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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69화 (69/369)

69화

시상식 사건으로 서민국이 파멸에 이르던 그 시간이었다.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와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한예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휴대폰을 봤다 말다하고 있어?”

“아. 아니야.”

참다못하고 질문을 던지는 맞은편의 상대에게 예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런 예나를 가늘게 뜬 눈으로 슬그머니 주시하다가 중얼거렸다.

“또 민국인가 뭔가 걔 신경쓰고 있었구나?”

“…….”

참고로 예나의 친구는 예나와 같은 학과가 아님에도 어쩌다가 대학교에서 친구 사이를 맺게 된 인물이었다. 머리는 예나처럼 길게 풀어 헤치고, 다리 노출이 조금 보이는 원피스를 입고 있다. 늘 단정한 옷으로 자신의 노출을 아끼는 예나와는 조금 복장이 달랐다.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야. 눈에 다 보이는데. 그렇게 걔가 여자친구 사귄 게 아쉬워?”

예나의 친구는 서민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다른 학과 학생들조차 서민국이란 이름을 절대 모를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그녀가 모르냐면… 바로 학교를 잘 나오지 않는 결석 횟수 많은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이참에 확 빼앗아 버리는 게 어때?”

“뭐어?”

“왜? 어차피 그렇게 신경 쓰고 마음 아파할 거 너 좋으라고 빼앗아버리면 되지.”

“…누구 좋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너 좋으라고.”

예나는 그저 고개만 내리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예나의 모습을 보며 머리 뒤로 팔을 깍지 껴 대던 예나 친구가 다리를 건들거렸다.

“참, 서민국인가 서성국인가 걔도 보는 눈 없지. 어릴 때부터 줄곧 옆에서 챙겨주고 지켜주던 여자애를 이렇게 배신할 수가 있나? 걔도 대충 네가 얼마나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

“아니다. 소꿉친구라서 더 그러는 건가? 막 볼 거 다 봐서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못 느끼는 거 아니야?”

도와주는 건지 아니면 깎아내리는 건지 실로 헷갈리기 좋은 말이었다. 예나는 다시 한 번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런 예나의 행동거지를 보며 예나 친구가 한 마디 더 말을 덧붙였다.

“아무튼 나라면 그러고 있진 않았을 거야. 네가 그렇게 좋아한다면 양심 같은 건 집어치워. 그리고 덤벼야지. 요즘 남자들 취향 독특해서 현모양처 같은 스타일 잘 안 통한다?”

자기 다리를 흘긋 보고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에 예나 친구는 자신감이 생긴 듯 가슴을 피면서 요염한 표정을 지었다. 예나와는 꽤나 상반되는 태도를 갖추는 친구였다.

‘독특한 취향….’

예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휴대폰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민국이 학교를 나오지 않노라면 항상 무슨 일이 있나 먼저 연락하는 습관을 들였던 예나였다. 그런 그녀가 오늘 민국의 결석에도 대응하지 못하는 건, 아마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는 고백 때문이리라.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예나는 한동안 스스로에게 자문만 하고 있었다.

학교가 끝난 뒤였다. 예나는 굳은 결심을 떠안고 지하철에 탑승했다. 한 번 민국이를 만나 대화를 해볼 생각이었다. …무슨 대화를 해야 할 지는 차마 자신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구멍이 뚫려 있을까 알아보고 싶은 마음 같았다.

‘잘 알아들어! 요즘 여자들은 자신감이야. 자신감 있는 여자에게 남자들은 크게 유혹을 당한다고. 넌 외모도 좋고 몸매도 꽤 있으니까 그걸 자신 있게 드러낼 필요가 있어!’

학교에서 예나 친구가 충고삼아 해주었던 그 말을 돌이켜보며 예나는 정말 자신이 괜찮은 여자인가 의문을 가졌다. 그때 누군가가 예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다.

예나는 스윽하고 고개를 돌려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보았다. 그러자 예나를 쳐다보던 남학생 두 명이 홱하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예나의 어여쁘고 순종적인 듯한 외모에 호기심이 끌렸던 모양이었다.

‘자신감.’

예나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면서 친구가 해준 충고의 말을 되새겼다. 이윽고 민국이 사는 지역에 도착한 예나였다. 전철에서 내려 개찰구의 화장실로 향한 예나는 거울을 보면서 시선을 내렸다.

‘넌 네 스스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몸매도 꽤 좋아! 특히나 그 바스트! 막 F컵이니 D컵이니 오바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슴골의 계곡을 뽐낼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있어. 그래! 현모양처의 분위기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가슴골! 이 얼마나 혁신적이니?’

