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모든 짐을 다 옮긴 뒤였다. 네 여자 모두 숙박집 안으로 모이게 되었고 민국도 뒤늦게 주차를 마치고 돌아왔다. 가방의 물건들을 차례대로 꺼내는 예나. 가만히 앉아 있는 유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와 이빨을 닦는 서라. 은별은 벽면의 시계를 보다가 현관으로 들어오는 민국을 돌아보았다.
“언제 나갈 거야?”
현재 시간은 오후 1시였다. 모래사장이 있는 바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시간. 사람들이 꽤나 몰려드는 숙박 코스에 속했기 때문에 여행객들도 은근히 많았다. 민국은 거실에 있는 예나를 의식하고 짐짓 상냥하게 말했다.
“글세. 지금은 많이들 힘든 거 같으니까 좀 쉬다가 갈까?”
그 말에 자연스레 유이와 은별, 서라의 고개가 일제히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반대로 유이는 늘 보던 민국의 모습이라 생각하고는 ‘응.’하면서 미소 짓는 모습이었다. 은별은 여전히 가늘어진 눈빛으로 민국을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어이없어.’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자 친구 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어이없었다. 또한 민국의 변태의 극단적 수준을 보았던 유이 역시 의혹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나마 그런 민국을 곧잘 받아주는 건 서라 한 명이었다.
“역시 온니쨩은 술 취한 여자에게 잠깐 쉬다 가자고 아무 짓도 안하겠다고 말한 다음에 모텔에 가서 통일 될 사람이네여!”
노골적인 비수일 뿐, 결코 비아냥은 아닐 것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짐을 푸는 예나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도와줄게.”
“아, 아냐 괜찮아.”
“뭘. 이 정도는 나한테 맡겨.”
그리고 예나의 근처에 앉은 민국이 그녀의 짐을 대신해서 풀어주기 시작했다. 예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했으나 거부하고 도움을 주는 민국의 모습에 잠시 쳐다보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은별은 가만히 서서 상당히 불만 어린 얼굴로 그 광경을 목도했다. 뱃속에서 상당히 부글부글한 격노가 끓어올랐지만, 일단 숨을 내쉬며 한 차례 진정하는 은별이었다.
‘괜찮아. 나한텐 계획표가 있으니까!’
철두철미하게 준비해둔 연인 계획표! 오로지 연인 사이인 민국과 은별만이 함께 할 수 있는 그 계획표대로, 오늘부터 차차 실행될 예정이었다. 은별은 지금이라도 행복해하라고 예나를 보며 생각했다. 이윽고 서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흐느적거리며 민국의 허벅지에 얼굴을 갖다 대고 누웠다.
“으아어아~ 형님~ 나 이제 배고프네여 뭐 시켜 먹어여~.”
“너 그렇게 과자 많이 먹고도 배가 고프냐?”
“아앗! 술 배가 따로 있듯이 과자 배도 따로 있다는 걸 형님은 진정 모르시나여?!”
역시 십대 아이들은 성장기인지라 어른들보다 먹는 양이 많다. 예나는 민국과 서라가 대화하는 모습을 유독 지켜보다가 가볍게 미소 짓고는 입가에 손을 대며 말했다.
“아까 냉장고에 숙박하는 사람들을 위한 식당 번호표가 붙어 있던데 보러 갈까요?”
“오옷! 그거 좋네여 예나 씨!”
예나는 은별과 동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라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나이가 많다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건 예나가 어릴 때부터 부모 곁에서 배워온 교육이었다.
이윽고 서라가 양팔로 예나를 붙잡고 고양이처럼 부비적부비적 거렸다. 예나는 그런 서라를 내려다보면서 웃음 짓고는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민국은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막연히 지켜보다가 생각했다.
‘의외로 예나랑 서라가 잘 어울리네.’
서라는 여자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노골적인 멘트를 잘 날렸고, 그 때문에 숙연하고 성숙하기 그지없는 예나가 그것을 곧잘 받아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서라도 예나도 은근히 서로를 많이 배려하면서 맞춰주고 있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서로가 서로에게 맞는 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실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민국은 고개 돌려 유이가 있는 쪽을 보았다. 유이는 아까부터 그냥 앉아 당면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민국은 냉장고 앞에 서 있는 예나와 서라가 듣지 못하게 조심스런 목소리로 유이를 불렀다.
