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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89화 (89/369)

89화

"잠깐 타임! 혹시 제가 기분을 언짢게 했다고 해서 폭력을 사용하신다면 변호사를 불러 대화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세상이니 주먹이 안 무서운 건 아니지만서도! 세상엔 대화로 해결되는 일들이 무척이나 많이 있습니다!"

"……."

"고로 장난이었으니 자비 좀."

민국은 먼 훗날이 두려워서 굽신거렸다. 잠시 가만히 있던 유이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어, 혹시 괜찮으시면 유이 씨 간만에 몸속에 내재되어 있는 스트레스도 전부 풀 겸 바캉스라도 가지 않으실래요?"

"바…캉스…."

유이는 바캉스라는 단어를 조용히 읊조리고는 입을 닫았다.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모두 저 멀리로 날려버리고 자유로워진 사람으로서 날개를 펴고 잠시 동안 아무 생각 없이 놀 수 있는 곳! 바캉스! 그런 곳을 민국이 먼저 가자고 제안하니 유이는 조금 뜸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 친구분…이랑은요…."

"은별이랑은 당연히 갑니다. 근데 인원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더 즐거워지니까요. 유이 씨도 혹시나 갈 생각이 없나 싶어서요."

유이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현재의 민국은 유이에게 상냥 나긋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가 매사에 장난질이 다분한 사람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유이는 본능적으로 민국을 의심했다. 과연 그가 평범한 이유로, 만난 지 몇 번 되지도 않은 유이와 바캉스에 가는 것이 말이 될까?

"혹시 무슨 계략이라던가…."

"계략이라니요! 출렁이는 가슴정복왕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부른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오해입니다!"

"……."

"아, 말해버렸군요. 훗."

음탕한 속내를 들킨 주제에 정말이지 뻔뻔스럽기 그지 없는 민국이었다. 그러나 이미 기존부터 민국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던 유이는 크게 충격을 먹는 모습도 아니었다. 왜, 실제로도 그런 일이 다분하지 않은가? 얌전히 있던 사람이 급작스레 화를 내면 저 사람에게 정말 화가 날 만한 이유가 있구나, 늘 화를 내던 사람이 또 화를 내면 어이구 저 사람 또 화내고 있구나, 라는 인간의 주요 심리적인 현상 말이었다.

민국은 걔 중에서 '아 저 놈 또 싸이코 짓하는구나.'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는 인물이었다. 유이는 입을 여물다가 닫기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생각해볼…."

"오신다고요?"

"생각…."

"오신단 말입니까?"

"생각해볼…."

"오신다니! 다행입니다! 날짜 잡아서 연락드리도록 하죠!"

"……."

뚝하고 통화를 끊어버리는 민국이었다. 애초에 유이의 의사는 정확히 들을 생각도 없던 것이다. 전화통화가 끊긴 뒤 유이는 가만히 휴대전화만 붙잡고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이 분노로 파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마 실제로 그녀와 조우하게 되면 민국은 자기 목줄을 중요하게 챙겨야 할 것이다.

*

'좋아, 중요한 사람들은 다 챙긴 것 같고.'

민국은 이외에 더 필요한 사람이 있나 확인했다.

'김민철 이 자식도 넣고 싶긴 한데 말이지.'

사실상 민국은 남녀 불문하고 인원이 많으면 많을 수록 더 즐겁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그 인간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갈등이라던가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고비라 생각하였고, 인원이 많으면 결과적으로 취향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재미나게 노닥거릴 수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민국은 자신의 비제이 파트너이자 오랜 친구인 김민철을 이 여행에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서라 때문에 뭐 별 수 있나. 하도 부담을 안고 있으니.'

서라는 김민철의 지속되는 연락에 아예 받지도 않는 상태였다. 정말이지 싫으면 나오는 그녀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김민철은 누굴 닮았는지(?) 어지도 눈치가 없어서 계속 서라에게 집적대고 있었다.

