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작가 후기.
시즌 1 바캉스 메인 에피소드 마지막 편입니다.
다음 편이 시즌 1의 에필로그구요.
만일 지금 이 편을 보신 다음에 '아! 너무 암울해!'하고 선삭을 하시려는 분!
다음 에필로그까지 확인한 후 결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개그 코메디 일상물'이기 때문입니다.
에필로그는 오늘 밤 12시에 올라옵니다.
ps.이거 다음 화 예상하면 독자님 천재ps2.또한 가장 추천 적게 받는 편이 되겠네요.
*
긴 밤, 예나는 어둠 속에서 해매는 꿈을 꾸었다. 칠흑 속에 갇혀 있던 그녀는 두 눈이 있음에도 주변을 볼 수 없었고, 두려움에 양손을 뻗어 휘젓기 시작했다. 그녀는 처절했다. 이것이 꿈이란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음에도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민국아….'
그렇게 해매이던 끝에 예나는 누군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자신이 그토록 짝사랑하던 인물이었다.
소꿉친구 시절부터 늘 단짝으로 함께 해왔으며, 서서히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되었던 그녀. 칠흑 속의 어딘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민국을 보면서 예나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부름을 들은 것일까. 잠시 움찔거리던 민국은 곧 고개를 돌려 따뜻한 미소와 함께 예나를 바라봐주었다.
예나는 그 미소에 저도 모르게 똑같이 미소 짓고 말았다. 그리고 허겁지겁 달려가서 민국의 손을 붙잡으려고 들었다.
'아….'
하지만 안 된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예나는 더 이상 민국을 붙잡아선 안 됨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왜냐하면 이미 민국에겐 자신보다 더욱 소중한 여자가 있었으니까….
'왜 내가 아니라 하필 그 애인데?'
늘 보듬어주고 아플 때 도와주었던 건 바로 자기 자신인데! 왜 하필 은별이라는 여자와 어울리고 사귀게 되었단 말인가? 참을 수 없는 질투와 함께 모든 걸 부셔버리고 싶었다. 결국 내뻗던 손을 머뭇거리며 회수하려던 찰나, 의외로 민국의 손이 먼저 달려들었다.
'……!'
예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먼저 손을 뻗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가, 자신에게 먼저 손을 뻗는 모습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예나가 눈물을 참는 얼굴로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미소 지으며 행복하게 쳐다보는 예나를 향해, 민국은 가만히 서 있다가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는 돌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같이 갈래?'
'…….'
'못 돌아올 지도 몰라.'
민국의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본래 여자란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면 어떤 곳이든 함께 따라가려고 했다.
현실을 보고 미래를 만든다기 보단, 미래에 다가가 현실을 만드는 타입에 가까웠다. 이윽고 예나가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 끄덕거림에 민국은 얼마지 않아 피어 올랐던 미소를 더욱 활짝 지었다. 그리고 민국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는 순간, 갑자기 어디론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
끝도 없는 암흑의 공간이었다.
"아."
그렇게 예나는 잠에서 깨었다. 밤 일찍 누구보다 먼저 잠든 그녀는 역시나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안방에 누워 있는 서라, 유이, 은별의 모습이 눈에 드리웠다. 쏴아아아.
"비가… 오네."
베란다 창문으로는 밤에 그쳤던 빗줄기가 또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예나는 이부자리에 막연히 앉아 그것을 잠시 동안 구경했다.
이윽고 바캉스 일행 전원 일어나서 차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숙박소에는 불과 이틀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상당히 정이 든 느낌이었다. 이윽고 서라가 아쉬움을 토로하듯 트렁크 근처에서 외쳤다.
"으으! 아쉽다능! 좀 더 유이언니찡의 슴가를 몰캉몰캉 구경하고 싶었는뎅!"
"……."
서라의 섹드립을 이젠 그냥 담담히 무시하는 유이였다. 어쩜 유이가 그들과 함께 하면서 배우게 된 건 섹드립을 쉽게 무찌를 수 있는 강철 멘탈일 지도 몰랐다.
"짐은 다 챙겼어?"
"흐음, 뭔가 부족한 거 같은데."
"서라야. 너는?"
은별의 물음에 손을 들며 소리치는 서라였다.
"은별 언니 가슴빼고 다 챙겼어여!"