“유이 씨.”
“……?”
유이의 물음표 어린 얼굴이 민국에게로 돌아갔다. 민국은 노골적으로 자신의 가슴 밑을 양손으로 들썩들썩거리며 말했다.
“당신의 가슴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
민국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면, 이곳은 현실이다. 온라인상이 아니기 때문에 성드립을 날린다고 유이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심지어 그녀는 천하를 꽃피우는 파이터들조차도 상당히 고단할 수밖에 없는 발차기의 천재로서…. 꼬집!
“뭐하는 거야?!”
“아이고! 내 가슴아! …알게 모르게 내 가슴에 스킨쉽을 하는 군. 음탕한 여인이여.”
“…죄송해요 유이 씨. 다신 이런 짓 못하게 제가 철저히 관리할 테니까 기분 푸세요.”
“…….”
하지만 모처럼 유이가 사디스트의 기질을 보여줄 찰나도 없었다. 쿵푸의 발차기를 시도하기도 전에 민국은 은별에게 응징을 받아 아파하고 있었다.
비록 유이의 공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약한 가슴 꼬집기였지만, 그래도 은별이가 대신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니 차마 이제 와서 때리기도 어려웠다. 유이는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후후후, 그나저나 정말로 기대되는데.’
허나 민국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유이의 몸매를 상상했다. 풍만한 가슴! 출렁이는 속살! 그저 와이셔츠를 입는 것만으로 크게 두각을 드러내는 유이의 풍선(?)인데, 과연 그 풍선이 수영복을 통해 50%의 면을 드러낸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진정해라 존슨 더 베이비로션! 아직 때가 아니야!’
비록 진짜로 덮칠 생각도 없었고, 덮쳤다간 죽임을 당할 게 뻔한지라 망상만 하는 민국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족했다. 은별은 옆에 앉아 그런 민국을 의심 어린 눈초리로 지켜보았다.
‘…뭐 괜찮아. 나도 준비는 철저히 했으니까.’
수영복은 이전에 오르가슴 사건이 있었던 서라와 철저한 테스트 점검 후에 결정했었다. 자신의 몸매와 골반에 어울리는 환상적인 수영복을 골라낸 것이었다. 하지만 돌연, 은별은 저도 모를 회의감이 들면서 한숨을 쉬게 되었다.
‘이래서는 꼭 내가 밝히는 여자 같잖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당연히 은별의 시선은 민국에게로 향했다.
‘이놈 때문이야….’
그 시선에는 원망도, 미움도 한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담겨 있는 건 역시나 사랑이었다.
“국이국이민국이형! 우리 자장면 먹져!”
“그래, 시켜라.”
“오오! 역시 현대왕이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예스 멘트!”
“현대왕?”
민국의 망설임 없는 결정에 서라가 조아라 하면서 현대왕을 언급한 찰나였다. 예나는 ‘현대왕’이란 단어가 신경 쓰였는지 그것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당연지사 모두의 시선이 예나에게 전원 집중되었다. 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상냥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현대왕? 그게 뭐야?”
“어? 어엇, 어어엇?”
늘 민국을 부르는 호칭이 다양각색이었던 서라는, 그만 현대왕이란 호칭을 저도 모르게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여기서 네 명을 제외한 단 한 사람, 예나만은 비제이 현대왕이 서민국이란 걸 모르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서라가 검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혀, 현대왕이란!’하고 소리쳤다.
당황한 서라의 눈빛이 민국과 예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현대왕이란 한 때 세종대왕이 명랑해전에서 일본 왜군과 임진왜란을 펼치다가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자 북한의 김정은이 분노해서 돼지바를 사먹었던 과거의 역사….”
“?”
“최민식 만세!”
임진왜란은 이순신이 치룬 전쟁의 역사를 의미하며, 그 역사에는 명랑해전이 들어가 있고, 세계 2차 대전과는 관련 무이며 북한의 김정은이 분노해서 돼지바를 사먹는 것 역시 관련 무였다.
“…….”
