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하물을 입에 담던 그 날에 관해 은별은 의혹을 제기했다. 그 시기에 문제되는 행위를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 음란한 손짓으로 민국의 그것을 바란 것일까? 골머리 썩히는 그녈 향해 민국은 저택 테이블에 도스 높은 술통이 있었다고 둘러댔다.
딱히 짚이는 게 없던 지라 결국 납득하는 눈치였고 민국은 안심했다. 정말이지 열성팬이란 작자는 훗날에 있을 문제점에 대해 미리 방안을 강구하지 않았단 말인가? 안도도 잠시 한숨이 쏟아졌다.
‘뭐… 여하튼.’
사귀게 된지 어연 5일이 경과했다. 주말 대낮에 파뿌리 TV에 접속했다.
불거졌던 두 비제이의 화제는 점차 열기가 식고 있었다. 민국은 오늘 중대한 발표가 예정돼있으니 약속된 시간에 들어와 달라 타비제이들에게 일일이 연락으로 부탁했다.
쿠왁은 저번 사건에 관해 심각한 얘기냐며 추궁했다. 허나 자세한 것은 들어와서 들어달란 말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얘도 어지간히 걱정하고 있었구나.’
다음으로 서라에게 연락을 취했다. 받자마자 염려 어린 음성으로 주도권을 잡고 질문을 쏟아내는데, 민국은 쿠왁에게 했던 말 그대로를 전달했다. 얼마지 않아 수긍하는 눈치의 그녀.
‘좋아, 이제 거의 다 모였군.’
신호가 가지 못한 나머지 비제이들은 스카이 라이프로 알려줄 계획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민국이 휴대폰을 들어 은별에게 연락했다. 뚜루루루. 볼썽사나운 신호도 잠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민국이 말했다.
“간다 츤고딩, 저장된 무기는 충분한가?”
준비가 됐냐는 의미였다.
“담고 있는 게 너무 많다고 얼른 빼고 싶다는데?”
“창고가 느끼는 포만감처럼 나도 너에게 포만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군. 요컨대 네 뱃속을 올챙이로 꽉 채워주고 싶다.”
“그리고 나랑 실사판 철권하고?”
“그건 자비 좀.”
준비는 끝났다. 이젠 계획을 순조롭게 이행할 때.
“그건 그렇고 참 궁금하네.”
“뭐가?”
“사람들이 너랑 나랑 사귀게 될 걸 생각이나 했을까??”
“…흥.”
답하지 않는 은별이었다. 삐져서가 아니라 부끄러워 그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연 두 사람이 사귄단 소식에 타 비제이들이 어떤 어벙한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그럼 시작하자.”
통화를 끊은 민국이 방송 시작 버튼을 클릭했다. 방송 전용 창이 뜸과 더불어 파뿌리 TV 홈페이지가 가려졌다.
캠으로 보여줄 메인을 현대왕의 팬아트로 장식했고, 방송창의 또 다른 시작 버튼을 클릭했다. 사람들이 황소 때처럼 몰려들었다.
5일 동안 잠적을 탔음에도 인기는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뜨거운 모습이었다. 논란에 호기심을 갖고 들어온 이도 잦았다.
“파뿌리 TV계의 뜨거운 감자. 현대왕의 방송 시작합니다.”
스스로를 뜨거운 감자라 칭하며 오프닝 송을 틀었다. 오늘의 오프닝 송은 지극히 평범했다.
“찾아라 비밀의 열쇠~ 미로 같이 얽힌 모험들~ 현실과 또 다른 세상~ 환상의 디지털 세상~.”
한 번쯤은 들어봤을 초특급 명곡, 디지몬 어드벤쳐의 오프닝이었다.
“레스고 레스고~.”
따라 부르며 즐기는 현대왕과 달리 채팅방은 난장판이었다.
[현대왕 님. 노래 그만 부르시고 그때 일 어떻게 됐는지 알려줘요.]
[이미지 완전 추락하니까 드디어 정줄 놓았나 ㅋㅋㅋㅋ]
[남고딩한테 사과하라고 ㅂㅅ 새꺄]
[먹방하면 다 용서될 줄 아는 현대왕]
가벼이 코웃음 쳤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팬들은 그렇다 쳐도 논란을 틈타 그를 욕하기 위해 들어온 이도 있었다. 현대왕은 오늘의 중대한 소식이 발표되고 논란에 비웃던 사람들이 어찌 변모할까 몹시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다시 한 번 인사드리죠. 현대왕입니다.”
[자기소개 필요 없으니까 빨리 해명하라니까 ㅅㅂ]
[사람 말이 뭐 같이 들리냐?]
“허허, 다들 왜 이렇게 열을 내고 그러십니까? 꼭 야동보다 엄마에게 걸린 사람처럼? 일단 릴렉스하십쇼 릴렉스 릴렉스.”
