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민국의 부름에 예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안 그래도 긴장해서 경직되어 있던 몸이 갑작스레 들려온 요상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만 것이다. 그 결과 예나는 액체가 담겨 있던 병을 위로 던지듯 놓쳐버렸고, 그 내용물로 말미암아 얼굴이 범벅이 되고 말았다.
'냄새가 너무 역해….'
예나는 코로 파고드는 냄새에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떤 면으로는 굉장히 야한 냄새이기도 했다. 마약을 직접 흡입해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윽고 예나가 꿀꺽 침을 삼켰다. 허나 그것은 혓속에 액체들이 묻어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한 행위였다.
결과적으로 예나는 '으읍!'하면서 목을 부여잡고 콜록콜록이게 됏다. 자리에서 일어나 예나에게로 다가왔던 민국은 그녀의 심상치 않은 상태에 등이라도 다독이려고 했다. 그러나 예나는 액체가 목에 걸려서가 아니라, 처음 맛보는 이상한 맛에 속이 일렁여서임을 보여주듯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가리고 화장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수도꼭지의 물이 거세게 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은별은 민국을 대신해서 현관문을 열고 밖에 있는 사람을 맞이했다.
"욧쓰."
"……."
"히사시부리."
마치 일본 애니에서 안경 돼지 오덕후들이 하는 특유의 인사를 찡긋하는 서라였다. 정작 자신은 여자에다가 엄청 예쁜 주제에 말이었다.
이윽고 서라가 찡긋하고 눈윙크를 하듯 인사했다가 침체된 분위기에 의아함을 가졌다. 또 한 편으로는 문을 열어준 사람이 민국이 아니라 은별이라는 사실에 다른 의미로 놀라는 모습이었다.
"어, 어멋! 마사캉!"
"……."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거 같아염! 저 나갈게염!"
홱하고 몸을 돌리는 서라의 어깨를 붙잡는 은별이었다. 은별은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들어올 땐 맘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야."
"히익!"
그리하여 서라도 민국의 집에 도착. 이로써 세 명의 여자가 민국의 집에 당도한 게 된 셈이었다. 서라는 민국에게 굽신굽신거리듯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보스 독침몬에게 독침을 맞아서 평생동안 HP가 깎이게 생겼음. 고렙으로서 책임의 의무를 지고 HP포션을 생산 부탁드림."
"후훗, 어리석은 녀석. 내 HP포션을 얻고 싶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루어야 할 터인데."
"허억! 설마 무슨 보답이라도 원하시는 겝니까? 그렇다면 밥? 아니면 반찬? 아니면 나?!"
일본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하면서 서라는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윽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예나였다. 민국이 짐짓 걱정스런 눈길로 물었다.
"괜찮아 예나야?"
"으응… 고마워 민국아."
뭐가 고맙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괜찮다고 하니 민국도 안도했다. 예나는 목을 부여잡고 아직도 꿈틀꿈틀 기어오를 듯한 느낌에 속을 진정시켰다. 처음 맛보는 것이기도 했고 생전처음 느껴보는 희미한 감각이었기 때문에 예나도 여러모로 고생했다.
'그래도 일단 오늘은 안심인가.'
민국은 그리 생각하고 다음 타자인 서라를 보았다. 서라가 '어멋'하고 자신의 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말했다.
"서방님… 이러시면 안 되와요."
"…누가 네 서방이야?"
"어, 바람피는 남편 둔 아내다."
서라의 말에 은별은 씩씩거렸지만 차마 할 말은 없었다. 확실히 서민국에겐 은근히 바람끼가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이윽고 서라가 물었다.
"그럼 두 언니찡은 이미 드신 거셈여?"
"…그래 먹었어."
"아앗! 변태들 같네여! 어, 어떻게 사내의 그런 것을… 마실 수가 있져? 정말 야하시네여!"
"그럼 넌 안 마실 거야? 죽을 수도 있는데?"
"안 마신다고 얘기한 적은 없습니다만서도!"
은별과 서라의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예나는 바닥에 있는 병을 드르륵 밀어 보여주었다.
"여기… 이거야."
'웁'하고 또 한 번 올라오려는 걸 참는 예나였다. 서라는 투명한 병에 담긴 묘한 액체의 현상을 보고는 '호옹이'하면서 입을 열었다.