"…네가 비오는 날 아침부터 몰매맞고 싶구나?"
"아잉~."
앙탈을 부리는 서라와 그런 그녀를 한심하게 쳐다보는 은별. 유이는 짐이 다 정리될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고, 민국은 차에 빠진 게 없나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이윽고 민국이 있는 트렁크 근처로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걸 느꼈다. 민국은 그 손길의 주인을 깨닫고는 잠시간 침묵했다.
"……."
"……."
예나였다. 그녀는 자신의 짐을 넣기 위해 트렁크에 온 것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짐짓 웃음 지으면서 트렁크를 가리켰다.
"자."
"……."
예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짐만 넣을 뿐이었다. 장난을 치던 은별과 서라는 그런 두 사람의 오묘한 분위기에 쳐다만 볼 뿐, 입은 열지 않았다.
"그럼 다 됐지?"
짐을 모두 정리한 민국이 네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다행히 네 명 모두 잊어버린 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갈까."
이제 이틀간의 바캉스 여행이 끝났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저마다의 생활을 하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요 짧은 시간 동안, 보이지는 않아도 실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민국의 확고해진 생각과 더불어 은별의 마음, 두 여자의 결심.
"……."
유이는 강철남과의 옛일을 많이 회상하게 되었다. 우우웅.
이윽고 시동이 걸린 차의 핸들을 붙잡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민국이었다. 운전석의 옆좌석에는 은별이 안전벨트를 매고 탑승했고, 나머지 세 여인은 뒷좌석에 탑승하였다.
유이는 다소곳이 두 손을 모은 채 앉아서 차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무표정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 똑같았다.
서라는 벌써부터 입이 심심한지 과자 한 봉지를 뜯어 냠 먹고 있었고, 예나는 드시겠냐고 묻는 서라의 물음에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다음 차창만 씁쓸히 쳐다볼 뿐이었다.
"……."
민국은 백미러로 그런 예나를 흘긋 확인했다. 씁쓸한 마음이 들었고, 그걸 표정에서 쉽게 감추지 못했다.
반대로 옆좌석에 있던 은별은 그런 민국의 표정을 읽고는, 마찬가지로 복잡한 심정을 느낄 따름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먼저 그 감정에 대해서 토로하고 사실적으로 말하려고는 안했다. 아마 이대로 끝이 나겠지.
'그래. 이제 다 끝난 거야.'
민국의 생각이었다. …그의 차가 이동하기를 어연 한 시간. 서라는 과자를 먹다가 꿈뻑꿈뻑 졸고 있었고, 유이의 어깨에 슬그머니 자기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유이는 그런 서라의 행동거지를 통감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고 차창만 바라보았다. 예나는 어제 일이 돌연 떠오르는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지만, 애써 참으며 눈을 감고 자기 위해 노력했다.
"……."
은별은 옆좌석에 앉은 만큼 민국이의 심심함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국은 그런 은별의 생각을 읽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나 신경쓰지 말고 졸리면 자도 돼."
"……."
그런 민국의 정성 어린 말에 은별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배려 섞인 따뜻함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려 한다. 하지만 평소에 자신의 심리를 쉽게 티내는 편이 아닌 은별이었다. 그런 것도 워낙 어려워했고 말이다.
'버텨야지….'
그리 생각하면서 안간힘으로 졸음을 참는 은별이었다. 하지만 지루함을 역시 달래기는 어려웠는지 꾸벅꾸벅 고개를 내리던 은별은 기어코 잠에 들고 말았다. 그런 은별을 옆에서 곁눈질하던 민국은 곧 가볍게 웃음 짓고 핸들만 놀릴 따름이었다.
"……."
이로써 네 여자가 전원 잠든 차 안에서 민국은 열심히 차만 운전할 따름이었다. 잡다한 상념들이 몇 번이고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노력했다.
'마음을 모를 리가 없잖아.'
하지만.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남자는 현실을 먼저 본다. 그 현실에서 부득이한 상황이 찾아온다 가정할 때, 결코 모든 걸 다 이룰 수 없음을 직감한다.
아무리 막장스러운 민국이라 할 지라도 그 정도의 현실 감각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포기해야 할 건 포기해야했고, 손에서 놓아야 할 건 놓아야만 했다. 그에게 마법 같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어이쿠, 길이 너무 복잡하네."
