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민국과 예나가 있는 테이블은 한참동안 정적이었다. 예나가 갑작스럽게 참여 의사를 밝히자 민국은 순간 머리 회로가 막히는 느낌이 징하게 든 것이었다.
민국은 아무래도 비제이들 간의 모임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보니 예나와 함께 하는 건 무리일 거라 감안하고 거절 의사를 피력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예나가 너무나도 간절한 눈빛을 민국에게 보내고 있었다. 마치 이대로는 무언가를 놓치고 싶지 않는 듯한 욕구의 눈빛. 민국은 예나의 그런 면모에서 돌연 은별과 예나에게 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예나는 정말이지 민국으로선 처음 보는 진귀한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소꿉친구로서 함께 하면서 한 평생 보여준 적 없는 불같던 예나의 모습.
‘왜 그런지는 어렴풋이 알겠지만 서도.’
민국은 그런 예나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었다. 사실은 반쯤 눈치 채고 있었다.
필시 예나도 더 이상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런 예나를 데리고 가게 된다면 과연 은별은 그것을 전적으로 받아줄까? 둘 사이가 워낙 안 좋다 보니 그것을 받아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또한 자기 혼자서 선뜻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아무래도 나 혼자서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보니까 예나야.”
“…….”
“잠시 휴대전화 좀 쓸 수 있을까?”
예나가 조금 얼굴에 그늘 진 모습을 보이면서 ‘응,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은 많이 미안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은별이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낭자. 비제이가 아닌 사람도 참여하게 되겠소?]
답장은 금방 왔다. 우우웅.
[누군데? 설마 예나?]
‘허억.’
민국은 서라가 놀랄 때처럼 똑같이 놀라 보였다. 정말이지 여자의 직감은 유독 튄다고 하지만 은별의 직감은 그 어느 여자보다도 더욱 튀었다.
[원래 츤데레들은 직감 속성도 일반 여자보다 몇 배는 높은 것인가?]
[그 여자도 가고 싶단 말이지? 흐음]
답장은 한 동안 없었다. 하지만 수 초 경과 후 였을까, 은별이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가도 돼]
민국은 은별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맞은편에서 지켜보던 예나도 그런 민국의 생생한 표정을 보게 되자 조금 놀라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잘못 본 건 아닌가 눈을 비빈 다음에 메시지 답장을 적었다.
[혼또니 데스요?]
민국이 일본어를 사용할 정도면 답이 다 나왔다.
[그래]
아니, 어째서? 민국은 은별이가 쉽게 수락해주니까 나쁘진 않았지만 한 편으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낭자, 혹시 내가 하렘 계획을 세우는 것에 동의를 해준 것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어쨌든 용건은 끝났으니까 난 이제 과제하러 갈 거야. 급한 일 아니면 연락하지마]
그리고 은별은 대화를 끊었다. 민국은 고개를 들어서 예나를 바라보았다. 예나는 불길한 눈빛으로 ‘어떻게 되었어?’하고 물었다. 민국은 우물거리다가 입을 열 따름이었다.
* *
‘그 여자도 따라오겠단 말이지?’
민국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던 은별이었다. 그녀는 어느 덧 학교에서 나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민국에게 보냈던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후 ‘후후후후….’하면서 음침하게 웃어 보였다. 그건 은별이로서는 정말이지 보기 드문 웃음이었다.
‘좋아, 본때를 보여주겠어!’
사실 은별이가 바캉스에 예나도 함께 오게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자신이 민국이의 여자 친구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시켜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속셈이었다!
‘아주 예쁘게 입고 가서 민국이랑 실컷 알콩달콩하게 놀아줄 테니까! 어디 한 번 감당할 수 있으면 감당해보셔!’
의도가 마냥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건 다 여자 친구가 있는 걸 알면서도 대시를 해온 예나의 잘못도 있었다. 은별은 백화점에 도착해서 수영복을 판매하는 센터로 이동했다. 이윽고 수영복 판매점에 도착하자 직원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면서 안내했다.
“안녕하세요. 어떤 물건 찾으려고 하시나요?”
“괜찮은 수영복 있을까요? 이성에게 어필이 잘 되는 수영복으로요.”
“아,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수영복이요? 여기로 와주세요.”
