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흑마법사의 깜짝 놀라운 방문을 끝으로 아침이 찾아왔다. 민국은 거실 창문으로 비추는 햇살에 부신 눈을 비비적대며 천천히 일어났다. 어찌 된 게 두 여자의 품에서 잤건만 행복했다기 보단 영 악몽을 꾼 느낌이었다. 이윽고 상체를 일으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민국이었다.
“…….”
예나와 은별은 민국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그저 깨작깨작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는 은별. 반대로 애꿎은 옷깃이나 만지는 예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뒤늦게서야 자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는 예나였다. 민국의 여자친구인 은별과의 마주침에 그만 저도 모르게 폭주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망신이야….’
그리고 은별도 예나와 마찬가지로 거친 후회를 토로하고 있었다. 둘 다 한숨자고 나니까 확실히 이성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뭐, 다행이라 해야 하는 건가.’
어제 두 여인의 모습을 보았을 때 민국이 차라리 정상적이었으면 정상적이었지 비정상적이진 않았을 것이었다. 민국은 ‘웃차’하면서 이불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에 깨어난 걸 가늠한 은별이 홱하고 민국을 돌아보았다.
“…일어났어?”
“응. 잘 잤어?”
은별의 물음에 민국이 반문했다. 은별은 그저 창피했는지 얼굴을 조금 붉히면서 휴대폰만 깨작깨작 거린다.
“나야 뭐….”
예나 역시 민국을 돌아보고 있었다. 민국은 이번엔 예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치자 예나가 화들짝 놀라면서 옷깃을 깨작깨작 만지고 있는 손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예나야. 너는?”
“자…잘 잤어….”
“그래, 다행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한 민국은 배를 어루만졌다. 꼬르륵하고 배가 배고픔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마침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민국이 물었다.
“둘 다 배고프지? 배달 시켜서 먹을래?”
“…….”
“…….”
서먹서먹한 공기 속에서 은별이가 ‘그, 그러던가….’하고 대답한다. 예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도….’하고 대답할 뿐이다. 민국은 ‘하아.’하고 한숨을 내쉰 다음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벽에 붙어 있는 배달집 종이 중 하나를 빼서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배달 왔습니다!”
“네, 어서 오세요.”
2층 계단을 올라온 배달 아저씨를 마중 나가기 위해 민국은 현관으로 향했다. 이윽고 현관문을 열어 아저씨를 맞이해주자, 그는 가져온 자장면과 짬뽕을 거실 바닥에 나열하기 시작했다.
“…….”
그러다가 문득 거실 바닥에 다소곳이 있는 한 여인과, 새침하게 앉아있는 또 다른 여인을 보고는 말을 잃는다. 슬쩍 민국을 곁눈질하는 배달 아저씨의 모습에 민국은 빙그레 웃음 지으면서 돈을 건넸다.
“여기 계산이요.”
“아, 네. 여기 거스름돈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문을 닫은 민국. 거실 바닥에 놓인 자장면과 짬뽕을 양손에 들고 민국은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부엌에 있는 상을 거실에 펼쳐놓고 음식들을 위에 올려놓는다.
“자, 와서 먹자.”
“…….”
“…….”
민국의 말에 뜸을 들이던 것도 잠시, 허기진 배 때문일까. 서서히 좌우에서 민국 쪽으로 다가오는 여인들이었다. 두 사람은 얼마지 않아 민국이 손수 뜯어준 자장면과 짬뽕을 입에 담기 시작했고, 어젯밤 불티나게 싸웠던 것을 감안했을 때 그 음식들은 체력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후루루룩….”
그렇게 세 사람의 아침 식사는 의외로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 *
식사가 끝난 뒤 각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예나는 대학교를 갈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일단 집에 서둘러 들려야만 했다. 민국은 예나부터 집에 보내기 위해 그녀와 함께 집을 나와 마중을 가주었다.
“학교는… 어떻게 할 거야?”
“어제 결석한 건 사정이 있었거든. 교수님에게 가서 사정 말하고 봐달라고 부탁해봐야지.”
