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왜? 아직도 성인애니에서 본 것 중에 따라하고 싶은 거 남았어요?"
"아닛! 설마 내 다른 로망 판타지도 이루게 해줄 생각이란 말인가? 은별이 너도 참 매사에 튕기면서도 할 때는 하는 참한 아이…."
"바이 바이."
"너구리라면 신라면 해물탕면 짜파게티! 여친님이 원하는 라면 그 모든 것이 내 집안에 있소만 그래도 가실 생각입니까!"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현관문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반쯤 고개 돌려 민국을 보았다.
민국은 한 번만 용서해달라는 듯 비굴하게 웃음 지었다. 은별은 '하아….'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막장스러운 면모가 다소 존재한다지만 결국에는 은별의 남자친구였다. 이런 면모도 있는 반면, 의외로 진실되고 성실한 면모도 있었고 말이다.
지난 번 마음의 소리 사건을 통해 은별은 그 사실을 곧잘 알고 있었다.
"라면은 누가 끓일 건데?"
"당연히 은별이 네가…."
"갈래."
"오늘은 내가 끓여주도록 하지! 기다려라!"
후다닥 부엌으로 향하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거실 바닥으로 돌아와 앉았다. 아까 전 잔뜩 삼킨 정액들 때문에 목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진득진득한 것들이 뚝뚝 위장으로 떨어지는 느낌. 결코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지만 은별은 여전히 어딘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진정해 강은별. 어디까지나 라면만 먹고 집에 가는 거야.'
어차피 오늘 일도 마쳤겠다, 이제 민국과 잠깐 알콩달콩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오늘 은별의 목표였다.
'…….'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불안한 점이 있다면, 오늘 은별을 제외한 예나, 서라, 유이가 한 번씩 민국의 집에 들릴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흑마법사를 통해 그들도 등가교환의 시스템으로 필요 조건을 요구하는 몸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은별과 마찬가지로 민국의 정액…을 필요로 요구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겠지…?'
은별은 그리 생각하면서 안도하려고 했다. 나름대로 진실성과 일편단심을 갖고 노력하려는 민국이었다. 그런 그가 설마 그런 야시시한 조건이 붙었다고 해서 은별이에게 시키던 걸 다른 여자에게도 시킬까? 역시 그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서민국."
"왜 부르시오 낭자."
민국은 부엌에서 가스레인지를 키고 냄비에 라면을 담고 있었다. 은별이 은근슬쩍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너… 그… 나 말고 있잖아."
"어."
"그… 나 말고 또 해줘야 할 사람…."
민국이 고개를 돌려 은별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예나 씨나 유이 씨… 그리고 서라 말이야."
"아."
민국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별이가 얼핏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냄비의 물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라면을 보면서 민국은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설마 나처럼… 뭐 그러는 건 아니지?"
"훗."
"……."
이윽고 라면을 끓인 민국이 상에다가 그것을 놓았다. 2인분이었으나 순식간에 끓이는 민국의 라면을 볼 때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윽고 노련하게 상을 들고 거실 바닥에 도착한 민국이 그것을 은별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은별아."
"……."
"나는 네 몸을 xx하고 xx해서 xx하게 한 다음에 xx로 더 해줘! 소리를 나게 하는 게 목표지. 아직 다른 애들에겐 그런 생각이 없어."
"…변태 새끼."
젓가락을 짚는 은별이었다. 하지만 그런 음란한 말은 들었어도, 그래도 어느 정도 안심은 되었다. 자기가 할 말은 필히 지키는 민국이었으니까 말이다.
"읍…."
이윽고 은별이 라면을 먹다가 잠시 멈추었다.
"…물 좀 가지고 올게."
상에 물잔이 비어 있단 사실을 깨달은 은별이 부엌으로 가서 곧장 정수기에서 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꿀꺽 꿀꺽 삼켜서 그제야 목이 개운해지는 걸 느끼는 은별이었다. 역시 아까 전 받아 먹은 하얀 액체들이 어지간히 은별의 목과 코를 힘들게 만들었다.