"누래끼리한 게 마치 십년은 묵은 느낌이네요."
"서라야 그런 야한 말은 쓰면 안 돼."
"어멋, 이게 말로만 듣던 이미지 메이킹?"
예나가 옆에 있다고 쓸데없이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모습에 서라가 한 마디했다. 그러자 민국이 잠깐 귀를 대보라면서 손짓했다. 서라가 '아잉, 귀에 바람 불려하는 거져? 변태~.'하면서 귀를 갖다댔다. 민국이 그녀에게만 들리는 소리로 일갈했다.
"닥쳐."
"오키도키."
그리고 서라가 대뜸 병을 두 손으로 들어서 안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래도 아직 양이 남아 있었고, 비록 적었지만 한 방울이면 되기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냄새를 맡던 서라가 곧 병을 내려놓더니 코를 막고 말했다.
"이거 똥임?"
"아니야 인마."
"하지만 형. 여기서 형 똥냄새 나는데."
예나만 없었으면 해드락이라도 걸어버렸을 민국이었다. 이윽고 서라를 향해 얌전히 얘기하는 민국이었다.
"그래도 마셔야지. 어쩔 수 없잖아?"
"으으, 부들부들. 제 처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네여."
그리고 양손으로 병을 짚는 서라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내용물을 내려다보는 서라. 하지만 돌이켜보니 이 상황이 은근히 부끄럽고 민망한 상황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아는 남자의 것인, 그것도 서민국의 것을 한 방울 마셔야 한다니.
"아앗! 그, 그렇게 쳐다보지 마셈여! 부끄부끄!"
"……."
민망함으로 말미암아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목소리라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예나가 고개를 돌렸고 은별도 마찬가지로 돌렸다. 서라는 모르겠지만 사실 저 액체가 어떤 식으로 활성화가 되어 생성되었는지 두 여자는 알고 있었다. 차라리 모르고 있는 서라 딴에서 훨씬 안심이겠지? 라고 그녀들은 내심 생각했다.
"형은 왜 쳐다보셈여? 빨리 눈을 리신처럼 가려주세여!"
"흐음, 알겠다."
그리고는 마찬가지로 몸을 돌리는 민국이었다. 서라는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아무리 변태 컨셉에 막무가내의 모습까지 깃들어 있는 서라라지만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보자고 마음을 먹으면서 병에다가 얼굴을 갖다대려는 찰나였다. 서라는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는 자신의 몸을 느꼈다.
'부, 부끄럽다능!'
역시나 서라도 여자는 여자였다. 그 증거로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붉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찔끔 눈을 감던 서라가 병으로 입술을 갖다댔다. 그리고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병에 있는 액체를….
"으으으으음!"
"……."
"음음음음음! 음음음음!"
"……?"
서라에게서 돌아서 있던 세 사람이었다. 돌연 서라가 있는 쪽에서 들려오는 괴음. 아니, 그것은 마치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듯한 신호소리였다.
"푸학!"
털썩! 돌연 쓰러지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은별과 예나가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엔 민국도였다. 서라는 마치 해머에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마냥 눈을 팽글팽글 돌리면서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병안에 있던 액체는 여전히 그대로 유지되어 바닥에 내려놓아져 있었으며, 서라는 차마 그것을 마실 용기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체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어난 것인지 결국엔 기절해버린 것이었다.
"…바보."
은별이 짧막하게 한 마디하고는 서라의 옆에 있는 병을 병뚜껑으로 닫았다. 예나가 서라 근처로 다가가서 기절해 있는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눕게 해주었다. 확실히 이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편에 속하는 서라였다. 아무리 천방지축스럽게 행동한다 한들 결국엔 사랑 받는 막내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흐, 흠냐… 부카게는 싫어염…."
잠결에 중얼거리는 서라의 잠꼬대였다. 은별은 그 소리에 저도 모르게 '풋'하고 웃었고, 그 웃음 소리를 들은 예나가 은별을 쳐다보았다. 은별은 예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정색했다.
"……."
예나는 방금 전 은별과 민국이 했던 행위가 다시금 떠올랐다. 비록 민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사람과 사람이 사랑을 할 때 나누는 결실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실사의 충격은 컸다고 할까…. 그래서 액체를 입에 담는다는 것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다.
