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58화 (58/369)

58화

<시상식>

한참 논란이 일었던 두 사람 간의 불화는 아이러니한 결말을 낳았다. 게시판에서 갈등을 고조하던 애청자들만 되레 우스워졌다.

트집 잡아 독설을 뱉는 게 취미인 악플러들도 혀를 내두르며 물러났다. 파뿌리 TV에서 벌어졌던 갈등 사건의 결말이 불러온 논란은 상당했다.

어찌 보면 두 사람 간의 불화로 시작된 논란보다 한층 드센 편이었다.

‘이게 뭐야? 우리만 쇼한 거잖아?’

‘지들끼리 사랑싸움 하는 걸 우리끼리 심각하게 받아들인 겨?’

애정을 유지하는 애청자와 배신감을 통감한 애청자 간에 심각한 말다툼이 있었다. 특히 남고딩의 방송국은 군말 없었다.

현대왕은 본래 컨셉이 병맛에 속하다 보니 넘어가는 숫자가 적지 않았다. 허나 남고딩은 단아하고 도도한 컨셉으로 지금까지 활동해왔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건수만 잡혀도 도무지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

이래서 사람의 첫 인상이란 게 괜히 중요한 게 아니다. 매사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면 무슨 짓을 하던 간에 태연히 넘어가지만, 평범한 사람이 미친 짓을 하면 무슨 일이 생겼냐며 코치코치 캐묻는 게 일반적인 사람의 행동었다.

물론 그 언행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선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에. 어쨌든 남고딩은 선한 컨셉으로 말미암아 그런 부작용을 짊어지게 되었다.

‘실망이다 남고딩.’

‘여자라고 그간 봐주었더니 어휴 ㅉㅉ 이렇게 뒤통수를 치냐?’

‘너처럼 얼굴 안 보여주고 목소리로만 그러는 애들보다 더 나은 애들 훨씬 많아.’

가슴을 헤집는 비난들이 거셌다. 구경 중에 있던 민국이 그녀의 옆얼굴을 슥 곁눈질했다. 애써 인내하지만 눈시울이 살짝 붉어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가여워 어깨를 은근슬쩍 어루만진다. 그래도 상처받지 않은 척 꿋꿋하게 기대지 않는 모습에 민국이 피식 미소 지었다. 중후한 음성으로 위로했다.

“다 괜찮아질 거야. 원래 이 사이트에서 이런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잖아?”

“…알아.”

무려 4분의 1에 속하는 애청자들이 탈퇴했다. 적지 않은 수였다.

1~5위권을 고정하던 랭킹도 슬그머니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만약에 그녀가 처음부터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가정 하에 방송을 진행했더라면 랭킹과 애청자에 트러블이 발생하진 않았을 것이다.

허나 예쁠 것 같은 여 비제이가 모태솔로 컨셉으로 도도하게 나오니 그 환상에 빠져 맥을 못 춘 것인데, 삽시간에 치러진 폭탄 발언으로 환상이 깨져버렸으니 분개하는 건 당연했다.

“…….”

민국은 반복해서 그녀의 어깨살을 어루만졌다. 마지막까지 울지 않고 꿋꿋이 참는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은별이의 집을 나와 자기 집으로 돌아간 민국은 얼마 남지 않은 시상식을 떠올렸다.

‘이제 이틀 남았나.’

이틀 후면 꿈에도 그리던 대상 발표가 치러진다. 대상의 유력 후보자는 단연 현대왕과 남고딩. 누가 상을 받던 간에 서로 진심으로 박수를 쳐줄 것이었다.

허나 민국은 아무래도 자신에게 대상이 주어질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시상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남고딩의 애청자들이 대량으로 빠져나갔으니 말이다.

분명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될 게 불보듯 뻔했다.

‘사람들이 참 야박하긴 야박해.’

그토록 좋아했던 주제에 조금만 환상이 깨져도 거세게 비난을 한다. 맘 같아선 그들이 사는 집 곳곳으로 찾아가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면 디자인이 썩 좋진 않네.”

