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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93화 (93/369)

93화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날, 바캉스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집합하는 장소는 민국의 집 앞. 유이는 민국이 어디 사는지 몰랐기 때문에 전에 만났던 지하철 역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동 수단은 자동차였다. 민국은 집 앞에 대기시켜둔 자동차의 트렁크를 열어 짐들을 정리하고 있는 은별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치는 민국이었다.

"어떠한가 여친이여. 나의 간지나는 검은색 자동차가?"

"…아버지꺼 빌려와놓고 허세 부리지 말아줄래?"

그러하다. 민국에게는 아직 자신이 직접 구매한 전용 자동차가 존재치 않았다.

물론 파뿌리 TV를 통해 번 돈이 많았기 때문에 구매하려면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는 처지였다. 다만 아직 학생이었고 굳이 차를 많이 타고 다닐 일도 없었기 때문에 별로 구입할 의욕을 못 느꼈다. 고로 오늘 바캉스에서 운전 수단으로 사용될 자동차는 민국의 아버지 것이었다.

"은별 언니찡! 이거 잘 안 벗겨져여! 도와줘영!"

"왜? 무슨 일인데 그래?"

뒷좌석에서 무언가를 벗기느라 낑낑대는 서라의 구조 요청에 은별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어휴…'하고 한숨을 쉬더니 서라보다 좀 더 노련하게 봉지의 물건을 꺼내는 모습이었다. 서라는 그 모습에 '와아!'하면서 박수를 짝짝 쳤다.

"역시 오르가슴!"

"…그 이야기는 그만해줄래?"

정색하면서 말하는 은별의 모습에 서라는 그저 '헤헤'하고 베시시 웃을 따름이었다. 민국은 '오르가슴'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자신이 없는 사이에 둘이 꽤나 친해졌다는 것을 분위기로 느꼈다.

은별에게 들어보니 한 때 자기 집에서 서라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아무리 질문해도 알려주지 않는 은별이었다. 뭐,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겠거니 생각하며 민국도 나머지 짐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예나, 그 여자는 언제 온대?”

“글세, 아까 출발한다고 연락 왔으니 이제 슬슬 도착하지 않았으려나.”

토끼는 제 말하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예나는 제 말하면 나타났다. 저 멀리서 짐을 들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한 여성이 보였다.

가느다란 다리가 보이는 고운 하얀색 원피스에 둥근 모를 쓴 예나였다. 민국은 ‘저기 오네.’하면서 말을 하고는 짐짓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예나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수줍게 손을 흔들면서 미소 지었다. 은별은 그런 민국과 예나를 탐탁치않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한예나.’

그러다가 이윽고 한예나에게로 완전히 고개를 돌리는 은별이었다. 은별은 오늘을 위해 만사의 준비를 다 끝낸 상태였다.

‘두고 봐. 애인 사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보여줄 테니까!’

이전에 예나와 한 번 심하게 다투었던 은별. 오죽하면 집에 가야 할 시간에 집에도 가지 않고 민국의 집에서 잔다고 했을까. 그만큼 예나는 은별에게 애인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뺴앗겠다고 선전 포고를 했고, 은별의 자리를 노리려고 들었다. 은별은 그런 예나를 도무지 좋은 인상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예나가 민국의 앞에 도착하자, 민국이 해맑게 웃으면서 물었다.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응… 더울 텐데 마실 것도 많이 필요할 거 같아서.”

예나가 가방 안에 들고 온 물건 중에는 목에 갈증이 날 때마다 마실 수 있는 음료수도 잔뜩이었다. 허나 그것을 목도한 은별은 팔짱을 끼면서 코웃음을 칠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서민국이 널 이성으로서 봐줄 것 같아?’

“진짜 좋은 현모양처가 될 거 같네.”

“아, 아니야….”

“…….”

자신의 생각을 깡그리 깨뜨리는 듯한 민국의 발언에 은별은 눈을 날카로운 촉처럼 만들었다. 그 시선을 느낀 민국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예나는 은별이나 서라와는 다르게 민국의 본 모습을 모르고 있었다. 요컨대 민국이 파뿌리 TV계에서 막장 비제이 1순위에 드는 놈이란 걸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일까? 민국도 예나를 은별이나 서라 대하듯이 하지 않고, 마치 정상인(?)처럼 상냥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 상냥함이 결코 진실된 것은 아니라 은별은 생각했지만, 그래도 예나만 오면 대하는 태도가 영 달라지자 묘하게 불만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불만은 은별의 각오를 한층 불 지피게 해주었다.