"미안하다 민철아. 네가 조연인 걸 용서해라."

이제 남1 여4의 하렘 파티가 민국의 바다 바캉스에서 펼쳐질 것이었다. 아, 물론 말이 하렘 파티지 그 파티가 올바르게 실현될 거라고 민국도 생각지 못했다. 다만 로또를 구매하는 사람이 정말로 로또 1등에 당첨될 거라고 생각해서 로또를 구매하겠는가? 그냥 로또 1등이 되길 바라는 상상의 마음에 행복해하면서 구매하는 것이다.

민국은 그 상상으로도 족했다.

'애초에 진짜 하렘이니 뭐니 그런 걸 꿈꿀 생각도 없고.'

여기서 민국의 진심이 나온다. 민국은 이따금씩 자신의 여자친구인 은별이에게 하렘이니 뭐니 하면서 우스꽝스러운 말을 연거푸 친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은별이는 강한 질투심을 드러내면서 정말로 그랬다간 혼쭐을 낼 거라고 소리쳤다. 민국도 은별이의 생각에 따라서, 애초에 양다리를 걸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까지 행적을 보면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민국은 알고 보면 순정파에 로맨티스트였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은별이랑 만난 지 이제 슬슬 한 두달쯤 되어가지 않나?"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은별이와의 사이는 더더욱 돈독해지고 있었다. 지난 친구로서 보내던 시절과는 차원이 틀릴 만큼 진전되고 있었다. 칙촉 때문에 더 진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도 했지만, 사실상 크게 안타까운 건 없었다.

'이벤트도 한 번 해주는 게 낫겠지?'

고작 30일밖에 연애를 안해놓고 무슨 이벤트냐 하겠지만, 은별은 민국을 민국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상당히 오래 전부터 좋아했었다. 그리고 민국도 은별을 좋아하게 된 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표현은 늘 툴툴거려도 뒤에서 챙겨주는 은별이였기 때문에 민국은 한 번 어떤 것으로든 보답을 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벤트는 아마 다섯 사람이 함께 하는 바캉스에서 펼쳐지겠지.

'저격고수 이 인간은 역시 부르기 뭐하려나? 유이 씨랑 헤어졌다고 하니.'

휴대전화의 인맥들을 뒤적이던 민국은 눈에 띄는 저격고수, 강철남을 보고는 상념에 잠겼다. 두 사람이 무슨 이유로 헤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방송에서는 그렇게 죽을 잘 맞추면서 나한테 망신을 주더만 말이여.'

아직도 유이에게 차인 그 방송은 녹방으로 변모되어 수많은 시청자들을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민국이 더더욱 유명해지도록 계기를 만들어준 영상이라고 할까. 물론 거의 굴욕샷에 가까운 영상이었기 때문에 민국은 결코 그 영상을 틀어보는 일은 없었다. 고로 모두와의 연락을 마친 민국이었다.

'잠이나 한 숨 자고 방송이나 할까?'

슬그머니 쏟아지는 피곤함에 민국은 낮잠이나 한 숨 자자고 생각했다. 눈을 비비면서 침대로 향하는 민국이었다.

*

통화가 끊긴 뒤 유이는 컴퓨터에 앉고 있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방송을 키지 않고 스카이 라이프에 먼저 접속했다. 스카이 라이프가 우선 순위 1위인 이유는, 유이에겐 히키코모리 답지 않게도 상당히 많은 인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유이 씨, 지금 뭐하세요?]

[같이 게임이나 한 판해요]

[왜 실제로는 얼굴을 볼 생각을 안하는 거니. 오빠가 밥 사줄까?]

물론 걔 중에는 유이의 목소리를 듣고 홀려서는, 어떻게든 작업을 걸려고 하는 못된 남자들만이 태반이었다. 필시 유이를 실제로 목도하게 된들, 유이의 그 자체 모습을 존중하기 보다는 그녀에게 달린 출렁이는 가슴만을 눈 여겨 볼 것이었다. 저걸 언제 만질 수 있으려나… 하면서.

