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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70화 (70/369)

70화

“설마… 또 그거야?”

통화를 받던 은별은 민국의 심상치 않은 신음에 놀라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며칠간 괜찮다 싶더니 돌연 이런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것도 아직 풀린 오해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실정에서 말이다. 은별은 잽싸게 고개를 돌려 벽면의 시계를 보았다. 어느 덧 시간은 오후 여덟 시를 지나 밤을 향하고 있었다.

“으으….”

오늘은 사건이 꼬일 대로 꼬여서 머리가 아픈 날이었다. 은별도 피곤하긴 몹시도 피곤했기 때문에 그냥 집에서 자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남자 친구 아닌가? 비록 그런 사건이 있었고 크게 실망했다 한들, 이제는 그게 전부 오해였다는 게 밝혀진 상황이었다.

“…정말! 서민국 바보!”

츤데레다운 발언과 함께 은별이 자기 방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을 허름하게라도 챙겨 입고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타다다닥! 빠르게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에 부엌에서 막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은별이 어머니가 돌아보았다.

“시간도 늦었는데 어딜 가려는 거니?”

“민국이가 잠깐 보재! 근처에서!”

“어머~ 애들이 빨라도 너무 빨라. 민국이는 널 소중하게 여기는 거 같으니까 너무 빨리 진도 나가지 마렴.”

“…그런 거 아니얏!”

어머니의 음흉한 발언에 은별이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다녀올게요!’라는 단말마와 함께 집을 나왔다. 후다닥 달리는 은별이는 역시 개인적으로 몸을 단련해온 사람답게 일반 여자보다 빨리 뛸 수 있었다.

‘죽지마 바보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려가는 은별이의 속내는 그러했다.

“으어어….”

괴롭게 신음하는 민국을 기를 쓰고 2층 현관문 앞으로 데려온 예나였다. 그녀 역시 땀방울이 온몸에 가득가득 맺혀 있었다. 무엇보다 자기보다 몇 십키로는 더 나가는 몸무게의 남자를 혼자 계단에서 업고 올라온 게 아닌가? 다리가 조금 후들거렸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민국아… 괜찮아? 정신 좀 차려봐.”

민국을 흔들면서 안부를 물었으나 반응은 없었다. 아니, 돌아오는 반응이라곤 그저 눈을 감고 ‘으어어’ 좀비 소리를 내는 민국의 모습뿐이었다. 예나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이러고 잇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고개를 당차게 저었다.

‘어차피 지금 여자친구를 불러도 늦을 거야.’

여자 친구의 번호도 모를뿐더러 민국의 휴대전화를 마음대로 뒤지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 부른다 한들 오는 시간 동안 민국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 아니, 사실 민국이 자기만의 것이 되길 바라는 독보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심리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후우우…….”

예나는 한 번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말이 소꿉친구지 서로 스킨쉽을 하고 놀았던 건 초등학생 때가 전부였다.

나이를 먹고 먹으면서, 서로가 이성이기 때문에 쉽게 건드려선 안 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신체적인 접촉은 늘 피해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하는 것이리라. 적어도 지금만큼은 민국을 위해서….

“…….”

예나는 민국의 한 쪽 손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자신의 가슴 쪽에 가까이 대려고 하였다. 하지만 타인의 손이 자신의 몸을 만지게 한다는 건 어찌나 어려운 일이던지, 예나는 한참동안 망설였다.

“으어어어….”

‘안 돼. 이러고 있다간 민국이가 죽는다고.’

넋을 놓고 있다간 정말이지 위험이 초래할 수 있었다. 예나는 눈을 찔끔 감고 있는 힘껏 자신의 가슴에 민국의 손을 갖다대게끔 했다.

“흡!”

물컹! 그리하여 처음으로 민국의 손이 예나의 가슴에 닿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민국 때문일까? 예나는 생각 이상으로 부끄럽거나 하지 않았다. 아니,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고 하는 일이라 그런지 마음가짐이 의사의 그것과도 비슷했다.

‘민국아… 꼭 살아야해….’

예나는 진심으로 기도했다. 아직 자신의 마음도 밝히지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민국이가 희귀병에 걸려 세상을 마감한다면 그보다 아쉽고 후회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건 첫사랑으로서, 짝사랑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꺄앗!”

근데 그 순간이었다. 예나의 가슴에 대고 있던 손이 순간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물컹 물컹. 두 어번 반복해서 만지는 그 행위에 예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떨리는 눈길을 가졌다. 민국을 조심스레 바라보자… 이상하게도 민국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습이었다.

“으음… 마시멜로잼….”

“…….”

“물컹물컹….”

죽자 살자 하는 판에서 민국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본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현실에서 의도한 행위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슴을 조물딱거리며 취한 듯 옹알거리는 민국의 모습에 지켜보던 예나가 못 참고 ‘풋’하고 웃어 보였다.

