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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66화 (66/369)

66화

유이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취를 감춘 시간으로 돌아간다. 유이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민국은 몹시도 휘청거렸다. 먼저 의자에 앉은 은별이 맞은편 의자에 앉는 민국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계속해봐.”

“…….”

“아까 하던 거 계속 해보라고.”

서라 역시 자리에 앉는 모습이었다. 은별의 음성은 몹시도 진지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세상 어느 여자가 일부다처제를 호응해주겠는가. 민국은 ‘어, 그러니까.’하면서 잠시 뜸을 들였다. 나름 눈치를 보면서 의견을 피력하는 민국이었다.

“너도 내 애인이 되고 서라도 내 애인이 되고, 유이 씨도 내 애인이 되는 거야.”

“그래서?”

“나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거지! 세 사람 모두 내 아기를 임신하고! 나와 부유하게 사는 거야!”

은별의 눈빛이 한층 예리해졌다.

“그래서?”

“그, 그래서라니요?”

“그게 끝이야?”

“으음… 결혼 할 때 주례를 누가 봐줄지 의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리고 결혼 순서도 정해야 할 것 같고.”

민국의 장난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은별은 재촉하듯 얘기했다.

“또?”

“…….”

“계속해봐, 어디.”

휴화산이 등을 지고 있었다.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화산은 머지않아 뜨거운 용암을 분출할 것 같았다. 요컨대 은별은 한계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사랑합니다 은별 님.”

“…….”

“부디 내 청혼을 받아주세요.”

결혼까지 하자며 청혼을 하고 있다. 은별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고개가 맞은편의 강서라에게로 향했다.

“넌 저 제안에 동의해?”

“나, 나님이요?”

고개를 끄덕이는 은별이었다.

“그래. 저런 정신병원 수석환자 같은 놈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냐고.”

“어엇… 그, 그러니까… 나는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한 적도 없고… 제안을 안 받아들이겠다고 한 적도 없는 그저 간만 보는 걸 좋아하는… 마치 정치인 같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 으헤헤….”

은별의 급작스런 물음에 몹시도 당황했는지 서라는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하아’하고 한숨을 쉬며 은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이만 가볼게.”

“…….”

“역시 오늘 대화하는 건 안 되겠어.”

일단 오늘은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늘 아침의 일은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현명한 생각이었고, 서로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이 주어져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자리를 뜨려는 그녀의 손목을 민국은 붙잡았다.

“뭐해? 놔.”

“이대로 널 보낼 수는 없어.”

민국은 닭살스러운 멘트를 하면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은별은 갑자기 무엇을 하려는 건가 싶어 이를 지켜보았다. 잠시 휴대폰을 뒤적이던 민국이 이윽고 무언가를 키고는 다시 은별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민국의 수중에 있는 휴대폰에선 노랫소리가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

[아!!!!직! 너~를 위이이이 해애애애~ 바보처럼 살아가는데~]

노래 제목 : 브라운아이즈소울 -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지금 장난할 때야?!”

퍽!

“으앗! …야 이 여자야! 어쩔 수 없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어쩌고 자시고 전에 일부다처제 같은 걸 진지하게 생각한 네 두뇌가 굳었단 생각은 안 드니?! 이 근육 두뇌 말기병 환자야!”

BGM이 꽤나 장난스럽게 들렸는지 민국의 종아리를 걷어 차버리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종아리를 붙잡고 한참동안 뛰어다니다가 재차 은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이고 다리야… 아니, 야 잘 생각해봐. 나도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그래서 현재 나온 최선책이 그것이렸다?”

은별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실 민국의 입장도 헤아릴 수 있었다. 그 딴에서도 이 상황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아직 은별의 기억 저 편엔 어제의 정황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만일 서민국 스스로가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괜히 애꿎은 민국만 욕을 먹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은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신의 감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매사에 헌신적인 여성이었다.

그것이 좋아하는 상대라면 그 어느 여성보다도 현모양처처럼 책임지고 행동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독차지하고 싶은 독점욕과 더불어 성욕(?), 그리고 질투심도 매우 심했던 것이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만일 정말로 한 자리에서 다른 여성들과도 잠자리를 가졌던 거라면! 은별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자신의 독점욕이 마음을 콕콕 쑤셔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다. 잘 생각해보니, 이미 어제의 전후사정을 기억하고 있는 인물도 없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은별은 아직 민국을 좋아하고 있었지만… 지금이라면 아직 뒤로 리플레이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헤어지자.”

