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즐거운 캠프파이어가 끝난 뒤 각자 숙박소로 돌아가 잠을 청할 때가 되었다. 숙박소에서 처음으로 머무는 밤, 새벽까지 줄기차게 뛰놀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랬다간 내일 일찍 일어나서 다음 스케줄대로 진행하는 게 무리일 터였다.
심지어 예나나 은별이 같은 경우는 워낙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 시간이 되면 잠이 올 수밖에 없었다. 은별이 같은 경우는 저녁까지 한숨 자고 난 뒤라 피로가 싹 가신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럼 저기 안방에서 자고 나는 나머지 빈 방에서 잘게.”
“여기 이불이야 민국아.”
예나가 장롱에서 꺼낸 이불 한 겹을 들고 민국에게 다가갔다. 민국은 굳이 가지고 올 필요가 없음에도 몸소 나서서 가져온 예나의 행동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예나야.”
“아니야.”
예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그가 이불을 받는 모습을 막연히 구경하길 한참… 예나는 자꾸만 가슴 속에 맺힌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 걸 느꼈다. 방금 전 캠프파이어 때 보았던 은별과 민국의 모습… 지속해서 어른거린다.
‘잘못 생각하는 거면 좋겠어.’
하지만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나 싶었다. 서라는 ‘초코칩~ 맛있는 초코칩~’하면서 안방에 깔려 있는 이부자리를 밟고 돌아다녔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초코칩이 쥐어 있었는데, 민국의 부카케 현장을 협박하여 얻은 결과물이었다.
“냠냠.”
“내일 먹고 그만 내려놔. 계속 먹으면 이빨 썩는다?”
“어멋! 은별언니찡 지금 제 바들바들한 치아를 걱정해주시는 거예여? 정말 기쁘네염! 보답으로 피카츄 라이츄 불러드릴게여!”
“아까 전에도 불렀잖아? 그만 부르고 빨리 내려놔.”
그냥 강제로 초코칩을 빼앗아 구석진 곳에 내려놓는 은별이었다. 서라는 그런 은별의 예민한 손짓에 ‘히잉~’하면서 말했다.
“하는 수 없져. 그럼 오늘은 초코칩 대신 은별 언니찡을 먹겠어여!”
“음란한 소리 그만하고 누워 이 바보야.”
“부왘! 음란한 게 아니라 잔인한 건데여? 전 인육을 말한 건데여! 조선족이당 이야호!”
시끄럽게 구는 서라를 붙잡고 억지로 앉게 하는 은별이었다. 그리고 너무 방방 뛰며 노는지라 엉망이 된 서라의 머릿결을 아무 말 없이 다듬어주는 은별이었다. 그런 은별의 츤데레스러운 언동에 ‘헤헤’하고 밝게 웃으며 마냥 좋아하는 서라였다. 민국은 그런 은별과 서라를 둘러보다가 유이를 보았다.
“유이 씨 오늘 괜찮으셨나요?”
“…….”
민국의 짐짓 부드러운 물음이었다. 구석진 자리에 이부자리를 깔고 배게를 내려놓던 유이는 민국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민국은 싱긋 웃음 지으며 자신의 변태스러움을 숨기고 있었다. 유이는 그런 민국을 반듯이 쳐다보다가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다행이네요. 내일은 더 재밌게 놀기로 해요.”
완전 매너남이다. 은별은 ‘정말 인간의 탈을 쓴 늑대야 저건….’하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민국이 마찬가지로 은별에게 미소를 보이자, 은별은 ‘핏.’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허나 이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새침한 것이 아닌, 내심 부끄러워서 시선을 피하는 은별이었다.
“…….”
그런 둘의 시선에서 오묘한 감정을 느낀 예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찡! 나 갑자기 목말라여!”
“물이라도 달라고?”
“아님여! 우유 달라는 건데여?”
그리고 은별의 가슴을 가리키는 서라였다. 해맑게 웃으며 가슴을 가리키는 서라의 모습에 은별은 베개를 들어 그대로 서라의 얼굴을 퍽 쳐버렸다. 서라는 졸지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웁!’하고 소리내며 자빠지게 되었다. 이윽고 민국이 서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잘 자라 서라야. 은별이도 잘 자고.”
“…그래.”
“엇 온니짱 벌써 자시게여? 설마 혼자 자시려는 거셈여?”