“오늘은?”
“가야지. 근데 난 수업이 오후에 있기 때문에 좀 늦게 갈지도 몰라.”
예나는 우물쭈물 거리면서 다음 말을 덧붙이길 어려워했다. 잠시 후 그녀가 상당히 미안하단 안색이 점철된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해 민국아….”
“…….”
“어제 내 모습… 네가 봐도 좀 이상했지? 정말 미안해.”
사실 처음 보는 모습이니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안 좋은 의미로 이상하진 않았기에 큰 거부감은 느끼지 않았다. 민국은 씩 웃으면서 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건 민국도 스스로 의식하지 않고 하게 되는 버릇적인 행위였다.
“…….”
예나는 갑작스레 손길을 받게 되자 눈을 감고 그 쓰다듬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손을 회수하고 말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해해야지. 소꿉친구인데.”
“…….”
소꿉친구. 그 단어가 어지간히 비수처럼 가슴에 콱 박혀왔다. 예나가 ‘만일.’하면서 다시금 운을 띄었다.
“여자친구 분… 그러니까 강은별 씨가 말이야.”
“어? 응. 은별이가 왜?”
참고로 은별은 민국의 집에 아직 남아 있었다. 두 사람 간에 할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나는 그 대화가 심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민국이 먼저 자신을 보내려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것도 있었다.
“무슨 짓 하면 나에게 말해줘!”
“엥?”
“그리고… 그 희귀병 때문에 혹시나 다시 문제가 생기면 꼭 말해주고….”
말미를 흐리고 있었지만 할 말은 다 했다. 민국 역시 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귓전에 전부 담았고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이던 민국이 곧 다시금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알았어. 만일 정말로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부탁할게.”
“…….”
예나는 조금 기운이 생겼는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돌아가는 민국의 사건은 끝나는 추세였다. 예나는 집으로 향하기 위해 전철로 향했고, 민국은 그런 예나를 배웅해준 뒤 그녀의 자취가 사라졌을 때 흔들던 손을 내렸다.
“어휴, 이게 무슨 일이라냐.”
아직도 어제의 정황에 대해 도통 모르는 민국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은별과 예나가 자신을 상품으로 신경전을 벌였다는 것밖에 없었다.
“돌아가서 은별이에게 물어봐야지.”
그리고 민국은 의문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막 혼자서 자장면 그릇과 짬봉 그릇을 봉지에 넣고 청소하는 은별이가 보였다. 민국은 거실 바닥에서 청소를 하는 은별이의 모습을 보고는 ‘웃차’하며 신발장에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왔다.
“…….”
“예나 데려다주고 왔어.”
민국의 말에 그릇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그릇이 담긴 봉지를 꼼꼼히 묶은 은별이 손을 때며 물었다.
“…넌.”
“엉?”
“상태가 어때.”
어제의 안 좋던 몸 상태를 떠올리며 묻는 질문이었다. 민국은 자신의 바지 속 팬티 안을 확인하고는 ‘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좋소. 정력 보충이 확실히 되었군!”
“…….”
“이제 임신 파티를 시작합시다. 애인이시여.”
“…저리 가 바보야.”
“어휴 왜 이러신답니까? 좀 더 완강하게 반응하셔야지요. 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답니까?”
미약한 발길질과 별로 호응 없는 반응에 민국이 진심으로 궁금하여 질문했다. 은별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
“한예나라는 애… 네 친구라고 했지?”
“어. 소꿉친구.”
“…그 애가 너한테 호감 있는 거 알아?”
“알지.”
고개를 끄덕이는 민국의 태도에 순간 황당한 얼굴을 짓는 은별이었다.
“알아?”
“어.”
“…이성적으로 호감 있는 걸 안다고?”
“당연하지.”
“이잇!”
다짜고짜 베게를 들어 민국의 머리를 향해 휘두르는 은별이었다. 그녀의 응징에 ‘으억!’하면서 얼굴을 가드하는 민국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신답니까 은별느님! 자중하시지여!”