시상식 때 쓰고 갈 가면이 책상 위에 있었다. 그것을 들어 이리저리 훑어본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나오는 가면과 비슷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 가면과는 다르게 입을 제외한 얼굴 면적을 전부 가린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서라는 어떻게 한담?’

가면을 툭툭 건드리면서 상념했다. 남 비제이 콩딱지로 연기 중에 있는 강서라도 시상식에 필히 참여할 거라 의사를 밝혔다. 그것은 즉 슨, 숨기고 있던 성별을 이실직고하겠단 뜻일까? 민국은 아마 아닐 거라 단정 지었다. 전에 얘기를 듣기론 남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뭐, 그 녀석은 자기 할 일은 알아서 잘하니까 굳이 걱정할 필요 없겠지?”

두 사람이 한 방에 있던 것을 은별이 발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부분이 몹시 불안했으나, 가면을 쓰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많이 줄어들 것 같았다.

“빨리 왔으면 좋겠네.”

시상식 날을 상상하며 두근두근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우우웅하고 울려왔다. 누가 발신을 건 것인가 발신자를 확인해본 민국이 굳게 입을 다물었다. 예나였다.

“후우….”

실로 가슴이 탑탑했다. 세민이는 민국이 가슴을 만져야 살 수 있는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그를 기피하기 시작했는데, 예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전과 다르지 않게 보다 부드럽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해오고 있었다.

‘현모양처처럼 계속 옆에서 힘내주고 거들어주었는데, 졸지에 뒤통수 친 격이 되어버렸으니.’

민국도 예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 때는 진심으로 연모했던 적도 있다. 허나 지금은 어디까지나 소꿉친구 관계로서만 유지하고 있다. 귀중하게 여기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애매한 관계로 거듭 났달까? 그러다 보니 사람을 친숙하게 대하는 민국도 예나에게 많이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크, 끊어지겠네.’

상념에 잠겨 휴대폰 받는 것을 한참동안 깜빡했다. 끊어질세라 통화 버튼을 누른 민국이 운을 띄었다.

“어, 예나야? 무슨 일이야?”

“뭐해?”

반문하는 예나였다. 음성에는 여전히 낮은 묵직함이 곁들어 있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많이 용쓰는 느낌이었다. 민국이 짐짓 태연하게 발음했다.

“컴퓨터 키고 있었지.”

“학교 과제는 어떡하고?”

“엣헴, 내가 누구냐? 그런 과제쯤이야 순삭으로 끝내지.”

“그렇구나.”

말하는데 기계적인 느낌이 있었다. 예나치곤 많이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가 몹시 싫었던 민국은 자연스레 풀어보고자 발랄하게 소리쳤다.

“그래 그래. 근데 정말 무슨 일이야?”

“그게….”

“앗! 혹시 나랑 데이트 하려고 콘서트 표라도 끊어놓은 거 아냐? 하하! 그러면 안 되는데! 나한텐 이제 소중한 사람이 생겼단 말이지!”

“…뭐?”

참고로 예나는 가슴을 만져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병에만 걸린 것을 알고 있었다. 민국이 강은별과 사귀게 된 사실에 대해서 아직 하나도 모르는 것이었다. 애초에 파뿌리TV 비제이들에게만 정식으로 사귄다고 소문을 냈지, 학교에서는 아직도 그를 솔로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어?"

저도 모르게 자랑질을 하고 나서야 민국도 뭔가 실수했단 것을 느끼게 되었다. 비록 애인 사이로서 애인을 사귀고 있다고 말하는 게 강은별을 향한 도리라지만, 소꿉친구이자 이성적인 호감을 안고 있던 예나에게 그런 소리를 한다는 건….

“예나야?”

“아, 아니야. 나 이만 끊을게.”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뚝 찾아온 공허함에 민국이 입을 다물고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일순 말실수를 했단 느낌이 강하게 몰아닥쳤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이런 마음이었나?'

민국은 언뜻 열이 뻗쳐서 머리를 박박 긁었다. 이래저래 한 여자에게 마음을 주는 건 실로 힘든 일이었다. 특히 잘 생기고 인기 많은 민국에겐 말이었다!