이윽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수영복들이 바글바글한 곳에 도착했을 때였다. 배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수영복에서 비롯해 T팬티에 가까운 야한 수영복까지… 별의별 것이 다 있었다. 하지만 은별은 그렇게 야시시한 수영복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건 어떠신가요? 요즘 여성 수영복 트렌드로 유행도 타고 있고 많은 여자 분들이 남자 친구분에게 어필하려고 입곤 하세요.”
“으음….”
은별은 여직원이 보여주는 수영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배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핑크빛 수영복이었다. 아래 수영복과 윗 수영복이 따로 분리되어 있어 노출은 상당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한테 보란 듯이 하려면 이 정도 옷은 입어야겠지?’
은별은 직관력이 뛰어난 여성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실생활이 어떤지, 또는 성격이 어떤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은별이 본 예나로서는, 절대로 바캉스에서 바다에 간다고 야시시한 수영복을 입을 자신감은 없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은별은 그 수영복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걸로 주세요.”
“네. 사이즈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
여직원의 물음에 돌연 입을 다무는 은별이었다. 상업용 미소를 띄우면서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직원을 뒤로하고, 은별은 고개를 슬쩍 내려 자신의 가슴을 확인해 보았다.
“…….”
바스트 사이즈야 말로 은별이가 안고 있는 유일한 약점이었다. 오죽하면 남자친구인 민국이에게까지 아스팔트 껌딱지 소리를 장난스레 들을 정도니 말이었다.
“A….”
“네?”
“…A컵….”
“네? 뭐라 그러시는지 잘.”
“…공기 컵으로 주세요.”
용기 내서 목소리를 또박또박 발음하는 은별이었다. 직원은 은별의 그런 말에 잠시 머리 회로가 멈췄나 싶더니, 이내 뜻을 이해하려는 듯 ‘공기컵 공기컵….’하면서 말을 곱씹는 모습이었다.
“아!”
“…….”
“네! 준비해드릴게요. 잠시 기다려 주세요.”
차마 ‘에이’컵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꼴에 자존심으로 공기 컵이라 하는 은별이었다.
* *
“전액 지불이 아니라녀! 저 같은 짠돌녀에게는 그런 제안 정말이지 불쾌하기 짝이 없네여!”
“그럼 바캉스 안 간다는 거냐?”
“물논 바캉스는 갑니다!”
민국의 본론에 곧장 대답하는 서라였다. 민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서라는 학생이었지만 부모님에게 잘 말하면 갈 수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서라를 제외한 비제이들 전부 다들 성인으로서 어느 정도 어른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우왕! 그럼 온니쨩 제가 수영복 입은 것도 보겠네여! 저 수영복 입으면 막 가슴도 쿵! 허벅지도 쿵! 한 로리의 모습이 나오는데 괜찮겠어여?”
“괜찮아. 어차피 가슴의 로리는 은별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
서라가 뭔가 라이벌이라도 생긴 것마냥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나보다 연상인 누나가 가슴은 로리라니 뭔가 불타는 라이벌 의욕이 생기네여 파르르르….”
“그 말하면 너 은별이에게 진짜 맞을 지도 모르겠다.”
“헤헤, 당사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말해줄 이유는 없져!”
어쩌다 보니 이거 여자 친구 뒷담화가 된 것 같았다. 이윽고 민국은 말했다.
“그럼 날짜 정확히 지정해서 알려줄게.”
“이응! 대신 놀토 때로 해주길 바람!”
“너 놀토 언젠데?”
“다음 주?”
“그럼 다음 주쯤으로 잡는 게 좋겠다. 그럼 잡아서 알려줄 테니 집에 가서 야동 즐감상.”
“어, 어멋! 저는 파일로리에서 받은 야동은 재탕하지 않습니다여!”
그리고 전화를 뚝 끊는 서라였다. 민국은 가벼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훗….’하고 은밀한 웃음을 터트렸다.
‘여자 세 명과 함께 가는 바캉스! 이것은 모든 남자들이 한 번씩 꿈꿀 기획일 테지!’
그리고 그것을 계획하고 실현할 수 있는 남자 서민국! 모든 남자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리라!
‘그럼 현재 참여하기로 한 사람은 은별이, 예나, 서라. 이 정도면 충분한가?’
