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예나의 역습>
또각 또각.
예나는 하얀 골목길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다소곳이 두 손을 모아 짐을 들고 고개를 내린 그녀는 현재 학교를 마치고 과자 몇 봉투를 사들어 봉지에 담고 가는 상태였다. 그녀가 사랑하는 친 동생에게 줄 선물이었다.
“…….”
예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잡념에 휩싸인 얼굴로 길을 걸어갔다. 무신경해보인단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생각만은 뒤죽박죽 꼬여 있는 전선들처럼 정신사나웠다.
‘흑마법사….’
삼일 전, 바캉스를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취침 중이던 여자 네 명 전원이 절벽으로 굴러 떨어져 크게 다치거나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 중에 한 명이 예나였다.
‘난 분명 죽었었지?’
예나는 자문을 곁들었다. 분명 죽었었다. 죽음의 현장이었기 때문에 아주 생생하고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그때 그녀는 민국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이 전할 말을 전하고 아쉬움 없이 떠나려고 했었다.
“…….”
하지만 흑마법사가 그런 그녀의 최후를 방해했다.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도와주었다. 현대 의학으로나 사실적으로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신체 부활술을 해서 말이었다. 흑마법사 딴에서는 등가교환의 조건만 있으면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다는 게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 등가교환 조건은….’
그 등가교환의 조건을 생각하던 예나였다. 돌연 민국이 자신에게 못 볼 꼴을 보이던 그 찰나가 떠올랐다. 돌연 떠오른 광경에 예나는 얼굴이 그만 확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말았다. 그만 봉지를 떨어뜨리고 걸음을 멈추며 움찔 두 손을 두 뺨에 갖다 댔다.
‘어, 어쩜 좋아! 자꾸만 떠올라서 큰일이네….’
그의 적나라한 성기까지 고스란히 드리울 정도였다. 또한 예나는 그의 청춘이 담긴 씨앗까지 얼굴에 듬뿍 씌우고 말았지.
‘민국이의 그런 모습도 사실은 처음 보고…. 근데 민국이도 그그그그… 그런 짓을 하는 구나.’
예나 입장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늘 자기 앞에서는 예의 바르고 올곧게 행동하던 서민국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어떡하지…?’
예나는 정말 고민이었다. 흑마법사가 언급했던 등가교환의 조건, 그리고 민국이가 부활한 네 사람을 돌보지 않고 안방에서 그 짓을 하고 있던 이유. 그 모든 것에는 연관성이 있었다.
바로 살아난 네 여자가 생명 유지 보장을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민국의 정액을 마셔야 한다는 것! …그것도 아주 신선하고 생생한 그 날의 정액을 한 방울 마셔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 걸 마시면… 민국이가 이상하게 쳐다보지는 않을까?’
입술에 손을 갖다대고 잠시 고민하는 표정의 예나였다. 일단 예나는 요 이틀간 정액을 마시지 않았다.
흑마법사가 예나와 민국이 그만한 사이란 걸 알고는 어느 정도 보조 마법(?)을 쳐준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일로서 끝이다. 오늘 안으로 민국의 생생한 허연 액체를 한 방울 입에 담아야만 그녀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
그리고 오늘은 집에 들렸다가 민국의 집으로 들릴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예나는 그것 외에도 한 가지 또 거슬리는 게 있었다.
‘미안해.’
‘…….’
그건 바로 은별이의 이벤트가 있었던 그 날, 비가 폭우처럼 내리는 그 무대 위에서 민국이가 했던 사과였다. 그건 사실상 예나와 더 이상 이성 관계로서 사이를 유지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나는 그 고백에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래도 끊을 때는 끊을 줄 아는 게 역시 자신이 아는 민국이답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당연지사 두 사람의 인연은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게 정상이었다. 아니, 원래 끊어졌어야 하는데… 그런 사고와 동시에 이번 흑마법이 두 사람의 사이를 얽히게 만든 것이다.
‘내가… 다시 잘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일종의 기회로 다가올지, 아니면 또 다른 감정 악화 및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될 지는 예나와 민국이 결정할 일이었다.
“아?”
