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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57화 (57/369)

57화

수업과 과제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모두 데이트에 할애했다. 민국도 오붓한 시간이 많아질수록 마음을 완고히 다잡았다.

‘은별이를 좋아하는 게 맞나?’

처음에 자문했을 땐 그토록 확신이 닿지 않았다. 내가 볼 수 없는 내가 있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날이 갈수록 그녀를 향한 애증이 꽃피웠고, 옆에 없으면 허전한 감각을 통감했다. 만날 때 마다 참지 못하고 입을 맞췄으며 포옹했다.

남자가 진정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몸을 섞고 싶지 않다 하던가? 그건 순 거짓말이다. 어디까지나 짝사랑에서 비롯된 대사이고, 민국은 짬이 날 때마다 그녀와 몸을 섞는 상상을 한다.

덕분에 하루 이틀 코피가 멈출 생각을 않았다.

“술집에서 도스 높은 술 한 잔 사줄 테니까 마시지 않을래?”

“닥쳐.”

술버릇으로 민국을 덮쳤다고 감안 중인 은별은 그 후 술병에 손도 대지 않는다. 애초에 술과 하염없이 거리를 두어온 그녀였지만 말이다.

민국은 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벗은 자켓 너머엔 나시티를 입어 어깨의 맨살이 곡선을 이루고 손까지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욕이 왕성한 스물 초의 남자로선 참으로 탐이 나는 부위다.

“우리 은별이. 먼저 영화보자며 제안하고, 기특한 거 보소. 엉덩이라도 두들겨줄까?”

“시끄러! 날이 갈수록 왜 이렇게 변태적이야? 입 좀 어떻게 다물 수 없어?”

“헐! 나처럼 신사적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신사는 씨불….”

쪽!

“우리 은별이. 욕하면 내가 뭐한다고 했지?”

“…씨불은 욕 아니거든?”

“또 욕하네.”

쪽! 실로 닭살 돋는 행각이다. 은별의 얼굴은 어느새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어있다.

민국은 매번 하는 짓임에도 항상 홍조를 이는 모습에 웃음 지었다. 이윽고 비스듬히 꺾은 팔을 내보였고 은별이 잠시 튕기는가 싶더니 팔짱을 껴 보인다.

이래봬도 두 사람은 어엿한 커플이었다. 그것도 동경의 눈빛과 관심을 받는 커플.

“저 아이 좀 봐. 되게 귀엽게 생겼다.”

“눈도 똘망똘망한 게 마음에 들어.”

“몸매도 은근히 죽이네….”

“저기 저 남자애도 봐봐. 되게 잘 생겼는데?”

“무슨 국내파 가수야 뭐야? 배우인가?”

“히야… 환상의 커플이네.”

그렇다. 환상의 커플. 환상(幻想).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만큼 뛰어난 비주얼을 가졌다. 일반 아이돌 가수들 저리가라 할 정도랄까? 비교를 하려면 얼굴 마담이라 알려진 배우급은 되어야 상대가 가능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수군거리는 민중 속에서 민국은 다시 한 번 입술을 겹쳤다. 반복되는 행동에 부끄러웠는지 은별이 버럭 외쳤다.

“그만 좀 해! 벌써 몇 번째인지 알아? 계약서에 적힌 조항도 이미 깨졌다고!”

“하루에 다섯 번 뽀뽀하는 거? 그거 이미 첫 날부터 깨졌잖아? 그리고 원래 조항은 깨지라고 있는 거야.”

“하! 그럼 뭐, 물건은 부서지라고 있나? 바다는 사라지라고 있어?”

“그런 극단적인 예시는 들지 말고.”

못 참겠는지 두 팔을 뻗어 그녀를 와락 안았다. 민국의 가슴팍에 붉어진 얼굴을 대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은별이 투덜댔다.

“이렇게 좋아할 거면 일찍이 고백하든가….”

“그땐 좋아하는 줄 몰랐지.”

“왜 몰랐는데?”

포옹한 손에 더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한 여자 신경 쓰기엔 아는 여편네가 너무 많았거든.”

“…….”

팍! 가슴에 손을 대고 뒤로 물러난 은별이 민국을 질투심 가득한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걔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 친구는 되지만 그 이상은 허락 안 해.”

