있는 것과, 마음을 고백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예나는 그런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에 민국이의 마음이 돌아서버린 걸 지도 몰랐다. 그에 반면 유이는… 가끔 난데없긴 해도 자신의 분노 같은 감정 전달에 있어선 아주 익숙했다.

그것을 입으로 표현하지는 않을 지 언 정 행동(?)으로 대신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이 씨는… 참 대단한 거 같아요."

"……?"

말없이 김밥만 담고 있던 유이는 돌연 들려온 예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예나는 처음으로 대화를 한다 싶을 정도로 어색한 유이에게 두 손을 꼼찌락거리면서 말했다.

"이런 말이 갑자기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뭔가 자기 감정에 대해서 솔직한 편인 것 같거든요."

"……."

"화도 낼 때는 확실히 내고… 의사 표현도 할 때는 확실히 하잖아요."

고개를 저으려고 하는 유이였다. 하지만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로 말하는 예나는 그런 유이를 조금도 보지 못했다.

"저도 제 감정을 남에게 좀 더 솔직하고… 진솔하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항상 유이 씨를 볼 때마다 그런 동경심을 조금 느끼곤 해요."

'오해야.'

유이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겠죠? 왜 요즘 이런 말도 있잖아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 늦었다고."

"……."

그러나 그 말에 유이는 입을 다물었다. 돌연, 강철남과 함께 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로 말미암아 유이는 처음으로 또박또박 말을 담게 되었다.

"아니…."

"……."

예나의 고개가 자연스레 유이에게로 돌아갔다. 유이의 눈빛은 진지했다.

"늦었다고 생각해도 붙잡아주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어…."

"……."

"어느 누구에게나……."

유이의 그런 모습이 생소했던 예나 딴에선, 눈을 휘둥그레 뜸과 더불어 초점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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