졸지에 만세삼창의 자세를 취해버리는 서라. 급작스런 위기에 자기조차 제대로 컨트롤을 못하고 울상을 짓는 모습이었다. 그때 은별이 ‘하아’하면서 노골적으로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예나가 은별을 보았고, 은별이 허리에 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냥 별명이야. 서라가 민국을 부르는 호칭.”
“…….”
“간단하지?”
역시 대처의 여왕 은별이었다. 예나는 은별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하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휘유!’
‘휴우!’
민국과 서라가 속내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민국이라 한들 예나가 한 번 의문을 품으면 그것은 쉽사리 해결이 불가능했다. 예나도 은별이 정도는 아니지만 워낙 감이 좋은 여성에 속하기 때문에 이상한 분위기는 금방 눈치 채는 인물이었다.
‘이따 보답으로 뽀뽀해줄게!’
‘…시끄럽거든?’
웃으며 칭찬하는 민국에게 얼굴을 붉히고 궁시렁대면서 자리에 앉는 은별이었다. 이리하여 다섯 사람의 점심식사는 자장면과 탕수육, 그리고 짬뽕이었다.
“국물이 억수로 부드럽네!”
“맛있어?”
“응 맛있쪙!”
“다행이다.”
배달 온 음식을 거실에서 맛있게 먹으며 예나와 서라는 대화했다. 화목하게 대화하는 두 여인의 모습은 마치 친 자매와 비슷해보였다.
“…….”
은별은 이를 지켜보면서 짬뽕의 면을 후루룩 먹고 있었는데, 왠지 묘한 질투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건 예나가 민국이를 대할 때와는 다른 질투였다. 마치 친 자매라고 가정할 때 언니였던 자리를 예나에게 빼앗긴 기분이랄까? 실로 여자의 질투란 다양각색이었다.
“…….”
유이는 말없이 단무지를 짚어서 먹을 따름이었다. 워낙에 말이 없어서 어찌 보면 공기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 같았기에 존재감은 상당했다.
“어우 좋네여 마치 김수현이 중국 물 광고하는 맛이에여.”
“…그거 좋은 거야?”
“은별이 언니찡 가슴보단 안 좋았다는 거져!”
‘그 얘기는 하지 말라니깐?!’하면서 소리치는 은별이었고, 예나는 걱정스레 서라를 쳐다보면서 ‘혹시 저 사람이 너에게 나쁜 짓 한 건 아니지?’하고 질문했다. 서라는 ‘헤헤, 아무것도 안 했어여 걱정 말아여 언니짱’하면서 대답했다. 민국은 화목하게 노는 세 사람을 보다가 피식 웃음 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제 놀아볼까?”
현재 시간은 3시. 음식 그릇들도 모두 정리했겠다. 이제 가볍게 몸을 씻고 치장 뒤 수영복을 입으면 될 일이었다. 저마다 피로도 슬슬 사라진 거 같으니, 한 번 즐겁게 놀아볼 계획으로 민국은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응. 그럴게.”
“요시! 그란도 레슬매니아!”
예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고, 서라도 마찬가지였다. 유이도 말없이 가만히 일어났고 은별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민국에게 말했다.
“수영복 안방에서 입을 테니까 엿보지마.”
“알았어. 나 그런 남자 아닌 거 알잖아?”
“…….”
옆에 예나가 있어서 그런지 아주 세련된 남자처럼 웃음 짓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안방으로 들어갔고, 예나도 그 뒤를 따라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유이 또한 마찬가지였고 이제 마지막으로 서라가 남아 있었는데.
“으아닛. 형님!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말하지 않는 걸 까먹었셈!”
“응? 뭐냐?”
예나가 사라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말투로 바꾸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서라가 윗도리를 조금 벗어 배를 보여준 다음 말했다.
“나 임신했음!”
“…….”
“아이는 사실 은별 언니꺼임! 형 네토라레 당했음!”
“…….”
“으히히!”
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서라였다.
============================ 작품 후기 ============================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오늘 간만에 쉬는 날이라 편하게 잠을 잤는데 졸지에 17시간이나 잤네요 ㄷㄷ;
원래 밤 12시 되면 한편 더 올리는 건데 아마 새벽 1~2시쯤에 올릴 거 같습니다.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