"여기 물."
"착하네 우리 은별이."
"그런 식으로 느끼하게 부르지 말아줄래? 그리고 다음 번에도 그런 식으로 제멋대로 행동했다간 진짜 맞아 죽을 줄 알아?"
사납게 일갈하는 은별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식으로'란 필시 아까 전 행위에서 민국이 보였던 거침없는 언동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민국은 맞은편에 다시금 앉아 라면을 먹으려는 은별을 보았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은별이 먹다 말고 못 마땅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음, 아니야. 설마 은별이 네가 그렇게 적극적인 여자일 줄은 몰랐어서 말이지. 설마 네 입에서 '다음 번'이란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단 뜻이야. 그렇군, 다음에는 콘돔을 미리 준비해둬야겠군."
"…노답이다 너."
후루룩 라면을 먹는 은별이었다. 근데 돌연 '콘돔'하니까 떠오르는 한 가지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음?"
"너 전에 내 안에… 했었지?"
바캉스 때, 마음의 소리 사건으로 말미암아 둘이 처음으로 합체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민국은 동정답게 조루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그만 방심하는 찰나에 은별이의 안에 사정했었다. 은별은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돌연 가랑이 사이가 침침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지."
민국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확인 안 해봤지만 임신하면 어쩌려고 그래? …단 한 번으로도 임신할 수 있는 게 여자 몸인데."
"이럴 수가. 이게 말로만 듣던 임신공격인가?"
"…장난하지 말고."
"뭐, 책임져야지."
은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국은 너무나도 쉽게 그 말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전부터 미리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진짜?"
"아니, 은별아. 잘 생각해봐. 네가 비록 빈유라지만 그 마이너스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는 플러스 요소가 즐비한 공식 츤데레 캐릭터야. 말로는 탱탱볼처럼 탱탱거려도 결국에는 날 위해서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여'자지'. 그런 너를 뭣 하러 내가 버리겠어? 안 그래?"
"…하지만 아이를 밴 여자를 책임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훗. 뭘 모르는군. 내 꿈은 축구선수 그룹을 만들 정도로 아이를 낳는 것이다."
보통 때라면 그 말에 태클을 걸었겠지만, 은별은 라면을 마냥 흡수하고 있는 민국을 빤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라면을 다시 먹기 시작하는 은별이었다.
"……."
표현은 안했지만 저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 오른 은별이었다. 그 미소를 애써 감추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처음 알았다. 은별은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까지 했다.
'어쩌면… 내가 남자를 잘 본 걸지도 몰라….'
탱탱볼 같지만 현모양처의 개념이 즐비한 은별이었다. 당연히 와이프가 된다면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이고 올곧게 행동할 것이었다. 남자 입장에서는 좋은 여자라 볼 수 있었다. …자꾸만 웃으려 하는 입가를 억제하며 은별은 라면을 먹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똑똑똑.
"……."
"……."
어디선가 들려온 노크 소리. 민국과 은별의 고개가 곧장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현관문의 잘 보이지 않는 유리 너머로는 긴 머리의 여인의 잔상이 보이고 있었다.
'한예나?'
직관력이 높은 은별이답게 유리 너머의 잔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누군지 짐작하는 은별이었다. 그러나 민국도 그 인상이 꽤나 익숙한지 곧장 알아채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은별의 고개가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평소 은별이와 예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아는 민국 딴에선 지금 찾아온 게 조금 난감했다.
"누구세요?"
"나야… 민국아."
예상은 적중했다. 예나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민국은 다시금 고개 돌려 은별의 눈치를 보았다. 은별은 일단 심기에 조금 거슬렸지만, 차마 예나를 밖에 두고 있을 수는 없어서 민국에게 말했다.
"뭐해? 어서 안 열어주고."
"어, 흠흠. 그래야지."
이윽고 민국이 태연한 척하며 현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자 마침내 오붓한 숙녀 차림의 예나가 보였다. 예나는 지난 날의 사건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 민국아…."