“시끄러! 어떻게 나랑 사귀면서 여자관계도 제대로 정리를 안 해? 내가 어제 너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이 나쁜 놈아!”
“아이고야! 근데 그것도 어쩔 수 없어유!”
때리는 은별의 손목을 붙잡고 얼굴을 마주하며 말하는 민국이었다.
“예나가 날 좋아하는 건 예전부터 진즉에 알고 있었어. 근데 소꿉친구다 보니까 또 선뜻 마음을 거절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정말 신뢰란 걸 모르는 남자구나 너는!”
“엣헴! 뭘 모르시는 군요 아스팔트여. 소인은 어제 4P 사건 때도 여자의 맨살조차 건드리지 않은 남정네였소. 이미 그대의 남친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 조건 아니오?”
“…….”
베개를 내려놓은 은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역시나 그 사건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었기에 은별은 은근슬쩍 물었다.
“…그게 진짜 내가 그런 거라고?”
“으음.”
“옷을 벗긴 게 나?”
“그렇지. 이제 안 건데 넌 취하면 확실히 음탕해지는 버릇이 있는 거 같더라고.”
은별은 새삼 얼굴이 붉어져서 다시금 민국을 베개로 때렸다. 퍽!
“말도 안 돼!”
“히히힝! 말도 소리는 지르지요!”
“지금 장난할 때야!”
다시 한 번 베개를 휘두르려는 은별이었다. 그런 그녀의 손목을 굳세게 붙잡으며 민국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숨결이 가까이 닿는 위치에 그의 얼굴이 근접하자 은별은 ‘읏!’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붉은 얼굴을 약간 물리는 느낌이었다. 민국이 픽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너는 어제 날 지키기 위해 하룻밤 동안 머물렀던 거구나.”
“…….”
“그렇게 예나랑 같이 있는 게 불안하셨세요? 우쭈쭈!”
“이씨… 놔!”
붙잡힌 손목을 거세게 휘둘러 때어놓으며 은별이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옆얼굴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애인 사이니까 불안한 게 당연하잖아.”
“…….”
“일단은….”
씩씩거리면서도 감정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피력하는 느낌이 매우 귀여웠다. 필시 민국도 이런 그녀의 모습에서 큰 매력을 느껴서 고백한 것이리라. 그리고 찾아온 한참의 정적. 싱긋 웃는 민국과는 달리 어색하기 그지없던 은별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이제 됐으니까 나도 가볼….”
“어헛! 어디 가시려는거요 낭자.”
“…왜 그러십니까 병신님?”
“우리 오해로 인한 갈등도 풀리고 단 둘이 있는 기회가 생기었는데 이제 새로운 루트를 진행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3자가 우리를 구경한다고 가정하면 이제 그들도 슬슬 원할 겁니다.”
“…아주 쇼를 하시네요. 나는 비싼 여자라서 루트 가는 길이 쉽지가 않습니다. 미연시 루트도 잘못 가다간 데드엔딩으로 갈 수 있다는 거 아시죠 덕후님?”
그리고는 신발장에서 신발을 신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그런 그녀의 언동에 ‘엇! 진짜 가게?’하고 소리쳤다. 은별은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래야지.’하면서 신발을 신었다. 민국이 다시 그녀의 옷깃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야! 잠깐!”
“왜 자꾸!”
홧김에 은별이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민국은 손을 얼굴에 갖다대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너한테 밥을 여러 번 사준 적이 있잖아.”
“…….”
“그럼 너는 나한테 먹은 만큼 살이 찌게 될 텐데 그 살 중에는 분명 가슴살도 있고 가랑이 사이 살도 있겠지? 그렇다면 나에게도 너의 가슴과 그곳의 일정 지분이 있는 게 아닐까?”
“뭐래 이 병신은.”
당차게 문을 닫고 나가는 은별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에피소드는 방송 편입니다.
오늘은 한 편만 올리구요.
궁금하신 점들 이번 편에 댓글로 남겨주세요.
질의응답 편을 따로 준비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왕의 표본은 하루에 두 편씩 올라옵니다.(오늘만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