‘…바캉스 계획은 완전히 준비돼있어. 그대로 수행만 하면 한예나 당신은 애인이란 게 얼마나 위대한지 알게 될 거야!’

다시금 그리 생각하면서 마음을 위로하는 은별이었다. 사실 강은별에겐 이 바캉스를 준비하면서 따로 계획해둔 루트가 있었다. 그건 바로 민국과 애인 사이로서 진득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국과 오붓한 사이로 진전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예나에게 잔뜩 보여주는 복수를 하고 싶단 마음 때문도 있었다.

“그럼 차에 시동 걸게. 다들 짐 정리하고 안으로 들어와.”

예나 때문인지 짐짓 상냥해진 모습으로 말하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운전석에서 시동을 거는 민국. 은별은 자신과 순간 눈길을 마주했던 예나를 ‘흥!’하고 코웃음치면서 무시하고는 차 안으로 들어갔다. 다만 좀 의아했던 점은 은별이 앞 옆좌석이 아닌 뒷좌석에 탑승했다는 것이었다.

“엇? 언니찡 앞좌석 안 앉을 거예염?”

“앞자리는 멀미 나.”

“부왁! 그럼 내가 앉아야지염! 이히힝!”

뒷좌석 차창이 보이는 자리에 앉는 은별이었고, 은별의 대답에 조아라 하면서 앞 옆좌석에 앉는 서라였다. 푹신푹신한 방석에 앉는 것마냥 의자에서 위아래로 엉덩이를 뛰노는 서라. 그런 서라가 민국의 옆좌석에 앉았다는 건 결과적으로 나머지 한 사람, 한예나는 뒷좌석에 앉는다는 게 된다. 철컥.

“…….”

“…….”

피해갈 수 없는 예상이 적중되듯, 예나가 뒷문을 열고 안을 둘러보다가 은별과 눈을 마주쳤다. 은별은 졸지에 같은 뒷좌석에 앉게 되자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였다.

예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기세가 약해지는 걸 느꼈지만, 예전에 필승의 의지를 다졌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진지해진 얼굴로 은별의 옆좌석에 앉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다소곳이 앉는 예나의 모습에 은별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면서 옆의 차창을 바라보았다.

차의 시동이 걸리고 기분 좋은 바람이 차 내부를 시원하게 만드는 가운데, 민국은 핸들을 붙잡았다.

“자, 이제 출발할 테니까 안전벨트 매줘.”

예나 때문인지 보기 드문 친절함까지 선보이는 민국의 멘트. 그 멘트가 영 거슬렸지만 일단 벨트는 하는 은별이었다. 예나 역시 따라서 벨트는 매는 모습이었고, 서라는 이미 이전에 매고 있던 상태로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냠냠 입에 담을 따름이었다.

“그럼 출발할게.”

민국의 신호를 끝으로 시동이 걸린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민국이 면허증을 딴 건 불과 4개월 전이었다. 그때 대학교 동기와 인맥을 구성하고, 과제를 풀이하고 바쁘게 보내던 지라 시간도 없었는데, 그 와중에 운전면허까지 동시에 따는 게 시간을 아끼는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근성이 있어 민국은 곧잘 면허증까지 딸 수 있었고 지금은 이렇게 아버지 차를 몰고 운전하고 있었다. 물론 운전 경험이 오래되지는 않아 약간 서투른 감이 있겠지만,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적지 않게 적응하는 모습이었다.

“냠냠.”

옆에서는 서라가 계속해서 과자를 씹고 있는 가운데, 민국은 백미러로 뒷좌석의 분위기를 살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은별과 예나가 앉아있는 뒷좌석의 분위기는 엄청난 우중충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에 민국은 저도 모르게 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을 은별인데 어찌하여 허락했는가 궁금한 민국이기도 했다.

“냠냠.”

“너 오빠는 안 주고 혼자 먹냐?”

“히익! 온니쨩이야 말로 하나뿐인 나의 정성어린 과자를 먹고 싶어 환장한 셈이에여? 정말 매너가 김치보다 없으시네!”

몽크의 절규처럼 두 뺨에 두 손을 올리고 과장되게 입을 벌리는 서라였다. 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분위기를 메이킹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단연 서라밖에 없었다.