이윽고 자리에 멈춰 선 채로 가만히 서 있던 자신을 깨달은 예나였다. 맞은편에서 지나오던 사람들이 흘긋 흘긋 쳐다보고 가는 모습에 예나는 조심히 바닥의 봉투를 들었다. 이윽고 그것을 들고 집으로 향하는 예나였다.
“다녀왔어요 엄마.”
“예나 왔니? 어서 오렴.”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인 예나였다. 예나는 평범한 빌라에서 살고 있었다. 친동생 한 명,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었다. 이윽고 거실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있던 엄마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로 발을 들이는 예나였다.
“그 봉투는 뭐니?”
“예슬이 먹으라고 사온 과자예요. 엄마도 심심하면 좀 드실래요?”
예나의 물음에 엄마가 웃음 지으며 말했다.
“난 괜찮으니 예슬이나 갔다 주렴.”
“네. 예슬아.”
이윽고 예슬이가 있는 방으로 향하는 예나였다. 언니의 부름을 들었는지 곧장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타나는 예슬이였다.
“언니!”
“으응. 맛있는 과자 사왔어요.”
곱게 머리를 양갈래로 딴 여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예나에게로 다가와 다리를 껴안았다. 예나는 그런 귀여운 모습에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즐겁게 웃고 있던 예슬이는 예나가 보여준 과자 선물에 ‘우와아!’하면서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으응. 어지르지 말고 잘 먹어야 해요.”
“네!”
예슬이의 응답이었다. 보통 자매 사이라면 반말을 사용하겠지만 예나와 예슬이는 상당히 달랐다.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사실 예슬이에게 그런 버릇을 들인 건 예나였다.
반말을 사용하게 되면 나중에 갈등이 생겼을 때 자칫 욕설이 나올 경우가 존재했다. 예나는 같은 여자로서 그런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존댓말로 사람을 대하고 존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그것은 예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맞벌이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도 있었다. 예슬이는 거의 예나의 밑에서 키워져 왔으니까. 이윽고 투다다닥 봉투를 사들고 자기 방으로 향하는 예슬의 뒷모습을 보며 예나는 미소 지었다.
‘만일 내가 삼일 전에 살아나지 않았더라면….’
예나는 돌연 그 날의 기억이 떠오름과 동시에 가족을 보게 되자 울컥하는 감정이 생기게 되었다. 만일 그 기적적인 일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예나의 가족들은 예나의 장례식을 치르며 울상을 짓고 있었을 것이었다.
예나는 바캉스 날의 사건 때문에 죽을 만큼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한 편으론 생각했다.
‘…….’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제… 가야할 지도…?’
드디어 대망의 때가 다가왔다. 요 이틀 동안은 흑마법사의 배려로 어떻게든 버텼지만, 이제부턴 절대 무리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국의 정액을….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면서 창피해하는 예나였다. 이윽고 예나 엄마가 부엌에서 음식을 하다가 그녀를 불렀다.
“예나야. 거기서 뭐해?”
“아, 아녜요…! 엄마 저 잠시… 그 좀 나갔다 올게요!”
그리고 후다닥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 예나였다. 어지간히 창피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었다.
* *
“나 왔어.”
민국의 집에 발을 들이는 은별이었다. 그녀는 두 손에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냉장고가 초라한 민국의 모습에 맘이 가서 사들고 온 반찬거리였다. 안방의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던 민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별을 맞이했다.
“오, 내 여친이여. 기어코 사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반찬거리까지 사왔구나. 혹시 여친이 아닌 와이프가 되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텅빈 냉장고 안이 불쌍해서 뭔가를 가득가득 채우고 싶은 마음에 온 거니까 오해마세요 서방님.”
이젠 쉽게 맞받아치는 은별이었다. 그녀는 곧장 냉장고 쪽으로 향해서 음식들을 넣기 시작했다. 민국은 그런 은별을 보다 말했다.
“얼마 들었어? 사온 돈은 내가 줄게.”
“됐으니까 잘 좀 먹기나 해. 만날 게임만 하지 말고.”
“이것은 성스러운 딸 운동으로 빠진 몸인데 어떻게 먹는 것을 가지고 변명할 수 있겠소!”