"……."

유이도 여자였기 때문에 남자들의 그런 꿍꿍이를 아예 모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는 방안의 책상을 뒤적이다가 팔꿈치로 무언가를 툭 치고 말았다. 이윽고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펼쳐지는 한 권의 책. 아니, 그건 책이 아니라 졸업사진이 담겨 있는 졸업사진책이었다.

"……."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연 3년이 지났건만, 유이는 졸업사진책이 근처에 있는 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하기사,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컴퓨터만 만지작거리면서 긴 시간을 보내왔으니… 그렇다고 진짜 답이 없을 정도로 폐인이냐고? 아니, 그것도 아니다.

실제로 유이는 컴퓨터 IT 쪽에 일가견이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였다. 고로….

"……."

투다다닥. 스카이 라이프에서 오는 연락을 잠시 무시하고 C언어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발동시켜 무언가를 작동하는 유이였다. 그녀는 이미 파뿌리 BJ를 제외하고도 각종 어플 및 사이트로 무수히 돈을 버는 인물이었다. 다만 워낙에 입이 무겁고 사교성이 떨어지다 보니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아니, 한 명은 이제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뭐하세요?]

유이는 스카이 라이프에 또 다른 사람이 메시지를 건네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사람 때보다 좀 강하게 반응했다. 강한 반응이라고 해봤자 눈꺼풀을 한 차례 꿈틀거리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전등도 키지 않아 어두운 칠흑 속에서 유이는 마우스를 딸칵거리며 모니터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궁금해서 보냅니다. 다른 이유는 없으니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저격 고수.'

실제 이름은 강철남. 유이는 강철남과 헤어진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와 했던 식사와 데이트를 떠올렸다. 물론 그 식사와 데이트는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끝났으며, 실제로 나눈 정이라고는 손을 잡은 것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유이는 강철남이 보내온 메시지에 답장을 하려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지만 두드리던 것도 잠시,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답장하려던 답장 메시지를 지워버렸다. 어차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눈다 한들, 이 사람과 선이 더 이상 가까워질 거라고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당신에 비하면 저는……!'

유이는 강철남이 이별 직전 토해내던 분노 같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분노 같은 말은 어느 누구에게나 늘 들어왔던, 그런 소리였다. 서민국도, 강은별도, 강서라도 여기 있는 최유이처럼 많은 상처를 안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유이는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느니, 차라리 문을 닫는 게 나아.'

그리 생각하며 유이는 다시 C언어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키보드만 열심히 두드릴 따름이었다.

*

'안녕하세요? 현대왕입니다 자식들아!'

민국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방송에서 자신이 선보였던 현대왕이란 캐릭터에 대한 꿈이었고, 또는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지난 인생들에 대한 꿈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영 달갑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추억들이 필름의 조각조각처럼 변질되어 민국의 꿈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민국은 그 추억의 잔상들을 꿈속에서 되짚어 보다가 돌연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실제로도 얼굴에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으으음…."

그것은 악몽에 가까운 일이었다. 가만히 있던 민국으로 하여금 전신에 땀을 뻘뻘 나게 할 정도였으니 말이었다.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민국은 그 비명 소리를 듣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무언가를 해내려고 노력하였다. 허나 그것이 결코 뜻대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꿈속에서도 생각할 수 없었다.

'안….'

안 돼라고 소리치려던 순간 턱하고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머지않아 그 악몽 속에서 민국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떨어져 버렸을 때, 민국은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끝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 찰나, 화려한 빛이 밝혀지면서 민국의 어둠을 헤쳐주기 시작했다. …그것이 꿈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 작품 후기 ============================

이번엔 내용이 좀 진지하죠?

그만큼 중요한 파트고 복선도 많이 있습니다!

어차피 모든 건 100화 안으로 해결되니 한 번 추리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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