이윽고 서라가 언제 그렇게 얘기했냐는 듯 베시시 웃으면서 과자를 쥐어 민국의 입가에 갖다 대주었다. 민국은 ‘아’하고 입을 벌려서 그것을 받아먹은 다음 오독오독 씹기 시작했다.

초콜렛맛이 느껴지는 과자인 게 참으로 스트레스 풀기에 좋은 먹거리였다.

“언니찡도 드실래영?”

“…….”

이윽고 뒤에 있던 두 사람도 신경써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서라가 과자 봉지에서 과자를 꺼내 차창을 바라보고 있는 예나에게 건네주었다. 예나는 그런 서라의 손길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손을 뻗었다.

“고마워요.”

“헤헤 아니에여! 천만천만하져!”

해맑게 웃는 서라의 모습에 예나는 과자를 입안에 담으며 오독오독 씹었다. 서라와 예나는 사실상 초면인 사이였다.

실제로 마주하는 건 이번이 정말 처음이었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나는 본능적으로 서라에겐 자신에게 없는 묘한 활기참이 있다는 걸 느꼈다. 이내 다리를 꼬고 앉아 반대편 차창을 바라보던 은별에게 고개를 돌리는 서라였다.

“오르가슴찡도 드세영!”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어쨌든 고마워.”

정색하면서 대응하는 은별이었지만 과자는 상냥하게 받아 입에 담는 모습이었다. 한 쪽 볼에 넣고 와작와작 씹는 은별이의 모습에 서라는 웃음 짓다가 다시 앞좌석의 정면을 바라보며 앉았다.

“근데 형.”

“왜 그러냐.”

서라가 뒷좌석의 두 여인이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저 두 언니찡 왜 저렇게 말씀이 없으신 거져?”

“뭐….”

민국도 작은 목소리로 대응했다.

“굳이 말하자면 나 때문이겠지. 엇흠.”

“헐.”

서라가 마치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눈빛으로 민국을 쳐다보았다.

“왠지 은별 누나가 지금 형 보면 이 말 할 거 같음.”

“뭐라고?”

“뭐 이런 지구 생명체가 다 있죠?!”

이윽고 유이가 있는 지하철 장소가 보였다. 멀리서 보이는 지하철 앞 출구에 여행용 가방 하나를 가지고 청바지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커다란 가슴이 주목되는 것이 최유이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올! 슴가슴가찡!”

“…….”

이윽고 차가 그녀 앞에 도착하자 서라가 차창을 열면서 그리 소리쳤다. 서라의 목소리에 유이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민국과 시선을 마주했다.

“오셨네요 유이 씨. 타세요.”

“……?”

민국의 말투에서 이상함을 느낀 유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처럼 변태스럽게 함부로 대하는 느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도리어 그 이질감에 유이는 잠시 타는 것을 멈칫멈칫하였다. 그때 뒷좌석에 있던 한예나가 자리에서 나왔고, 유이는 그런 예나를 보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

“타세요.”

예나가 뒷좌석의 중간 자리를 가리키면서 말했고, 유이는 졸지에 트렁크에 가방을 넣고 중간 좌석에 탑승하게 되었다. 예나가 나머지 자리에 앉아 문을 닫으면서 다시 시동이 걸렸고, 이로써 바캉스에 필요한 여인들은 전부 모인 것이었다.

“유이씨도 안전 밸트 메주시고요.”

“…….”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유이였다. 그리고 뒤에 있는 안전벨트를 찾는데 손에 짚히지 않자, 보다 못한 은별이 ‘여기 있어요.’하면서 벨트를 보여주었다. 유이는 고맙다는 의사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그것을 잡아 자신의 가슴 중심부부터 쫘악 매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하얀 와이셔츠로 그나마 숨겨져 있던 그녀의 볼륨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유이가 안전벨트를 하길 기다리고 있던 민국 역시 백미러로 그것을 보고는 ‘허억.’하면서 진심으로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이내, 초면인 예나를 비롯해, 구면인 은별과 서라를 비롯해, 유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유이를 보면서 질투 반 욕구 반으로 생각했다.

‘크다….’

‘너무 크잖아!’

‘크, 크시네….’

‘와 파이즈re!'

‘역시 강간이군!’

문득 방지턱이 기대되는 민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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