하지만 뭔가 한 가지가 부족해 보였다. 뭐라고 할까. 남자들의 눈을 위아래로 출렁이게 할 수 있는 파괴력이 세 여자에게서 조금씩 부족하다고 할까? 민국은 불현 듯이 떠오르는 한 여성을 생각했다.
‘윤간!’
이제 졸지에 강강에서 강간으로 바뀌고, 강간에서 윤간으로 바뀌어버린 강강이었다. 대체 그녀의 이름은 언제쯤에 정상적으로 불려질 수 있단 말인가? 이윽고 휴대폰을 뒤적여서 강강의 전화번호를 찾는 민국이었다.
최유이라고 적힌 그녀의 본명의 휴대전화 번호가 민국의 눈에 드리웠다. 민국은 곧장 통화 버튼을 눌러 보았다.
뚜루루루루….
“안 받네.”
가슴의 왕이라 불리는 최유이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이건 앞으로의 바캉스 문제에 뭔가 크나큰 위기를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민국은 혹시나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 때문에 받지 않을 수도 있다 생각하고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집 전화로 그녀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통화를 요청해보았다. 뚜루루루….
“여보세요….”
그제야 받는 유이였다. 민국은 ‘역시!’하면서 코에 엄지와 검지를 갖다대어 막고는 소리냈다.
“안녕하세요. 파뿌리 TV 관계자인데요. 파뿌리 방송 비제이로 활동하시는 강강님의 연락처 맞으시나요?”
“네… 맞는데….”
“다름이 아니라 저희 파뿌리 TV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어서요. 그 소문의 진상을 알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무슨….”
“다름이 아니라 저희 파뿌리 TV에서 활동하시는 현대왕님 아시죠? 그분에게 굉장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소식을 들어서요.”
“…….”
전화를 받고 있는 유이는 뭔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 이상함을 눈치 채기 전에 민국은 말을 이어갔다.
“혹시 뒤에서 현대왕 님을 흠모하시거나 사모하시는 건 아닌가 싶어서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거 맞다구요?”
“아니에요….”
“맞다구요?”
“아니에….”
“맞다구요?”
“…….”
“맞군요! 이런 이런! 큰일이네요. 사실 파뿌리 TV에서 규정으로 비제이들끼리는 연애를 금지시키자는 파뿌리 전용 법안이 나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연락드린 거거든요.”
“…….”
“만일 그쪽이 정말로 현대왕 님에게 마음이 넘쳐서 자기 자신조차 통.제.가.불.가.능.하.다.면! 별 수 없이 현대왕 님과 2인으로 사귈 수 있는 기회를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엣헴!”
유이의 반응은 없었다. 아니, 어쩐지 무언가 수상함을 느끼고 잠시동안 침묵하는 모습이었다. 얼마지 않아 유이가 입을 열었다.
“현대왕… 님이죠?”
“어? 아닌데요?”
이미 들킬 대로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민국은 시치미를 땠다. 유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맞잖…아요….”
“아니 아니 아닌뎅? 아닌데! 아닌데 깔깔깔깔!”
“…….”
그리고 뚝 통화를 끊어버리는 서민국이었다. 이윽고 서민국은 휴대폰으로 다시 유이에게 연락하였다. 아까 전엔 받지 않던 유이가 이번엔 전화를 받았다. 민국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짐짓 하품하는 얼굴로 말하였다.
“아, 유이 씨? 하아암~ 그 소식 들었어요? 뭐 막 유이 씨가 나 좋아한다고 파뿌리 쪽에서 연락오던데~ 흐아암~.”
“…….”
“만일 정말로 사귀고 싶으시다면 제가 츤고딩이랑 합해서 사귀어드릴 의향은 있습니다 엇흠! 참 나란 남자 인기 많아서 탈인 남자. 여자들이 슬퍼하겠네요.”
뒤늦게 유이가 입을 열었다.
“방금 연락하신 분… 현대왕 님이죠……?”
“넹? 아닌데요?”
“맞잖….”
“아닌데요?”
“맞잖아요….”
“아닌데요?”
“맞잖….”
“아닌데요 아닌데요 아닌데요?!”
서라로 빙의하는 서민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