"어, 그래. 오랜만이야 예나야."
오랜만이라 해봤자 고작 삼일 만에 만나는 것이었지만 둘 사이는 여전히 어색했다. 그 어색한 기류를 읽은 은별이었고 역시나 둘에게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했지만 아무런 말도 않았다.
"아…."
이윽고 인사하던 예나의 시선이 거실에 앉아있는 은별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네."
예나의 꾸벅거리는 인사에 은별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을 가지고 다투었던 두 여자. 당연지사 은별의 입장에서나 예나의 입장에서나 서로에게 좋을 건 없었다. 하지만 은별은 그럼에도 예나의 인사를 곧잘 받아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번에 바다속에 빠졌을 때 그래도 그런 자신을 구해주었던 예나였기 때문이었다.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니란 걸 알았으니까….'
라면이 조금 남았지만 젓가락을 내려놓는 은별이었다. 민국이 짐짓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예나를 거실로 인도했다.
"일단 들어와 예나야."
"응…."
"아, 거실 걸레로 청소해서 좀 미끄럽거든. 조심하고."
"응 고마워."
"……."
상냥하기 그지 없는 민국의 모습. 비록 예전에 혐오스러운 딸딸이를 보여준 민국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국의 본질을 예나는 전부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을 감안할 때 예나는 현재 민국의 모습에 큰 이질감을 느낄 수가 없을 터였다. 지켜보는 은별 입장에서는 달랐지만 말이다. 은별은 예나를 보며 존댓말로 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오기 전에 빵 조금 먹었어요. 그리고 여기 빵도…."
봉투에 들어 있는 빵들을 보여주는 예나였다. 아무래도 민국이 먹으라고 가져온 모양이었다. 민국이 그것을 들면서 말했다.
"나 주려고 가져온 거야? 이럴 필요 없는데, 고마워."
"아니야… 그래도 이런 건 해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니까…."
"……."
둘 사이에 느껴지는 어색한 기류. 더불어 그 어색한 기류에는 묘한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은별은 잠시 일어나더니 항상 챙겨 다니는 칫솔을 들고 화장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잠시 입 좀 닦고 올게."
역시 아까 전 마셨던 그 정액이 어지간히 거슬렸던 것이다. 텁텁한 입안을 깨끗히 만들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는데 민국이 사뭇 배려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은별아. 잘 닦고 나와."
"……."
화장실로 들어간 사이에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눌지 사뭇 궁금했지만, 은별은 일단 이부터 닦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끼이익 쿵하고 들어가서는, 입을 닦는 은별이었다. 이로써 거실에 남은 두 사람.
"……."
"……."
예나와 민국. 예나는 당연지사 둘만 남은 이 자리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바캉스에서 있던 그 사건이 자꾸만 뇌리에 각인되어 민국과의 대화를 방해하게 만들었다. 민국이 말했다.
"자…리에 앉을래?"
"으응…."
상을 치우고 거실 바닥을 가리키는 민국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앉는 예나였다. 무릎을 꿇듯 다소곳이 앉는 그 모습은 예의 바른 여자라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민국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하다가 말했다.
"미안. 그때 많이 놀랐지?"
"아, 아니야."
"흑마법사라는 것도 처음 봤을 테고… 무엇보다 그런 큰 사고가 있었으니까."
흑마법사. 네 여자를 부활시켜준 사람. 그리고 민국의 무언가를 받아야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준 여성이었다. 당연히 예나 딴에선 늘 현실적인 것만 보아오다가 비현실적인 것을 마주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판단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었다.
"아니야…. 그래도 덕분에 살 수 있었고 무엇보다 가족들도 다시 만났으니까……."
민국에게 차였을 때 정말이지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죽을 때는 가족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예나였다. 그녀 딴에서는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준 흑마법사의 배려와 배품이 정말이지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비록 이런 몸뚱아리가 됐다 한들 그래도 다른 여성들보다 좋은 점도 있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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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 보내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