‘민국이한테도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가슴을 자꾸 조물딱거리니 조금 민망한 맘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 편으론 민국의 새로운 모습을 보니 낯설고 신선했다. 그렇다고 마냥 안 좋게만 보이는 모습도 아니었고 말이다.

‘여자친구는… 민국의 이런 모습도 진즉에 알고 있었을까?’

민국의 여자친구인 강은별. 저번에 찾아와서 쓰러진 민국을 치료해주었던 그녀가 바로 민국의 여자 친구가 되었다는 걸 예나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인정하기 싫다. 그의 가장 소중한 사람은 자신이 되고 싶었다.

“…….”

그런 독점욕이 예나의 또 다른 욕구를 일으켰다. 마침 민국은 병 때문에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눈도 감은 채 꿈나라에 허우적대고 있었고, 지금 이 타이밍이라면 예나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었다.

‘이게 비록 나쁜 짓이라 해도.’

이미 결심하지 않았는가? 예나는 저도 모르게 찬찬히 민국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슬로우모션처럼 움직이고 있었지만, 물러나는 건 조금도 없었다.

이윽고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일까. 예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림과 동시에 얼굴은 창피함에 붉어졌다. 입술이 막 닿을락 말락 하는 근접한 길이에서…. 저벅, 하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앗.”

“…….”

발걸음을 멈춘 상대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예나 역시 예상 못한 의외의 인물이 갑작스레 튀어나오자 심하게 동요하는 눈빛이었다.

상대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만 돌려 민국을 봤다. 희귀병으로 말미암아 기절해 있는 민국. 그리고 그런 민국을 덮치려고 했던 저 여자는… 얼굴이 익숙하다.

아마, 민국이 말하길 소꿉친구라고 했었지….

“…….”

땀을 뻘뻘 흘리면서 민국의 집 앞에 도착했던 은별은, 계단에서 멈춰 주먹만 불끈 쥐었다.

* *

끼이익. 투둑 투둑…. 툭.

기절한 민국은 그래도 가슴을 몇 분간 만져서 그런지 호흡이 조금 안정된 모습이었다. 현관 안으로 들여보내 방안 바닥에다가 내려둔 뒤 예나는 몸을 돌렸다.

“…….”

“…….”

신발을 벗고 막 거실 안으로 들어온 강은별은 그런 예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둘의 사이에서 알 수 없는 고요한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다만 그 향기가 결코 향기롭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한예나 씨, 맞죠?”

“네. …맞아요.”

은별이의 물음에 예나가 천천히 대답했다. 은별은 노려보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방금 그건… 어떻게 된 거죠?”

“…….”

예나는 마치 벌 받는 학생처럼 잠시 동안 침묵했다. 까놓고 말해서 예나는 민국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다. 그가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못 참고 그런 욕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이 결코 상식적인 선에선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놓쳐버릴 수도 있단 생각은 안 하나봐?’

불끈. 예나의 친구가 그녀에게 했던 소리가 다시금 떠오른다. 마치 되감기해서 재차 재생되는 듯한 그 느낌에 예나는 마음을 굳세게 잡았다.

“…뭐가요?”

“…네?”

“그러니까… 뭐가 말이에요.”

예나는 조금 정색하면서 반문했다. 표정은 정색에 가까웠지만 속은 사실 조금 떨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조차 이런 자신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하.”

그리고 이를 목도한 은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은별이 팔짱을 끼며 대놓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제 남자친구한테 하려고 했던 게 뭐냐고 물었어요. 가슴을 만진 거야 그렇다고 치고 얼굴은 왜 들이 밀었냐구요.”

목소리에 적기가 묻어 있었다. 전에 두 사람이 만났을 때하고는 많이 대조되는 분위기였다.

“그건 그쪽이 아실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요?”

“뭐, 뭐라구요…?”

“그리고 애인 사이라고 하셨죠? 방금 전에 ‘남자 친구’라는 발음에 억양을 강하게 주시던데…. 그렇게 애인 사이를 자랑스럽게 고집하시는 분이 남자 친구가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도 모르셨던 건가요?”

“그, 그, 그건!!! 오해가 있어서!”

“오해라고 한들 민국이는 위험했어요.”

차분하게 말하는 예나.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당황해서 잠시 동안 벙쪄 있던 은별은 다시금 기세를 잡기 위해 표정을 바로했다.

“그래서 지금 그쪽이 잘했다구요?”

“민국이에게 가슴을 대준 건 잘한 대처라고 생각해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래요! 내 남.자.친.구.가! 목숨이 위험하니까 도와준 건 고맙다고 생각해요!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쪽이 그렇게 뻔뻔스럽게 나올 수 있는 입장이라고 보이진 않는데요?!”

“제가 뭘 했다는 거죠?”

“키스하려 했잖아요!”

은별이의 버럭 외치는 소리에 예나는 순간 움찔하며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짐짓 태연한 모습으로 답하는 예나였다.