민국은 산길 도로를 돌고 있었다. 원형으로 도로가 지어져 있고 아직 비포장 도로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위험했다. 민국은 돌여켜보니 어떻게 자신이 운전면허 몇 개월만에 이런 곳까지 능수능란하게 오갈 수 있었나 생각했다.
'역시 내 뛰어난 실력인가! 훗!'
그런 잘난체도 잠시, 비가 워낙 폭풍처럼 쏟아지다 보니 슬슬 운전도 까다로웠다. 민국은 최대한 신중하게 이동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 뒷좌석에서 드르렁하는 콧소리가 들려왔다.
백미러로 보니 서라가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콧소리까지 내며 자고 있었다. 민국은 '어휴 녀석'하면서 웃음을 짓고는 좌측으로 핸들을 돌리려고 했다.
- 빠아아아앙!
"……."
그리고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화물차 한 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운전수 역시도 빗길에 비포장도로가 워낙 위험하다 생각했는지 주행에 신중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쏟아진 졸음에 한 차례 실수를 해버린 탓일까? 민국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콰앙!
"……!"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강한 충격과 함께 화물차에 들이박힌 민국의 차가 옆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벨트를 매고 있던 은별은 그 굉음에 뒤늦게 눈을 떴다. 하지만 이미 그때는….
{와장창창창!}
{콰앙!}
굉음과 함께 화물차에 부딪혀 절벽으로 떨어지는 민국의 차였다. 그의 차는 덜 완성된 산길을 몇 번이고 굴렀으며, 유리창은 깨질 대로 모조리 깨져버려 엉망진창이었다. 그 와중에 몇 번이고 데굴데굴 구르던 그의 차가 마침내 멈추게 된 것은, 평지에 도착함과 동시에 어느 나무에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웅!
"……."
차에서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민국은 10분이 지나서야 간신히 의식을 차리게 되었다. 그는 어느 덧 깨진 앞차창으로 튕겨나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머리에선 피가 줄줄이 흐르고 있었다.
"어…어억…."
믿기지 않았다. 설마 그런 단 시간에 스스로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쏴아아…. 비는 끊임없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고, 그것은 불길이 치솟으려던 차를 식게 만들어주었다. 이윽고 민국이 한 쪽 팔과 한 쪽 다리가 분지러진 상태로, 엉망진창인 몰골로 주변인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지 않아… 은별과 더불어 나머지 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민국은 일단 은별에게로 엎드리듯 걸어갔다. 은별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눈을 감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죽은 사람의 그것과도 같았다. 이윽고 은별에게로 다가간 그가 대뜸 손으로 만지며 흔들어보기 시작했다.
"은별… 쿨럭!"
각혈을 토하는 민국이었다.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화목한 상태였는데….
"……."
아무리 흔들고, 깨우려고 노력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어디선가 '민국….'하면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국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았다.
"민국…아…."
"……."
그러자 나무 근처에 쓰러져 있는 예나의 모습이 보였다. 민국은 허겁지겁 기어가서 예나에게로 향했다.
"예나야… 쿨럭쿨럭! …괜찮아?"
그래도 그나마 민국이 가장 덜 다친 상태였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나 은별은…. 민국은 설마 하는 심정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자기 손을 느꼈다. 이윽고 그런 손을 뻗는 민국의 모습에, 예나가 흐릿한 시선으로 민국의 손을 붙잡았다.
"민국…."
"예나야… 말하지마. 내가 지금 구급차를… 전화를…."
부러진 다리와 팔을 뒤로하고 어떻게든 구급차에 신호를 보내려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그런 민국을 향해 예나는 재촉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좀 어이없고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운명은 여기서 끝이란 걸 말이었다.
"……."
민국도 이런 상황에서 웃음 짓는 예나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본 모양이었다. 이윽고 예나가 입술을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에라도… 지금에라도 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작은 입술을 몇 번이고 발음하여 내뱉은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부디 자신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를, 예나는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했다.
"……."
그리고 그 입술이 무엇을 전하는지 느낀 민국이었을까. 얼마지 않아 민국은 '아, 안 돼….'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예나를 안으며 소리쳤다.
"안 돼 예나야…."
"……."
"안 돼… 안 돼!"
민국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빗속을 뚫고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