“당연하지. 남자가 여자들 있는 방에서 잘 수는 없잖아.”
“와… 새삼 느끼는 건데 역시 형은 안에 안 싼다고 한 다음에 쌀 사람이에여.”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뜨끔거리는 은별이었다. 왠지 가랑이 사이가 시려오는 것을 느낀 그녀가 두 다리를 곱게 모았다. 예나는 서라의 말을 잘 이해 못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민국이 다시금 예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내일 보자 예나야.”
“응… 잘자 민국아.”
“그래 너도.”
그리고 민국은 안방을 나오며 문을 닫았다. 홀로 이불을 들고 거실의 어둠 속에 서게 된 민국. 고개를 아래로 내리 숙인 민국은 묘한 아쉬움이 드는 걸 느꼈다.
‘눈앞에 설렁탕이 있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그것이 현재 민국의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지. 오늘은 그만 자고 내일 일어나서 기회를 노리자.’
‘…시끄럽고 빨리 자러 가!’
흑마법사의 약 효능으로 말미암아 민국의 생각을 읽고 있던 은별이 호통쳤다. 머릿속을 울리는 은별의 생각에 민국은 잠시 귀를 틀어막았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내일되면 설렁탕도 식을 텐데 잠이나 자야겠다. 그리고 빈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깔고 드러눕는 민국이었다. …그렇게 오늘 일과를 마치고 잠에 드는 듯싶었다.
‘그래서….’
불현 듯이 들려오는 소리. 민국이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있기를 어연 30분이 경과한 뒤였다.
‘이 약은 언제 끝나는 거야?’
‘그러게. 일정 시간만 효능이 있다고 했는데 나도 잘 모르겠네.’
‘그럼 잠도 못 자고 계속 이러고 있으라고? 생각을 안 읽고 싶어도 읽어지게 되잖아!’
은별이 있는 안방에는 어느새 자고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예나와 서라. 유이는 깨어 있는 기색을 안 보였으나 아직 잠을 못 자는 상태였다. 이윽고 은별이 ‘후우.’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생각으로 옹알거렸다.
‘그나저나… 정말 흑마법사라는 게 있어?’
‘있지. 그 사람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건데.’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어이쿠 나도 모르게 생각이 그만.’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진실. 고스란히 전달되는 생각은 기어코 민국과 흑마법사의 과거까지 드러내게 만들었다.
‘예전에 내가 너랑 만났을 때 가슴 만져야 한다고 했잖아.’
‘…그래 기억나네. 다짜고짜 가슴 만지고 싶다고 휴대폰으로 연락했던 거.’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것이 아마 둘을 사귀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리라.
‘사실 그거 흑마법사가 흑 마법으로 건 치유의 조건이야. 뭐라고 해야 하냐, 거시기 그. 흑마법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얻으면 그 대가로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거지.’
‘설마… 그게 가슴이라고?’
‘그러하다.’
은별은 개인적으로 생각했다. 흑마법사라는 게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없었다. 또한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 한들 두 눈으로 본 적은 없었기에 상식 선에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은별이가 먹은 약, 그 신비의 약이 이루어낸 이 현상은 누가 보아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이 약이 있다는 게 전 세계에 알려진다면 정말 무지막지한 업체에서도 갖기 위해 여러 제안을 하리라.
‘헛! 그럼 난 때부자가 되는 셈이군! 흑마법사느님에게 한 번 몇 개 더 부탁해볼까?’
‘…그러지마 바보야.’
‘왜 그러는 거요 낭자. 내가 부자가 되는 게 싫은 것이오? 부자가 되면 당신과 축구팀급 정도로 아이들을 낳아도 사는데 지장 없을 거 같은데.’
‘그런 게 문제가 아니잖아? 애초에 득을 주고 대가를 받는 게 흑마법이라면 그런 사람이 너에게 무언가를 준다고 가정할 때 대가를 안 바랄 리 없을 거라고. …그리고 축구팀 정도로 아이를 낳는 건 무리거든? 난 세 명 정도가 좋아.’
‘그렇군 세 명 정도가 좋군.’
‘…방금 건 잘못 생각한 거야! 아니! 그렇다고 쳐!’
다시금 화제를 돌리는 은별이었다.
‘아무튼, 난 그렇게 생각해. 절대로 좋은 일만 있진 않을 거라고.’