“어?”

“헤어져.”

옆에서 자리에 앉아 지켜보던 강서라 역시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이 대사와 관련된 서민국은 오죽하겠는가.

“싫어.”

“…….”

하지만 서민국은 진지한 표정으로 완강하게 거절했다. 은별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헤어져.”

“안 돼!”

“헤어져!”

“싫다니깐!”

“나도 싫어!”

웅성웅성. 주변 사람들은 식당에서 소란스럽게 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은별의 입장에선 꽤나 눈치가 들 수밖에 없었지만, 서민국은 그런 것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헤어지는 건 좀 아니잖아.”

“…고작 이런 일? 4P가 어떻게 고작 이런 일이야!”

“진짜 했는지 안 했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안 했다고 확정 지을 수도 없어!”

“처녀막 확인해보자!”

“…야 이 미친놈아!!!!”

어쩐지 개그스러운 멘트들이 오가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이때, 충격적인 사건의 진실을 안고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인영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일어난 급작스런 상황에 얼굴에 물음표를 새기고 있었다.

저벅 저벅…. 이윽고 두 사람의 근처로 다가가자 서라가 이를 발견하고 유이에게로 투다다닥 달려온다.

“으헝헝 강간느님!”

“…….”

“큰일났음! 저 사람들 돌이킬 수 없는 짐승의 행위를 하려고 해여! 좀 말려주삼! 나의 힘으론 버틸 수가 없음!”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사지만 유이는 눈앞의 광경을 목도하니 얼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오해해서 헤어지려는 상황임을 말이다.

“…….”

하지만 유이는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다. 그 사건의 진상이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기억의 조작인지 확증인지는 분간할 수 있었다. 너무 급작스럽게 떠올라 자신조차도 당황한 게 상당했지만….

“…저.”

이제 사건을 해명하여 오해를 풀 때가 되었다고 유이는 생각했다. 그녀만이 이 상황을 착하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히든카드였다! 믿져야 본전으로 입을 열어 얘기를 꺼내려는 그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선천적으로 작았다.

“이제 너랑 끝이야! 내가 그런 부분까지 일일이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란 말이야!”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어! 같은 집! 같은 방에서! 같이 자고 깨면!”

“…시끄러! 노래 부르지마! 노래도 못 부르는 게!”

“저기….”

“헐! 나 노래방에서 항상 90점씩은 나오는데!”

“그러니까…….”

“아무튼 나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헤어져! 나도 너랑 사귀었던 거 없던 거로 할 테니까!”

“아니, 처녀막을 가져갔는데 어떻게 헤어져!”

은별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노려보던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그것은 실망감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필사적으로 붙잡으려는 서민국을 보며, 은별이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몰랐다.

“정말 최악이야…….”

“…….”

“말이….”

은별의 발언에 잠시 뜸을 들이던 것도 잠시, 민국은 포기하지 않고 자기 가슴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래! 나 최악이야! 하지만 너만은 책임져야겠어!”

“죠….”

“아니, 이제 끝이야. 붙잡지마.”

그리고 은별은 몸을 홱 돌려 식당을 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분주한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은별은 얼굴을 가리고 식당을 나가는데만 최선을 다했다. 막 손님들을 일일이 상대하던 직원 한 명이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정답게 얘기했지만 무시하고서 말이다.

“야! 이 여편네야!”

하지만 민국은 질세라 그녀를 따라 나갔다. 식당을 나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길거리에서 민국은 다시 한 번 은별을 붙잡았다. 은별은 민국의 얼굴을 쳐다도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리 가. 난 바람 피우는 남자랑 연인 될 생각 없으니까.”

“바람 피우는 게 아니야. 책임 있게 행동하려는 거야.”

“책임 있게? 네가 뭐 어떻게 책임 있게 행동할 건데!”

결국 참다못한 은별이 홱 손을 들었다. 하지만 민국은 이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얼굴을 마주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지.”

“…….”

민국은 진심이었다. 은별도 진심이었다. 다만 서로가 낳은 갈등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아니 사실 지켜보는 유이가 있었기에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하….”