“허허, 당연한 거 아냐?”

“예전에도 말했지만 바람 같은 거 펴면 죽을 줄 알아.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당연한 소릴 하냐며 민국이 고개를 두 번 까닥였다.

“그래 그래, 일부다처제는 허락돼도 바람은 안 된다 이거지?”

“누가 그런 소리래!”

“걱정 마라. 다른 여편네도 생기면 그때 너에게 정식으로 교제를 허락받을 테니까.”

도저히 거짓말로 보이지 않는 목소리.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지껄이니 얄미워 보일 수밖에. 눈매에 힘을 주고 노려보던 은별이 주먹을 올렸다. 허나 민국의 온기가 먼저 그녀를 덮었다.

거리를 두고 때리기도 전에 온몸을 감싸버리니 은별의 주먹도 아플 리 없다. 코트 속에서 투닥투닥 옆구리를 건드려보지만 아기 솜 같을 뿐이다.

“으….”

결국 제때에 지친 은별이 뜨끈한 품속에 눈을 감고 기댔다. 민국은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피식 웃음 지으며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요즘 여름도 여름이 아니었다. 이상기후현상이 반복되다 보니 가을처럼 시리고 추운 날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은별은 민국을 위해 노출이 심한 복장도 입지 못하고 두텁게 입는 날이 잦았다.

“영화 시간 다 됐네. 이 정도면 됐지?”

“…….”

영화 시작 시간이 될 때까지 코트 속에서 포근히 체온을 달래줬건만, 은별은 대답이 없었다. 아쉬움이란 의미를 알고 민국이 말을 덧붙였다.

“이따가도 이러고 있자.”

“…….”

말은 없었지만 느리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다. 여전히 상기된 얼굴 그대로인 게 아무래도 어지간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심 남자 친구의 온기를 바라고 있음에 민국은 미소 지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꼬옥 손을 잡고 영화관 안으로 들어섰다. 스크린 우측에 자리한 커플석으로 이동했다.

먼저 은별이를 앉도록 시키고 민국도 잇따라 앉았다. 어둡던 스크린에선 일정 시간이 지나자 광고가 시작됐다.

어둑한 분위기 속에서 앞 커플은 벌써 서로를 향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어딜 만져….”

“괜찮으니까 이리로 와봐.”

속닥거리며 서로의 몸을 더듬는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물론 민국은 4D 야동을 관람하는 것처럼 은밀한 눈동자로 구경했다.

옆에 있는 은별도 마찬가지로 구경 중이었는데, 상기된 얼굴로 흘긋 옆자리의 민국을 이따금씩 곁눈질하고 있었다. 그 행동을 반복하던 은별. 머지않아 앞자리에 흥미를 잃은 민국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졸지에 은별과 눈이 마주쳤다.

“…….”

눈동자가 커다래지고 빨리 시선을 회피한다. 그런 은별이의 귀여운 행각에 민국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터프하게 그녀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감각의 손길이 전해지자 어깨를 들썩이는 은별. 허나 민국의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옆으로 있는 힘껏 끌어당기는 완력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은별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혹시 입을 맞추고 저들처럼 몸이라도 만지려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민국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녀의 성적 판타지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보단, 그녀의 자존심과 체면을 살리는데 일조했다. 요컨대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만든 것이다.

“…….”

칠흑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띌 만큼 얼굴을 붉힌 채 민국을 곁눈질하는 은별. 그런 은별과 다시 한 번 눈을 마주친 민국이 물었다.

“뭐 다른 거 기대했어?”

“…아니거든?”

심술궂은 목소리로 투덜대는 그 모습 역시 귀여웠다. 민국은 은별이의 어깨를 더욱 바짝 당겼다. 은별도 어김없이 그의 품으로 깊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그렇게 유유히 영화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난 후였다.

“옛다, 커피 가지고 왔습니다 마님.”

영화관에서 나와 근처 빈 테이블로 이동한 민국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왔다. 그것을 곧잘 받아 보인 은별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의 연기를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고마워.”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고맙다고.”