“…….”

한편 예나는… 한숨을 쉬면서 휴대폰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녀의 짝사랑은 여러모로 고달픈 행진이었다. 부디 그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늘 곁에 있으려고 했지만, 오늘 용기 내어 건 전화에서 매우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만 느낌이었다. 속으론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이 싹트는 예나였다.

* *

날이 밝았다.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다. 일찍 일어난 민국은 대학교가 끝나자마자 곧장 시상식이 있을 건물로 향할 계획이었다. 시상식 시작 시간이 워낙 아슬아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가면도 챙기고 코트도 챙기고. 만약을 위해서 가면 하나 더 챙기고.”

이래봬도 자기 신분을 가리는 것에 철저했다. 파뿌리 방송국에서 그토록 막나가는 컨셉으로 질주했는데 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시상식에 갈 만큼 민국은 철면피가 못 됐다. 다만 그가 가면을 쓰고 간다 해도, 훤칠한 키와 뛰어난 비율로 시상식에서 관심을 받을 것은 이미 예약해놓은 당상이었다.

“여편네는 준비가 다 끝났으려나.”

전철에 올라타 앉아있는 도중에 은근슬쩍 은별에게 연락을 시도해보았다. 몇 차례 신호가 가던 끝에 졸린 음성의 것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밤 샜어?”

“아니… 음….”

“아 그럼 지금 일어난 거야? 몇시인 줄 알고?”

‘음… 몇 신데…?’하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민국이 피식 웃었다.

“너 오늘 아침 수업이지? 아마 늦었을 거야. 지금 출발해도 지각은 면치 못할 걸?”

“뭐라고…? …앗! 꺄악…!”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은별이 시간을 살피고 버둥버둥 댔다. 그 장면이 절로 상상되자 민국은 키득키득 웃었고, 살짝 토라진 은별이 ‘끊어!’하고 버럭 소리치며 통화를 종료했다.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민국은 생각했다.

‘참으로 귀여운 여자애야.’

알고 지내던 여자 애들은 많았지만 이토록 귀엽고 매력적인 여자애는 얼마 없었다. 때때로 까칠하고 깐깐하게 굴긴 하지만, 그만큼 사람 정이 많고 자기 가치관에 확고하다는 뜻이니까.

‘가슴이 작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이지.’

트러블을 은근히 발언하면서 대학교로 향하는 민국이었다.

이내 대학교 수업이 끝난 뒤였다. 슬그머니 찾아오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면서 민국은 역으로 이동했다. 옆에 있던 예나는 다소곳이 두 손을 모은 채 우물쭈물 따라 걷는 모습이었다. 역시 예전과는 다르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이 다소 끼어 있었다.

‘역시 사귄다는 걸 괜히 말했나? 아니야. 그래도 이런 건 확실해야 하는데.’

오늘 대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예나와 조우한 민국은 곧장 애인을 사귀는 것을 정식으로 고백했다. 하지만 사귄다고 고백했을 때 예나가 충격에 벙 쪘던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민국은 혀를 내두르면서 이 어색함에 침묵만 유지하다가 개찰구에 도착하자 입을 열었다.

“나 오늘은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

“아…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캐묻지도 않는다. 필시 여자 친구 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혼자 기계에 카드를 찍고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유유히 향하는 모습에 씁쓸함이 들었다. 머리를 박박 긁으며 민국은 중얼거렸다.

“일부다처제가 아닌 이 나라가 원망스럽네.”

그러한 관계로 민국은 일부다처제 나라로 이민이라도 갈까 생각했다. 아랍에 가서 아랍왕자가 되어 수많은 여자들과 알콩달콩! …은 얼어죽을, 비제이에나 집중하자.

민국은 반대편 기계에 카드를 찍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바로 지하철이 오고 있었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간 민국은 시상식이 있을 삼성동 코엑스로 향했다. 오늘 파뿌리 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비제이들이 그곳에서 모일 예정이었다.

============================ 작품 후기 ============================

조금씩 내용이 바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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