예나는 은근슬쩍 자기 가슴으로 손을 가져가려고 했다. 하지만 돌연 자신이 있는 거울 쪽으로 다가오는 여성의 기척에 흠칫 놀라면서 손을 내렸다. 옆을 보자 마침 근처로 다가온 여성이 거울을 보며 진하게 화장을 하는 게 보였다.

…정작 예나는 저 여성처럼 자기 자신을 꾸미는데 자신감이 없었는데 말이다. 또각 또각.

“…….”

이윽고 여성이 사라지고 다시 홀로 화장실에 남게 된 예나는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천천히, 슬로우모션처럼 두 손을 들어 자기 가슴에 대보는 예나였다.

“…윽.”

상처 난 곳을 어루만지는 것도 아닌데 묘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 신음이 살아생전 처음 들어보는 야릇함도 서려 있었기에 예나는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운 얼굴을 짓고 말았다.

“여, 역시 이건 아니야.”

예나가 곧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손바닥을 내렸다. 역시 이런 건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곧장 화장실을 나왔다. 하지만 민국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돌리지 않는 예나였다.

“…….”

그리고 잡념에 휩싸인 채로 한참을 걸었을까. 예나는 어느새 민국의 집 앞에 도착했음에 ‘아?’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곧 걸음을 멈춘 채로 민국이 살고 있는 2층 집을 올려다보았다.

‘도착은 했는데….’

도착은 했으나 방문할 자신이 없다. 자신이 무슨 목적과 무슨 이유로 그를 본단 말인가? 그런 자문이 또 한 번 그녀의 자신감을 하락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냥 갈까….”

결국 한참을 그곳에서 머뭇거리던 예나가 그리 결정을 내리던 순간이었다. 쿠당탕탕! 돌연 들려온 큰 소음에 몸을 돌리던 예나가 화들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는 예나의 눈동자에 돌연 익숙한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막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듯 가슴 쪽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떠는 민국의 모습이었다.

“…민국아!”

예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위기를 체감하고는 후다닥 달려갔다. 민국은 ‘으으….’거리면서 격심한 고통만 느끼고 있을 뿐, 예나의 부름 소리도 듣지 못했다.

“민국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윽고 쓰러진 민국 근처로 도착한 예나가 볼성사나운 소리를 내며 걱정했다. 하지만 민국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는지 눈을 감은 채로 끙끙 앓는 모습이었다.

‘설마…?’

도래한 위기 상황일수록 아주 침착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녀의 장점이었다. 예나는 이전에 새민이라는 여자와 신경전을 펼쳤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때 강은별이란 작자가 나타나 갑자기 쓰러진 민국의 손을 자기 가슴에 포갰었다. 그리고 되살아난 민국이 말하길, 가슴을 한 시간 동안 만져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생명치가 채워진다고….

“…….”

민국의 상태를 보니 생명치가 떨어져서 괴로워하던 그때와 판박이었다. 즉 그는 생명치의 부족으로 죽음에 달하고 있는 것임이 확연했다.

“여자 친구는….”

예나는 민국이 아플 때 생명 보존을 도와주었던 여자 친구 강은별의 행방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핫’하고 눈을 크게 뜨다가 줄이며 잡념에 휩싸였다.

‘현재 데리고 있는 여자 친구보다 네가 더 소중한 사람이란 걸 각인시켜!’

예나 친구가 스스럼없이 투척했던 대사가 예나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었다. 잠시 후 민국의 여자 친구 행방을 떠올리려던 예나가 입술을 오므리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얼굴을 보였다.

“…….”

본래 양심과 철칙을 수호하는 인물이 그녀였지만, 사랑 앞에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예나는 쓰러져 있는 민국을 여자 친구 대신해서 도와주자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찌 보면 그녀에게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위기였기 때문에!

* *

“흐암, 피곤하네. 오늘 방송 일은 못하겠구만.”

은별이의 [산소 등시나] 메시지를 받은 이후였다. 민국은 벌써 밤이 되어가는 현재 시각을 확인하며 슬슬 컴퓨터를 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를 끄기 전 시상식의 결과에 대해 소감을 풀어놓는 시청자들의 댓글을 확인해보는 것은 놓치지 않았다.

[와, 말도 안 돼]

[혐이네]

[츤고딩님 추카추카해여! 역시 될 줄 알았음!]

[논란이 생겼는데 대상을 준다고? 말이 안 되지 않나?]

[닥쳐라 현대왕 남팬으로서 그의 여자 친구를 욕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시삭싱에서 대상을 받은 남고딩에 대해 이리저리 얘기가 불거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논란이란 게 그렇게 쉽게 사그라드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노답인 인간들도 진짜 많구만.’