‘방법’이란 단어가 상당히 웃기게 다가왔는지 은별은 참다 참다 못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방법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네가 돈이 있어? 물질적으로 부유해? …그래, 만일 결혼한다고 쳐! 저기 두 명 포함해서 나랑 연인이 된다고 쳐! 그럼 네가 셋 다 먹여 살릴 수나 있을 것 같아?”

“흠….”

“애초에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을 해야지! 아무 생각 없이 대뜸 얘기하지마! 이래서 내가 너랑 사귀면서도 불안불안했던 거야!”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하며 어떻게든 민국을 몰아내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국은 오히려 침착해진 얼굴이었다. 머지않아 은별이 ‘하아, 하아’거리며 격분을 쏟아냈을 때, 과묵히 입을 닫고 있던 민국이 말을 하였다.

“만일.”

“…….”

“만일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있어?”

거칠게 호흡하던 은별의 얼굴이 울상 아닌 울상으로 변하고 있었다. 허나 민국은 보다 진지해진 얼굴로 묻고 있었다.

“만일 내가 의도적으로 그런 짓을 한 게 아니란 게 밝혀지면.”

진지한 그의 물음에 은별은 한참동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론 포기하고 싶다고 하는 은별이었지만, 사실 그녀는 아직도 민국을 좋아하고 있었다. 여기 모여 있는 세 여자 중에서 제일 많이 말이었다.

“만일 내가 저기 두 여자를 덮친 게 아니라면, 다시 받아줄 수 있겠어?”

“…….”

“나를 다시 좋아해줄 수 있겠냐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는 은별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상반되게 은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몰라….”

“…….”

“나도 모른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상 붙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한 서민국은 ‘그래?’하면서 가슴을 폈다.

“좋아! 그럼 내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 뒤 너에게 다시 찾아가기로 하지!”

“…….”

“후후. 그땐 진짜 나에게 처녀막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여자 히로인의 몸을 노리는 악당마냥 대사를 내뱉으며 서민국은 당찬 표정을 지었다. 확신할 수 없었지만 서민국은 어느 정도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절대 어젯밤 세 여자를 덮치지 않았단 사실을 말이다! 그 까닭은 머지않아 밝혀질 테니 기대하시라!

“…….”

은별은 갑작스레 자신감에 찬 서민국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편으론 그 자신감의 예상이 부디 적중되길 마음 한 켠으로 간절히 바랐다. 이윽고 은별이 몸을 돌려 매정하게 자취를 감췄을 때일까. 서민국은 자신감 있는 얼굴도 잠시 ‘후우’하고 한숨을 내뱉게 되었다.

어쩌다 졸지에 이런 난처한 입장이 되어버렸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

이윽고 식당에서 나온 서라가 조금 걱정스런 눈빛으로 다가왔다. 비록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보이던 두 사람의 모습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것이다. 하지만 민국은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야.’하면서 멋진 남자 주인공처럼 허세를 부렸다. 그리고 그런 서라를 따라서 유이 역시 근처로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

“아, 유이 씨.”

“저기….”

“후~ 위로하시려는 겁니까? 됐습니다. 저는 이 정도 위기에 쓰러지는 남자가 아닙니다. 사스를 물리치는 김치 같은 남자니까요.”

“…그러니까.”

“괜찮습니다! 저 이래봬도 현대왕입니다! 수많은 여자를 울리고 여자의 사랑을 콩닥콩닥 뛰게 만든 사랑 사건의 장본인!”

“이건 말이….”

“당신의 풍만한 그 마음처럼 저 역시 넓은 마음을 가진 인물이란 말입니다! 더 이상 저를 동정하려 한다면 당신의 그 가슴에 안겨 울어버릴 테니 이쯤에서 그만하시죠!”

ㅅㅂ.

“아, 그리고 서라야. 너 혹시 시간되냐?”

“…응? 왜 그러삼 형.”

“이제부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러 가게.”

서라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건의 진상데스?”

“그래.”

서민국은 진지한 표정으로 주름 진 옷깃을 다잡았다. 그리고 한 걸음씩 천천히 옮기기 시작했다.

“내 이 사건의 진상을 반드시 파헤쳐주겠어!”

사건! 모텔에서 있던 날!

============================ 작품 후기 ============================

다음 에피소드, 명탐정 현대왕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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