“제제제제제제제제제, 제가요? 잘못 보신 거겠죠.”

“……떨리셔서 말씀도 제대로 안 나오시나 봐요?”

“여여여여여, 여자 친구 행세도 똑바로 못하시는 분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라고 보이네요…?”

“후! ……소꿉친구라고 하셨죠? 우정으로서의 행위는 이해하겠는데 아무리 봐도 키스하려는 건 우정으로 보이지 않거든요?”

예나는 잠시 침묵했다. 결국엔 들킨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뒤로 빼는 것도 뭐했다. 부정 자체가 불가능한 광경을 목격 당하고 말았으니까. …그냥 손쉽게 납득하고 가는 게 빠를 지도 몰랐다.

“알았어요…. 그럼 사실대로 얘기할게요.”

“…….”

“저, 민국이한테 호감 있어요.”

“…뭐, 뭐예요?”

“그것도 당신보다 아주 많이!”

예나는 쏟아져 나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피력하듯 말이다.

“당신보다 제가 민국이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항상 함께 했기 때문에 뭘 좋아하고 무엇을 잘하는지도 알아요! 그러다 보니 늘 민국이를 옆에서 챙겨준 것도 저였어요!”

“무, 무, 무슨!”

“당신보다 내가 더 민국이를 잘 알고… 민국이를 잘 사랑해줄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 가슴도 작잖아!!”

“…뭐얏!!!”

마지막 말에 큰 데미지를 입은 은별이었다.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던 은별. 하지만 곧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그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팔짱을 끼고, 없는 가슴을 애서 돋보이면서 자신 있게 말이다.

“흥, 그래봤자 애인 사이는 전데요?”

“…….”

“그! 리! 고! 가슴이 저보다 좀 크다고 해서 당신이 잘난 줄 아시나 본데! 영양분이 전부 가슴으로만 공급되어서 뇌는 텅텅 비셨나 봐요? 아무리 가슴이 나보다 크면 뭐해! 영양분이 전부 그쪽으로 가서 매력도가 부족한데! 그에 비하면!!”

은별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날 봐요! 비록 댁보단 가슴이 작지만 그 영양분이 전부 제 매력도로 갔거든요. 그래서 민국이는 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아이에요~ 당신보다 제가 더 매.력.있.으.니.까!”

“이, 이이이이이잇!”

예나가 이를 바득바득 갈기 시작한다. 격노하는 현모양처! 처음 보는 모습이렸다! 이윽고 예나가 은별이를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당신 민국이가 밥 먹을 때 왼손 써요 오른손 써요?!”

“뭐…뭣?”

“거봐요! 모르잖아요! 민국이는 양손으로 밥 먹어요! 원래는 오른손잡이지만 왼손도 사춘기 시절에 단련되었다며 곧잘 사용했죠! 그런 것도 모르면서 지금 저한테 애인 행세를 해요?!”

“!”

화난 은별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그녀의 삿대질이 시작되었다.

“서민국이 착한 남자 같아?!”

“…네?!”

“쟤는 말이야! 아~~~주 변태야! 가슴이랑 다리랑 엉덩이를 좋아하는 아~~~주 지독한 변태라고! 그런 모습 한 번도 본 적 없지? 당연하겠지! 그건 오로지 여.자.친.구.에게만 보여주는 성적인 모습이니까!!!”

“이이이이이잇!!!!”

지고 싶지 않았는지 예나의 새로운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쉴 틈 없이 민국의 장점(?) 단점(?)을 자랑스럽게 꺼내놓으며 내가 낫다! 넌 아니다! 싸우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우다가 은별이가 마지막 카드라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소리쳤다.

“서민국 길이 몇이야!!”

“…길이요?!”

“그래! 길이 몇 cm일 거라고 생각해?! 한 번 맞춰봐!”

‘넌 절대 못 맞춰! 왜냐면 이건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라고 자부심을 갖는 은별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예나는 은별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으음….’하고 한참동안 고민했다. 승리의 미소를 취하며 은별이었다.

“10cm…?”

“틀렸어! 18cm야! 오죽하면 별명이 가정파괴범이겠어!”

가정의 비극을 낳는 가정파괴범. 허나 한 여자를 바라본다면 그것은 가정희망범이 되는 법이었다. 은별이의 외침을 수 초 동안 이해하지 못하던 예나였을까. 얼마지 않아 그 말을 해석한 예나가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였다.

“무무무무무무무무,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이 변태! 전 손가락 길이 말하는 줄 알았다구요!”

“흥…! 가정파괴범인 것도 몰랐으면서 좋아한다고 해? 교만도 유분수지!”

“시…끄러워요! 당신 같은 변태에게 민국이는 넘겨줄 수 없어!”

“저도 당신 같은 사랑파괴범에게 서민국 넘겨줄 생각은 없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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