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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81화 (81/369)

81화

끼이익… 쾅!

이윽고 민국이 문을 닫고 사라진 뒤였다. 민국의 집에 홀로 남게 된 은별. 그녀는 방금 전 민국이 자신을 덮치려 했음에 아직도 가슴이 떨리는 걸 느꼈다. ‘하아, 하아.’거리면서 한참을 심호흡하던 은별이 곧 입을 굳게 다물었다.

“…꺄아아악!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하지만 얼마지 않아 머리카락을 쥐어짜듯이 잡고서 소리치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홍조로 완전 일어 누가 보면 얼굴에서 마그마가 흘러내리는 줄 알 것 같았다.

“어떡하지? 어떡해애!”

은별은 엎드려서 민국의 베개에 얼굴을 묻혔다. 그리고는 두 발을 동동 거리면서 침대를 차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베개에서 얼굴을 드러낸 은별은 상당히 붉은 얼굴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지었다.

“실은…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사실은 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다. 민국에게 방금 전 말했듯이, 그저 여기에 온 까닭은 어디까지나 민국과 애인 사이로서 알콩달콩 놀고 싶어서였다.

“그 알콩달콩에 그런 건 속해 있지 않단 말이야 으앙!”

다시금 베개에 머리를 묻고 발을 동동 차는 은별은 누가 봐도 귀여울 것이었다. 하지만 귀여운 건 뒷전인 은별 입장으로선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해쳐나가야 하나 난감할 따름이었다.

‘이제 와서 관둘까? 하지만 처음인데….’

처음이니까 상당히 아플 것이다. 적어도 은별이가 뒤적여본 인터넷상 정보(?)로는 그러했다.

심지어 여자에게는 처음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서, 남자들보다 잠자리를 더 신중히 해야 했다. 남자에게는 흔적이란 게 남지 않지만 여자에겐 처음이란 흔적이 남으니까 말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처음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은별이기도 했다.

“그리고… 아까 우는 모습이 영 그렇기도 했고….”

베개에 입술을 대고 말하자 소리가 묻혀서 나온다. 어쩜 컴퓨터의 야동을 괜히 지웠다는 생각이 드는 은별이었다. 아동 야동이든 뭐든 어차피 남자친구가 보는 것이고 경찰에게 안 걸리면 그만인데 말이다!

“아니야! 그래도…….”

단순히 그 점 때문에 야동을 지운 것은 아니었다. 은별도 왠지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비록 관계를 맺은 사이는 아니지만 애인 사이로서 그런 것을 접하는 남자 친구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할까? 하지만 생리적인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으로서 그것을 막무가내로 통제만 한다면 결코 좋지 못할 것이다. 특히 남자란 쌓였으면 터져주는 게 남자로 태어남으로서 갖춰진 의무였다.

“으… 나도 내가 어떡해야 할 지 모르겠단 말이야!”

벼락같은 비명을 지르던 은별은 곧 침대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며 한 차례 가볍게 심호흡했다.

“…괜찮아. 어차피 사귀게 되면 다 할 일이었으니까.”

웬일로 은별이답지 않게 작심을 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애초부터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작심을 하면 확실히 행동하는 타입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망설임이란 건….

“…꺄아아아악!”

있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은별. 평생 구하지도 못한다는 야동을 삭제해버린 행위가 이제 와서 미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심으로 구슬퍼 하던 민국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은별에겐 그를 온전히 품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떡해야 하지? 어떡해야 해!’

혼란스러움이 지속되다 보면 체력이 빠진다. 체력이 빠지면 기력이 빠지고 기력이 빠지면 사람은 곧 침착하게 된다. 은별은 그렇게 서서히 침착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수 초 후 침착해진 자신을 통감하며 은별은 민국과의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이 녀석이랑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단 말이야….’

바야흐로 민국과 은별이 처음 만나던 때로 돌아간다. 방송에서 키배를 하다가 서로 상처를 주는 말을 하자 대놓고 한 판 붙겠다고 선언했던 은별.

‘너 진짜 만나면 죽었어! 가만 안 둘 거야!’

‘행~ 여자가 때린다고 해서 이 천하의 현대왕이 질질 짤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지 여편네야.’

