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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61화 (61/369)

61화

‘망.했.다.’

서라는 생각했다. 망했다고. 망해도 아주 망했다고. 도래한 위기를 구구절절한 변명으로 곧잘 모면했건만, 몇 시간 채 되지 않아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참고로 그녀는 화장실 칸에서 나오며 바지 끈을 조여매고 있었다. 아무리 남자 차림을 해도 결국엔 여자였기에 골반 부분이 허한 것이 티날 수밖에 없었다.

“…….”

마침 은별은 독수리 발처럼 부리부리한 눈매로 서라를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자세히 관찰하는 은별의 사고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서라는 뭔가 납득시킬 만한 변명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허나 상황 통찰력이 남들보다 뛰어난 그녀라 할지라도 이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등등, 여러 잡다한 문장을 속내로 중얼거리며 서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결정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결국엔 방송 컨셉 그대로 밀어붙여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님이 왜 여깄음?”

“…….”

“헐! 여기 남자화장실 아니었음?!”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변명을 시도한 시간도 너무 길었다. 좀 빨랐더라면 용납시키기 좋았을 것을. 허나 서라는 뒤지지 않았다. 제 발 저리는 도둑이 뻔뻔하기는 정부만하다고, 뉴스에서 보아온대로 뻔뻔함의 극치를 연기하는 서라였다.

“으앗! 그럼 나 여자 화장실에서 볼 일 본 거? 헐! 님 이거 비밀로 해주셈! 진짜 말하면 안 됨! 이건 비극이야!”

“…….”

“나 가보겠음! 절대 말하지 마셈! 대가를 원한다면… 3, 3P쯤은 해줄 생각도 있음!”

은별이 입을 열새도 없이 후다닥 화장실을 도망쳐 나오는 서라였다. 아주 제대로 의심 당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의심을 달고 생활할 팔자였다. 이따가 2부 시상식 때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지 조금 불안이 가기도 했다.

“야.”

그때 민국은 시상식장에서 사람들과 즐거운 담소 시간을 가졌다. 이따금씩 ‘현대왕 님이시죠?’하고 노골적으로 팬이라며 들이대는 이들도 있었는데, 싸인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민국은 가수도 아닌데 싸인은 무슨 싸인이냐며, 예의 바르게 거절하고는 나중에 시간 되면 합동 방송이나 한 번 해보자고 제의했다. 그들 딴에선 오히려 그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었기에 당연히 승낙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마침 민철이 개인적으로 부름을 던졌다.

민국이 뭐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왜?”

“진짜 걔 남자야?”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하냐?”

‘흠….’하고 팔짱을 끼며 침묵에 잠기는 민철. 그런 그의 모습에 민국은 살짝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들킨 것일까? 의외로 민철이 이 녀석, 눈썰미가 상당히 좋은지도 몰랐다. 평소엔 그런 것 같지 않으면서도 쓸데없는 부분에선 근거 없이 날카로웠으니까.

“야, 아무래도 나 말이다.”

민철이 용기 내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와 더불어 화장실에 갔다 온 서라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민철이 곧장 입을 다물었고, 민국도 의자에 재차 편안하게 자세를 가꾼 후 물었다.

“잘 보고 왔냐? 가정 폭력범 2세여.”

“형이 알려준 드라군 자세로 볼 일을 보고 왔지. 아주 흡족했음.”

드라군 자세…. 그리 중얼거리던 민철이 머지않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호들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민국은 이 녀석이 기어코 약이라도 빨았나, 하는 눈빛으로 민철을 쳐다보다가 또 다른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왜소한 풍채에 훤칠한 키를 소유한 양복 차림의 남자 한 명이 일로 오고 있었다. 그가 용무를 가진 상대는 다름 아닌 서라였다.

“안녕하세요. 잠시 따로 자리 좀 가질 수 있겠습니까?”

“흠. 저 말인가요?”

“예.”

서라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서라는 슬쩍 민국을 돌아보았다. 민국이 짐짓 웃음 지으며 얘기했다.

“갔다 와.”

“…….”

대답을 듣고 평온했다면 거짓말이었다. 일시적으로 마음이 아렸다. 허나 별 다른 걱정없이 답한 것임을 알았기에 서라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겠음. 따라오셈.”

이윽고 썸씽을 목적으로 접근한 남자가 수긍하고 서라의 뒤를 따랐다. 유유히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국은 턱을 괴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허나 옆에 있는 민철은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 못했다.