오늘은 어거지로 어쩌다 보니 삼킨 것이었지만 내일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똑똑. 그런데 그 찰나였다. 또다시 현관문을 노크하는 노크음이 들려왔다.
'이번엔 또 누구지?'
의문을 표하는 은별이었다. 하지만 이제 남은 사람은 단연 한 명뿐이었다. 민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역시나 보인 것은….
"어이쿠, 우람하도다."
"……."
"아, 하늘을 보고 말한 겁니다. 어서 오세요 유이 씨."
민국은 예나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게 드립을 치면서 유이에게 인사했다. 유이는 꾸벅 고개를 작게 끄덕여 인사했다. 우람한 가슴을 가지고 있는 그녀. 비록 오늘은 가리려고 노력했지만 역시나 현관 안으로 들어올 때 출렁이는 그것은 도무지 가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출렁 출렁.
"……."
"……."
안에서 서라를 재우고 있던 두 여자 역시도 첫인상으로 유이의 얼굴이 아닌 가슴부터 시선이 갔다. 그 시선을 전부 읽은 유이였지만 차마 할 말이 없었기에 그녀는 가만히 있었다.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었는데 알아서 오셨네요."
"집 위치 아니까……."
조곤거리는 소리는 너무나도 작았지만 그래도 들을 수는 있는 정도였다. 참고로 유이가 민국의 집에 들려본 건 전에 흑마법사 때가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민국의 집에 정식으로 초청받은 적도 없고, 초청받는들 가고 싶단 맘도 가진 적이 없었으니까 말이었다. 애초에 유이는 아직까지도 민국을 야수의 변태로 보고 있었으니.
"…어서 오세요 유이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은별과 예나가 인사를 하자 유이도 꾸벅 인사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서라에게로 향했다. 서라는 여전히 기절한 상태로 '으어어어'하면서 요상한 괴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유이가 의문이 서린 눈길로 민국을 쳐다보자, 민국이 그녀에게만 들리는 소리로 설명했다.
"쟤 원래 저러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
그리하여 유이까지 입성. 흑마법사의 부활 보답으로 필요 조건을 갖게 된 네 여자가 모두 민국의 집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예나의 허벅지에 대고 있는 기절한 서라.
민국의 옆에 있는 은별. 새로운 손님처럼 앉아있는 유이. 이윽고 유이의 고개가 조금씩 주변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변 사물을 보기 위함이 아닌, 필요 조건에 필요한 물건으로 보이는 것으로 돌아갔다.
"……."
일단 서라의 옆에 놓여 있는 병. 그리고 그곳에 담겨 있는 액체. 다음으로 기절한 서라. 그리고 이외 자신과 똑같은 처지인 두 여자. 이내 그 시선의 의미를 읽은 은별이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치듯 흔들면서 말했다.
"저랑 예나 씨는 이미 먹었어요. …서라는 기절한 거예요."
"……."
유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내성적이라서 말 하나 어줍짢게 못하는 그녀라지만 돌아가는 상황 판도로 볼 때 곧잘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유이의 시선이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으헤헤헤헤.'
"……."
굳이 노골적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유이는 민국의 속마음의 음탕함을 눈여겨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어찌나 매너 있게 포장하던지 민국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좀 그렇겠지만 살기 위해서는 드셔야 합니다. 유이 씨."
그러면서 병 쪽을 가리키는 민국. 이윽고 유이가 그 병을 한 손으로 잡아 드르륵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스푼을 쥐더니… 모두가 집중해서 쳐다보는 그 가운데에서 유이는 천천히 한 방울 떠서 입에 담기 시작했다. 척.
"……."
"……."
"……."
아주 손쉽게 떠서 마시는 그녀의 모습에 은별과 예나도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도무지 말도 쉽게 못하는 내성적인 그녀처럼 보이진 않았다. 역시 내성적인 면답게 극단적으로 저돌적인 면도 갖춘 것이라. 꿀꺽…. 이윽고 유이가 스푼에 담긴 한 방울을 통째로 삼킨 뒤였다.
"……!"
투다다다다다다닥! 언제 가만히 있었냐는 듯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더니 민국에게 냅다 발차기를 날리는 유이였다.
"크어어어억! 어, 어째서!"
"……."
"……."
"……!"
투다다다다다닥! 이상한 맛에 계속해서 민국을 때려부술 듯이 공격하는 유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