‘아 그래? 나 운동하거든? 일반 여자랑 똑같은 데미지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무슨 사건이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은별은 몹시 열이 받은 상태로 민국을 막 갈구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때도 시청자들이 은별과 민국이 싸우는 모습이 영 심상치 않자 논란을 잠시 동안 가져왔던 걸로 숙지된다.

민국도 은별의 갈굼에 여유로움을 서서히 잃었는지 그때는 이성을 잃고 똑같이 덤벼들었었다.

‘오냐 좋다! 어디 한 번 이 몸이 한 번 대적해주도록 하지! 나의 강렬한 포스에 쥐새끼가 되어 기죽어 보거라 이 여편네야.’

‘자꾸 여편네 여편네 할래? 딱 봐도 오타쿠 같이 생겼을 주제에 하는 행동은 싹수가 없다 못해 싸가지 바가지네!’

‘네 다음 못 생긴 오덕녀.’

그때 방송을 시청하던 시청자들도 역시 현대왕 빠와 남고딩 빠로 갈려서 엄청난 사투가 있었다. 한창 유명세를 자랑하던 두 비제이가 만나자마자 초면부터 싸움질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싸움은 결국 현피로 합의되어 현실에서 만남을 갖게 되었고, 실제 초면으로 뵙게 된 두 사람은….

‘네가 현대왕?’

‘네가 츤고딩?’

‘…츤고딩이라 부르지마!’

두 사람은 실제 현피를 뜨게 되었다. 그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에….

‘그래서 그 후에 어찌저찌 되고… 내가 언제부터 녀석을 좋아하게 됐지?’

초면에 민국을 만났을 때는 은별도 굉장히 놀랐었다. 방송에서 남들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던 그 막무가내 비제이가 설마 이토록 잘 생기고 훤칠한 남자였다니 말이다! 지나가는 남녀노소 사람들 불문하고 모두가 한 번씩 흘긋 쳐다보고 지나갈 정도로 민국은 스팩이 뛰어난 남자였다. 그리고 그건 은별도 매한가지였다.

워낙에 사교성도 좋고 외모도 뛰어난 탓에 은별도 남자들이란 꼬리표가 항상 이리저리 붙어 다녔다. 어찌 보면 천상 여자와 천상 남자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맞아, 그때부터 였구나.’

침대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은별은 지난 날, 민국의 플래그에 꽂혔던 그 날의 기억을 되새겼다.

‘당신은 내꺼라능!’

‘이, 이거 놔 변태야!’

민국과 만난 지 한 달쯤 되던 날, 은별은 대학교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때 대학교 같은과 학생 중에 늘 은별의 뒤를 쫓아다니는 더러운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늘 은별에게 달라붙어 대시를 줄창 하곤 했었다. 하지만 은별은 그때 워낙 남자에 관심이 없었고 자기 할 일 하는데만 집중했기 때문에 연애를 원하지도 않았었다.

‘못해! 은별쨔응! 내 것이 돼라능! 내 천본앵이 되라능!’

‘시, 싫다니까! …도와주세요! 누구 없어요?!’

집까지 앞으로 5분은 걸릴 위치였고, 밤 길거리였기 때문에 사람도 없었다. 은별은 긴급함을 느끼는 얼굴로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이! 날 자꾸 무시한다면 은별쨔응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능! 받으라능!’

이윽고 정신병자에 가까운 그 남자가 은별이에게 손짓을 하려던 찰나였다. 은별은 그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면서 찔끔 눈을 감았고 그때…!

‘큭큭. 어리석은 닝겐.’

‘…….’

‘누, 누구냐!’

칠흑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던 은별은 그 목소리에 눈을 천천히 뜨게 되었고, 은별이에게 손짓하려던 남자 역시 당황하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벅 저벅…. 뒤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 은별은 그 절도 있는 발걸음 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훤칠한 키에 밤과 어울리는 검은 트렌치코트의… 한….

‘나는 배트맨.’

‘…….’

‘이 세상을 수호하는 정의로운 인물이다.’

가면을 쓴 또라이가 나타났다. 은별은 그 순간 ‘아 내 주위에 왜 이렇게 또라이가 많아진 걸까.’순간적으로 자기 인생을 자책했었다. 허나 은별을 덮치려던 남학생은 그 또라이가 어지간히 포스 있게 느껴졌는지 식은땀을 잔뜩 흘리면서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배, 배트맨 주제에 우리 사이를 갈라 놀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능? 가만두지 않을 거라능!’