“야. 저거 놔둬도 괜찮아?”

“뭐가?”

“저거 척 봐도 남자 꽃뱀 같은데 놔둬도 괜찮겠냐고.”

별 이상한 걸 신경 쓴다 생각하는 민국이었다. 허나 듣다 보니 뭔가 요상한 부분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민국은 슬쩍 고개 돌려 민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너 설마….”

“…….”

빤히 주시하는 민철을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민국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너 게이였냐?”

“뭔… 소리여! 시방!”

“아! 망했다! 내 친구 중에 홍석천이 있었다니!”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절규하던 민국이 제지하듯 손을 뻗으며 얘기했다.

“전에 같이 목욕탕 가자고 했던 것도 나름 목적이 있었구먼? 내가 비누 줍기를 바랐냐!”

“아니라니깐…!”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하고 듣지 못하게 중얼거리는 민국이었다. 대충 감이 왔다.

민철이 이 녀석이 뭐 때문에 이토록 혼란 중인지 말이다. 요컨대 서라에게 상당한 호감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게 이성적인 감정으로 변할 뻔했는데, 그녀가 남자라는 이야기를 듣자 정체성에 혼란이 와서 내면적 갈등을 취하고 있는 것. 민국은 ‘쩝.’하고 입맛을 다시면서 불쌍한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말해주기도 영 그렇고.’

무엇보다 서라가 원치 않는 일이다. 절대 타인에겐 비밀 발설을 허락지 않았고 비단 민국만이 그 중대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만일 서라가 얘기하라고 한다면?’

저도 모르게 자문한 순간이었다. 도무지 좀처럼 대답이 나올 생각을 안했다. 의외의 반응에 민국도 스스로 당황했다. 역시 사람이 혹자를 알아도 자신은 모른다더니, 그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헐. 뭐야? 나 설마?’

살짝 카오스에 휩싸이려는 찰나였다. 저벅저벅하고 비어 있던 옆자리를 누가 매웠다. 돌아보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은별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시늉을 해?”

“…….”

남은 알아도 스스로를 고찰하는데 취약한 민국이었다. 때문에 겉을 장식하기 위함에 착용하던 가면도 자문을 해결하는 순간 벗겨져 내렸다. 머지않아 수습하기 위해 민국이 급하게 드립을 쳤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인 줄 알았는데, 나와 똑같이 볼 일을 보는 사람이란 현실에 얄팍함이 느껴져서.”

“…뭐래.”

급조한 변명이었지만 나쁘지 않게 들린 모양이다. 이윽고 은별이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상대를 응시했다. 썸씽을 위해 일 대 일 자리를 의도했던 남성과 볼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서라였다.

“어떻게 됐냐?”

서라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상한 사람이었음.”

“뭐가?”

“내가 맘에 들어서 사귀고 싶다는 거임. 난 그 적극적인 행동이 맘에 들어서 받아들였음.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생긴 거임.”

“그게 뭔데?”

“내가 공을 하고 싶다고 한 거임. 난 항문이 아파서 수를 하고 싶진 않았음. 그래서 비누를 주울 때 그쪽이 줍고 내가 덮치는 쪽으로 제안을 한 거임. 그러자 그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못 알아듣겠다고 함. 그래서 난 말했음. 난 가정파괴범이라고.”

“올!”

당연히 유이를 비롯해 강철남 이외의 일원들은 모두 황당해했다. 서라를 잘 알고 있는 민국은 크게 맞장구 쳤고.

“그랬더니 갑자기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면서 물러나는 거임. 난 이해를 못했지. 아무래도 내가 남자인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임.”

“그런 것 같다. 아마 여기 시상식장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네가 여자인 줄 알 걸?”

“흠? 그런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표정을 짓는 서라. 그런 그녀가 무척이나 가증스럽게 보여 웃음이 나오는 민국이었다. 다만 은별은 왠지 모르게 사나운 눈빛으로 서라를 훑어보고 있었다. 살짝 이상함을 느낀 민국이 다른 일원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속닥거리듯 물었다.

“왜 그래?”

“…….”

하지만 은별은 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후반부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진행의원 유석호가 재차 단상에 올랐고, 마이크를 붙잡고 풀어진 장내의 긴장감을 다시금 조성했다. 과연 진행 역할을 한두 번 맡아본 솜씨가 아니었다.