‘흠. 그래도 흑마법사느님이 아니었으면 지금 난 여기에 없을 텐데.’
아마 이미 죽었을 지도 모른다. 심한 희귀병을 앓던 민국이었으니까.
‘…그건 고맙게 생각해.’
그리고 저도 모르게 현재의 생각을 내뱉어 버리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그 생각을 고스란히 전달 받았고, 은별은 부끄러운지 ‘아 몰라!’라고 생각하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캠프파이어 때처럼 붉어지고 있었다.
‘아 근데 갑자기 흑마법사 다리 생각했더니 딸치고 싶어진다.’
‘…….’
그러나 그것도 잠시, 흑마법사의 하얀 피부를 생각해버린 민국이었다. 생각이 곧이곧대로 전달되는 마당에 은별이 그것을 못 들었을 리 없다. 곧장 기분이 상해버리는 은별의 모습이었다.
‘뭐라고 했어 지금?’
‘딸칠까? 어 아니 그게 아니오 낭자. 이것엔 오해가 아 딸치고 자야겠.’
민국은 ‘진정해라 나 자신이여, 진정해라 존슨.’하면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마치 속세를 떠나 수양을 하기 위해 산을 오른 대머리 아저씨처럼 그는 무에 돌입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은별의 의심 어린 추궁이 그것을 꺠트리고 말았다.
‘설마 그 흑마법사라는 게 여자야?’
‘어 여자야. 그것도 슈퍼 로리. 피부 하앍하앍.’
‘…생각을 읽는다는 게 이 점에선 편리하네. 생각하고 말하는 게 아니라서 그 사람의 본심도 바로 읽을 수 있고. 그치 이 변태야?’
‘오해요. 아 근데 갑자기 허벅지하니까 아까 만졌던 네 허벅지 떠오른다. 그리고 그 위로 좀만 더 올라가면….’
‘그만 생각해 멍청한 변태야!’
역시 밤이 되면 늑대의 본능은 깨어나는 것일까? 도무지 주체하지 못하고 쏟아오르려는 민국의 성욕에 은별은 강하게 일갈했다. 허나 그런다 한들 은별도 아까 전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라 그곳이 가려워지는 걸 느꼈다.
문득 ‘그곳이 가려워….’라고 생각을 해버린 은별이 다시 부끄러워진 얼굴을 이불로 가렸다. 민국이 그 생각을 읽고 씨익 웃으며 생각했다.
‘그냥 지금 몰래 나가서 할까?’
‘…꺼져. 잘 거야.’
이 후에도 생각으로 연거푸 하고 싶다는 대사가 언급되는 은별이었지만, 민국에게 들리든 말든 일단 자제하고 잠에 들려 노력하는 은별이었다. 새우 자세로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눈을 찔끔 가는 은별은 누가 봐도 잠을 자기에 어려운 모습이었다.
* *
“흐아암! 따사로운 햇빛! 마치 맥도날드에 롯데리아 햄버거 주문하고 싶은 느낌임!”
“…….”
그렇게 기나긴 밤이 흘렀다. 은별은 결국 두 시간 동안 한숨도 못 자다가 간신히 취침에 들 수 있었다.
…발정난 민국의 생각들이 어찌나 머릿속을 맴돌던지, 은별은 정말이지 잠자는 게 이리 지옥 같은 일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윽고 베란다 창문으로 짱짱하게 비추는 햇볕에 커튼을 젖힌 서라가 은별의 퀭한 얼굴을 보더니 ‘읭?’하며 물었다.
“츤고딩 언니찡 얼굴이 왜 그럼? 다크서클이 가슴 밑까지 내려올려 해여!”
“맞을래?”
“히익! 처, 처음은 좀 아프다지만 아픔도 한 순간이라 하니 살살해주세효…!”
눈을 귀엽게 감으면서 머리를 들이미는 서라의 모습에 은별은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똑똑똑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서라와 은별이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자, 문 너머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가도 돼?”
민국의 음성이었다. 서라가 대답했다.
“들어오셈!”
그리고 끼이익, 문이 열린 후였다. 민국은 발정난 새벽을 보낸 주제에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어지간히 괜찮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퀭한 얼굴로 그런 민국을 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 생각이 안 읽혀?’
아무래도 이제 약의 효능이 끝난 모양이었다. 은별은 이제 마음의 소리에 시달릴 일은 없겠구나 생각하며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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