은별은 사람을 향해 솔직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혹자는 고사하고 사귀는 상대한데까지 말이다. 허나 민국은 그다지 실망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은 몰라도 타인을 향한 눈매는 약삭빠른 편에 속했고, 은별의 행동 하나 하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해온 세월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맛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추위를 달래는 은별이를 향해 웃음 지었다.

이윽고 맞은편 자리에 착석하자 은별이 뜸을 들이다 질문했다.

“오늘 영화… 어땠어?”

“영화? 나쁘지 않던데?”

조숙하게 커피를 홀짝이는 은별이와 다르게 민국은 있는 그대로 커피를 들이마셨다.

“이야기도 훌륭했고 배우들도 깔쌈했잖아? 심지어 여자 배우는 너무 예쁘다 보니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더만.”

“여자 배우? …김태희?”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묻는 모습에 민국은 웃으며 끄덕거렸다.

“맞아. 하도 연예계에 관심이 없다 보니까 이름도 금방 까먹네. 김태희. 그 눈부신 여신님!”

“…….”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며 민국을 바라보는 은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머뭇거리며 질문하길 꺼려던 은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태희가 예뻐…? 아님… 내가 예뻐…?”

“…….”

드디어 올 게 왔다. 여자와 영화를 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질문! 영화에서 나온 여배우랑 자신 중에 누가 가장 예쁘냐는 질문이었다.

민국은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여자 친구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그게 현실(?)이 아닐 지라도, 그리 답하지 않으면 삐치는 건 고사하고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하기에.

“당연히 김태희지.”

하지만 민국은 후자를 택했다. 은별과는 오랫동안 함께 해온 사이였고, 서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은별이를 여인과 더불어 솔직한 친구로 인식하고 있던 것이다. 때문에 그런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물론 민국이 노린 수도 있었다.)

“뭐…?”

“야, 솔직히 김태희가 제일 예쁘지. 그 여배우를 외모로 따라가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거 같아?”

“…….”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빴다. 여자 친구이기에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살짝 화가 났을 때 나타나는 특유의 살쾡이 같은 눈빛을 지었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귀여운 걸까? 더욱 놀리고 싶은 얄미운 심보가 작동됐다.

“만일 세상에 은별이 너 열 명이랑 김태희 한 명이 있다고 해봐. 그리고 그 중에 한 쪽을 택해야 한다고 해봐. 내가 누굴 택할 것 같아?”

“누굴 택할 건데?”

“당연히 김태희지! 김태희는 천상의 외모고! 너는 그래도 길가다 보면 100분에 1로 만날 수 있는 여자….”

드르륵! 당차게 의자를 밀고 일어난 은별이 씩씩거렸다. 한창 놀려대기에 바빴던 민국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미소 지었다.

“화났어?”

“…….”

묻는 것에 답도 않는다. 그저 맹렬히 뒤돌아서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향할 뿐이다. 화난 게 분명함을 느낀 민국이 따라서 자리에 일어난 뒤 뒤를 쫓았다. 그리고 투벅투벅 걷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몸을 돌려 나른한 목소리로 사과한다.

“농담이었어. 미안해.”

“…….”

말없이 고개 들어 노려보는 그녀의 눈망울에 눈물이 또랑또랑 맺혀 있었다. 어지간히도 분한 모양이다. 김태희에게.

“당연히 소중한 사람은 너밖에 없지. 어떻게 김태희랑 비교할 수 있겠어?”

“…….”

“이 세상에 김태희 열 명이랑 너 한 명 중에 선택하라고 해도 난 널 선택할 거야. 그런 나 인 걸 알잖아? 초보처럼 왜 이래?”

그저 말없이 노려보는 은별을 꼬옥 안아주었다.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 울다간 산타클로스가 선물 안 준다?”

“나 어린애 아니거든…?”

“어이구! 음성에 울음이 섞여있네! 진짜로 선물 안 주시겠어!”

“…….”

퍽! 벌써부터 또다시 놀리고 자빠졌으니 얄미웠던 은별이 그의 복부를 한 대 갈겼다. 애교와 더불어 분노가 서린 그 주먹에 살짝 고통을 맞보며 민국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어깨를 밀어 살짝 거리를 벌린 다음에 키스했다. 사랑싸움 뒤에 맛보는 키스는 달콤하고 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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