노련한 분위기 조성으로 떠들썩하던 장내가 조용해졌으며 단상으로 모두의 관심이 끌어 모아졌다.

“그럼 남은 시상식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시상식이 거하게 치러졌다. 장내의 비제이들을 선정하여 게임도 진행했고, 각자 장기자랑을 돋보이는 시간도 드러냈다. 이외에 수상을 하고 수상소감을 듣는 둥, 한 점의 트러블 발생 없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럼 이제 마지막, 대상의 주인공을 뽑을 시간입니다.”

진행의원이 말했다. 민국은 꿀꺽 침을 삼켰다. 대상을 뽑는 시간이니 만큼 시상식 내부가 좀 더 육중한 공기로 가득 찼다. 스크린을 통해 후보들이 차례대로 등장했다. 민국(현대왕)과 더불어 은별(남고딩),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의 비제이가 대상 후보였다.

‘공동 대상은 없겠지.’

절대로 없었다. 지금까지 개최한 파뿌리 시상식에서 대상은 시종일관 한 명에게만 주어졌었다. 민국은 슬쩍 은별을 곁눈질했다. 언뜻 기대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대상을 바라는 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지금은 연인이 아니라 경쟁자이려나?’

그리 생각하던 민국이 피식 웃었다. 까짓것 대상이 그녀에게 주어진다고 해서 실망하겠는가? 조금 아쉬움을 갖겠지만 추호도 그녀를 원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랑과 경쟁은 별개인 것이다. 경쟁에서 지면 순순히 인정해주는 게 승부의 세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사람 됨됨이가 덜 됐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이윽고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장내의 묵직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이날의 주연이 누가 될지 궁금해 하는 눈빛이었다. 민국도 말없이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은별이의 손을 꽈악 잡게 되었다. 은별이 역시 그를 따라 손을 악착같이 붙잡는 모습이었다.

“오늘 대상의 주인공은….”

대상의 주인공이 적힌 종이를 중얼거리는 진행의원의 모습이 익히 눈에 들어온다.

“---!”

시상식은 그렇게 끝마쳤다.

“윽….”

아침 일찍 민국은 눈을 떴다. 어제 시상식이 끝난 직후 아는 얼굴끼리 모여 거하게 술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잔뜩 취한 얼굴로 비틀대며 근처 모텔로 왔던 기억이 있는데….

“…….”

해장국이라도 사먹어야겠다, 감안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민국이었다. 저도 모르게 경악의 감정이 눈빛에 담겼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아무리 변태의 황제라 불리는 그라 할지라도 이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대체 어찌된 거란 말인가? 의문의 답을 알아볼 새도 없이 눈이 다시금 주변을 훑는다.

총제적 난국이라도 벌어진 양 엉망이 돼있는 방 내부. 그리고 그 내부의 중심 바닥에 깔려 있는 하얀 시트. 덮고 있는 하얀 이불은 소중한 곳을 자극하는 게 아무래도 나체같다.

“…….”

그런데 문제는 나체인 사람이 한 둘이 아닌 것이리라. 민국은 완전히 정신을 가다듬고 누워 있는 이들을 살폈다. 하나 둘… 셋…. 자신을 제외하고 총 세 명. 그것도 모두 여자다. 그럼 모르는 여자?

“…….”

아니, 그것도 아니다. 모두 알고 있는 여자다. 그것도 심지어….

‘은별, 서라, 유이.’

그 세 여인이 나신이 된 상태로 하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걔 중에 한 두 명은 절반만 덮고 자고 있어 은밀한 부위가 선히 보인다. 민국은 뭔 일인가 상황 판단도 못하는데 저도 모르게 이불 아래에 진득한 느낌을 통감하고 속을 살펴본다.

“…….”

붉은 색이 이불 밑에 꽤나 짙게 채색돼 있었다. 척 봐도 누가 그린 것이 아닌, 인간의 몸속에서 나온 선혈임을 알 수 있었다.

“으음….”

그때였다. 누군가가 스르륵 덮고 있던 이불을 밀어내고 일어나고 있었다. 깜짝 놀란 민국이 그대로 그 상대를 바라보는데.

“…….”

머지않아 그 상대도 민국을 발견하고 시선을 멈추는 모습이었다. 가신 피로에 눈을 비비던 그대로 굳은 모습이었는데… 봉긋한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

얼마지 않아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서라가 색체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꺄아악!”

당연히 나온 건 비명 소리였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은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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