“웃기는 소리하시네! 이틀 동안 할 필요도 없어놓고 무슨 핑계 같은 소리야?”
여기서 ‘필요’가 의미하는 것이란, 민국의 자위운동으로 뿜어진 정액이었다. 사실 은별이 역시 예나와 마찬가지로 흑마법사의 배려를 받아 이틀간 정액을 마시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다른 인물도 마찬가지였다. 예나 한 명만 해주면 은근한 차별이 되는 것인지라, 나머지 서라와 유이 역시도 요 이틀간 정액을 마시지 않았다.
물론 오늘 밤 안으로 다들 마셔야 내일 생명 보장이 될 테지만.
“엇흠, 생명의 은인에게 너무 쌀쌀한 거 아닌가?”
“생명의 은인은 얼어 죽을… 날 살려준 건 흑마법사거든?”
“흑마법사가 나의 팬이었기 때문에 널 살려준 것이다!”
“에휴… 그래, 고마워요. 어찌 됐든 네가 살려준 것도 맞으니까.”
비어 있던 냉장고 안에 반찬거리가 수북히 쌓였다. 무려 3만원어치였다. 거의 아내처럼 뒷바라지를 해주는 은별. 이마에서 싱글싱글 땀이 나자 그것을 스윽 닦는 모습이었다. 민국이 다시 한 번 제안했다.
“저거 돈은 내가 줄게.”
“됐다니까? 식사나 잘해.”
그리고 냉장고 문을 닫고 일어나는 은별. 화장실로 가서 수도꼭지의 물을 틀어 손을 씻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그 근처로 다가가서 말했다.
“너 설마!”
“…또 왜? 무슨 개 짖는 소리하려고?”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여자가 진짜로 남자를 좋아하면 그 남자가 돈 쓰는 걸 최대한 막는다고. 설마 너 그 정도로 날 사랑하는 거냐?”
“…….”
“역시 나란 남자. 죄 많은 남자.”
물로 씻은 손의 물기를 민국의 얼굴에 털어버리는 은별이었다. 그리고 수건으로 손을 닦고 그를 비켜지나가 안방으로 향한다. 민국은 그런 은별의 츤데레스러운 언동에 피식 웃음 지으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대뜸 그녀의 어깨에 한 쪽 팔을 거친다. 이제는 아주 스킨쉽이 자연스러운 커플이었다.
“내가 너무 맞는 말을 했소 낭자?”
“…저리 꺼져. 팔 무겁거든?”
“난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좋소만.”
“…….”
은별은 한숨만 쉬었다. 그리고 어깨에 둘러 있는 그의 팔을 내리고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건 어디 있어?”
“뭐가?”
“그거 말이야. …오늘 필요한 거.”
민국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땠다.
“난 순진해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꾸 개 짖는 소리할래? 빨리 내놔!”
은별이 손을 내밀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민국은 그제야 ‘음.’하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직 안 했는데.”
“…뭐?”
“아니 나 아침부터 방송했어 이 여자야. 딸칠 시간이 있을 리가 없잖아.”
“따, 딸은 그래도 쳐뒀어야지 이 바보야!”
얼굴을 붉히면서 소리치는 은별이었다. 여러모로 두 사람 간의 얘기가 뭔가 묘하게 이상했다. 입장이 이상하다고 할까. 무슨 이상한 약을 먹었다고 할까. 하지만 결코 그런 건 아니었다. 민국이 두 손을 허리에 얹으면서 말했다.
“크흠흠, 내 정액을 그렇게 마시고 싶었소? 은별 낭자?”
“…확 붙잡아서 터트려버린다?”
“으어억.”
듣기만 해도 끔찍한 소리였다. 소름이 끼쳐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가랑이 사이를 가리던 민국이었다. 곧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말을 이었다.
“야 은별아. 근데 우리 벌써 사귄 지 365일은 지났어.”
“세 달 지났거든 멍청아?”
“하지만 너와 내가 마음을 공유한 시간은 그보다 더 많지! 심지어 우린 몸까지 한 번 섞었고! 그렇다면 너와 내가 의기투합하여 정액을 뿜어내는 건 어떨까?!”
은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 관계를 맺고 싶다는 뜻이지?”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