어차피 오늘 방송은 체력도 없어 포기해야겠다, 워낙 하루아침 사이에 여러 일이 있었던 지라 민국은 졸려웠다.

‘은별이랑 오해만 풀고 바로 자야겠다.’

그리고 은별이의 통화가 오기를 기다리던 민국이었다. 호랑이가 제 말하면 찾아오듯이, 은별이가 마침 연락했다. 민국은 기다렸다는 듯 여유 있게 통화를 받으면서 하품했다.

“흐아암. 산소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우리 따사로운 강은별님. 누구보다 지구를 사랑하시는 그 마음, 실로 본받고 싶습니다.”

“…장난할 기분 아닌 거 알지? 얼른 이야기나 해.”

모든 게 오해였다 한들 아직 이야기를 듣지도 못한 강은별이 좋은 기분일 리 전무했다. 민국은 ‘그래그래.’하면서 눈을 비볐다.

“일단 오해부터 푸는 게 좋겠지.”

사람에게 갈등을 낳는 오해라는 건 참으로 다양하고도 종류가 많았다. 허나 민국처럼 4P를 통한 오해는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으리라. …이윽고 민국은 4P 사건에 있던 정황을 정확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유이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한 치도 빠짐없이 말이었다.

“그렇게 된 거야.”

“…그럼 옷이 벗겨져 있던 건? 덥다고 해서 속옷까지 전부 벗었을 리는 없잖아? 무엇보다 나는 잘 때 속옷은 입고 자고….”

“오, 그거 좋은 정보네. 메모해둬야지.”

“…미친 놈.”

“자, 그럼 이제 그 의문에 대해서 해결해줄까나? 이유는 간단합니다 츤고딩님. 바로 님이 벗긴 것이죠.”

잠시 정적.

“…뭐?”

다소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에 서민국은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님이 벗겼음.”

“…….”

은별이가 ‘하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거짓말질이야?”

“헐 거짓말이라니요. 지금 내 입이 솔로몬보다 지혜스럽고 솔직한 건 공기에 떠다니는 산소도 아는 사실입니다.”

“웃기네! 내가 옷을 벗겼다고? 너랑 다른 여자들까지 다?”

“어.”

“하! 내가 그런 짓을 왜 해요. 상식선에서 생각해봐도 옷을 다 벗기는 술버릇 같은 게 존재할 리가…….”

말을 잇던 그녀의 말미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민국의 말을 들었기 때문일까? 돌연 보이지 않아야 할 잔상이 묘하게 보이는 걸 은별은 느꼈다.

‘벗길 거야 헤헤.’

“…….”

은별은 믿고 싶지 않았다.

“떠오르셨능가 음란여왕?”

“…….”

“참고로 이불에 묻은 피는 내 코피야. 서라에게 크로스라인 맞고 난 거더라.”

전체적으로 어제의 정황이 전부 떠오른 건 아니었지만, 민국의 이야기를 통해 모텔에서 자신이 놓던 그 훼방은 은별도 조금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차마 말 못할 수치심을 안겨주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된다구!’

속으로 비명을 질러 보았지만, 그렇다고 지나간 현실이 부정되는 건 아니었다. 민국은 다시 한 번 거하게 하품을 쉬었다.

“아무튼 이게 유이 씨에게 들은 이야기고 나도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해. 모텔방 아주머니에게 부탁해서 CCTV도 보았는데 그때 내 모습을 보아 상당히 취해 있었거든. 그 와중에 니들 옷 다 벗기고 있을 여유가 나에게 있을 리 없잖아.”

“…….”

“물론 못 한 게 좀 아쉽지만.”

“뭐어…?”

은별이가 조금 기가 막힌 듯 목소리를 내던 그 순간이었다. 여유롭게 이야기를 진행하던 서민국이 돌연 ‘컥’하고 비명을 질렀다.

“컥! 커헉!”

“…뭐야, 왜 그래?”

“이, 이러… 커헉! 서 설… 쿨럭!”

“…서민국? 뭐, 뭐야… 설마… 또……?!”

민국은 짜릿하게 아파오는 가슴의 통증에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비틀비틀 거리면서 잽싸게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방도에서 은별이를 부르지 않고 바깥을 나간 건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선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구나!’

흑마법사가 며칠 전 시상식까지 가슴을 안 만져도 된다고 했던 그 말을 떠올리며, 민국은 늦었다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무의식 중 발을 헛디뎠고, 그만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쿠창장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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