‘후후후후! 어리석구나 닝겐. 과연 닝겐답게 어리석구나 닝겐!’

그때 또라이는 아주 좋은 라임을 가지고 있었다. 이윽고 오타쿠 남학생이 ‘나닛?!’하면서 놀라는 표정을 지을 때, 또라이는 검은 코트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 봐라!’

‘그건…!’

‘그래, 휴대폰이다. 난 이것을 이용해 내 지식의 힘을 사용했다. 이제 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지.’

휴대폰을 보는 남학생은 경기를 일으킬 듯이 크게 질린 표정을 지었다. 식은땀 범벅에 눈빛은 공포에 휩싸인 모습 그 자체였다. …그렇다! 검은 트렌치코트의 또라이가 들고 있는 휴대폰 액정에는…!

‘112!’

‘내 지식의 힘! 필살 공권력을 사용했으니 네 놈은 이제 죽은 목숨! 도망칠 기회라면 지금 뿐이다!’

‘이, 이이이익!’

남학생은 여전히 땀을 흘리면서 긴박한 얼굴로 은별과 그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곧 자신의 위기감을 절감했는지 몸을 돌려 후다닥 도망가는 모습이었다.

‘두, 두고 보자!’

‘하하하하하! 언제든지 덤벼라! 기다려줄 테니!’

도저히 자칭 배트맨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간발의 위기에서 은별을 구해낸 한 남자. 비록 겉모습은 또라이에 그지없었지만, 은별은 그래도 두근거리는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준 또라이에게 감사 인사는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위험할 뻔했어요.’

‘그런가? 그럼 가슴 만지게 해주게.’

‘…뭐예요?’

또라이의 낯선 대사에 은별이 다시금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던 순간이었다. 또라이는 가면 속에 숨기고 있던 얼굴을 그제야 드러냈다. 이를 본 은별은 순간적으로 ‘아….’하고 놀랐다.

‘엣헴.’

‘…….’

‘올, 진짜 놀란 표정이네. 나 인거 아예 몰랐나?’

‘…서민국?’

‘그래. 나다. 잠시 볼 일이 있어서 이 근처 들리는데 네가 보이더라.’

동성 친구 생일 축하해준다고 근처에 들렸었다고 한다. 민국은 이젠 자취를 감춘, 악의무도한 녀석이 사라진 길을 정의스럽게 쳐다보면서 말했다.

‘근데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냐. 말투도 오덕체고 진짜 애니 속 오덕처럼 행동하네.’

‘…너도 만만치 않았거든?’

진심으로 답하는 은별이의 모습에 민국은 고개를 돌렸다. 늘 잘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의 모습은 어쩐지 더 잘 생겼다고 느낀 은별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그런 은별을 내려다보면서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럼 다행이다.’

‘…….’

그 후, 민국은 몰래 은별과 오타쿠 남학생이 혈전을 벌이던 영상을 촬영한 것을 은별이의 대학교에 건네주었다. 은별이의 학교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검토 후, 조용히 해결하기 위해 오타쿠 남학생을 정학시켰다.

물론 조용히 해결한다고 해서 퍼지는 소문을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같은 학급 대학생들에겐 그 오타쿠 남학생에 대한 소문이 전부 퍼졌고, 그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트린 건 물론 민국이었다.

…함께 해온 비제이로서 기본적인 의리는 지키겠다나 뭐라나.

‘…….’

그러나 그런 단순한 이유의 행동이었음에도, 은별은 그 날의 추억을 여전히 밝게 빛나는 태양처럼 가슴 속에 담고 있었다. 그 날의 추억은 그녀로 하여금 불안에 떨던 현재의 그녀 역시 안도하게끔 만들어주었다.

‘그래….’

은별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고개를 든 그녀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한 모습이었다. 다른 남자는 다 몰라도 서민국이라면… 자신의 소중한 처음쯤은 줄 수 있단 각오가 생긴 것이었다. 끼이익! 벌컥!

“하아, 하아!”

“…….”

그리고 그때였다. 은별은 고개를 돌려 거실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땀이 범벅된 모습으로 서 있는 민국이 보였다.

“은별아!”

“…….”

이윽고 민국이 그녀를 불렀고, 은별은 결심은 했으나 조금 굳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머지않아 민국이 힘들게 헐떡이면서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드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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