열불을 내는 사람도 있는 반면, 위트 있는 발언에 웃는 사람도 있었다. 가지각색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표출하고 있으니 현대왕의 능력으로도 어찌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아무래도 다들 남고딩에 관련된 일이 어떻게 풀렸나 궁금하신 모양인데 곧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려 보세요. 일단 타 비제이들 좀 모아보고요. 중대한 발표라서 말입니다.”
[설마…?]
[은퇴 소식?]
[안 돼 ㅠㅠ]
그의 방송국 게시판엔 이미 은퇴설이 한 번 폭풍처럼 휘몬 후였다. 애청자들은 하나같이 불안에 오들오들 떠는 눈치였다. 피식 웃으며 스카이 라이프에 접속한 현대왕은 접속 중인 남고딩을 확인했다. 그녀도 이미 방송을 시작한 모양이다.
[남고딩 님도 방송 시작했대요.]
[둘이 어떻게 된 거람?]
며칠간 뜨거운 감자라 칭해진 두 사람이 일정 시간에 접속하여 방송을 진행한다. 혹여 화해를 한 것은 아닌 가 추측도 생겼다. 하지만 발표될 사항은 그보다 더한 충격을 가져오리라.
“강강님, 들리십니까?”
“…….”
“전화를 받았으면 얘기 좀 해봐요. 신음 소리 내면 더 좋고.”
“들려요….”
우물쭈물 거리며 답해 보인다. 보아하니 현대왕의 지난 소식을 듣고 약간 꺼리는 모습이었다. 안 좋은 사건에 연관되기 싫은 것보단 어찌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난처해하는 모습이랄까.
“지금 저격 고수님도 있으시죠?”
“네….”
“그 분도 들어오라 해요. 그리고 알고 있는 유명 비제이 있으면 다 들어오라 하시고요.”
굳이 구면으로만 박수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축하할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물론 시청자들에겐 희소식보단, 좋지 못할 소식으로 와닿을 것 같지만.
“다 모이셨습니까?”
콩딱지와 쿠왁도 도착했다. 잇따라 초면인 비제이들도 방에 들어섰다. 허나 현대왕의 시점에서만 초면이지 그들은 하나같이 그의 닉네임을 들어봤다. 워낙 파뿌리 계의 거장이었고, 그로 인해 인터넷 방송을 꿈꾼 사람도 적지 않으니.
“잠시 기다려 보십쇼.”
이윽고 마지막 사람을 초대했다. 당연지사 방의 분위기는 서늘했다. 방에 초대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남고딩이었다.
[남고딩?]
[뭐야? 무슨 일이야?]
시청 중인 애청자들도 슬슬 머리에 혼란이 오는 모양이다. 현대왕은 웃음 지었다. 이내 남고딩이 통화를 받았다.
“아아, 들리시나? 암퇘지 여인이여?”
“그래 이 숫퇘지 새끼야.”
“허허 말이 거칠군, 역시 나의 여편네야.”
“흥.”
쌀쌀맞은 척 대응하는 그녈 뒤로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중대한 사항이 있겠습니다. 모두 귀 딱 열고 들어주십쇼.”
[꿀꺽…]
[대체 뭘까??]
애청자들도 경청했다. 그들 역시 이번 발표가 몹시 심상치 않은 것임을 직감한 모양이다.
이윽고 뜸을 들이던 현대왕이 발언했다.
“남고딩이 제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이 미친놈이?”
“이제 임신 3개월입니다.”
“야 이 미친놈아.”
“모두 축하해주십쇼.”
“축하는 무슨! 박수치지 마요!”
짝짝! 진짠 줄 알고 박수치던 비제이들이 으름장에 머쓱해진다. 현대왕은 피식 웃으며 솔직하게 발표했다.
“그건 아니고, 얘랑 사귀게 되었습니다.”
“…….”
첫 발언보다 충격이 크진 않았다. 그래도 충격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뭐라고?!]
“뭐?!”
[말도 안 돼!]
“진짜냐?!”
[으아니! 이럴 수가!]
“헐!”
[이게 다 비리를 감추기 위한 대통령의 수작입니다! OUT!]
모래성을 쌓다 방파제가 몰아쳐 무너졌을 때의 충격보다 컸다. 시청자들은 들이닥친 혼돈과 카오스에 해어 나오지 못했다.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몇몇 비제이들도 어안이 벙벙했다. 허나 현대왕은 진솔했다.
“야! 진짜냐? 진짜로 사귀는 거냐고?”
“어. 진짠데?”
“레알? 진짜 사귄다고? 너희 둘이?”
“어.”
추궁한 쿠왁은 말문을 닫았다. 곧 그의 질문 대상은 남고딩으로 전환됐다.
“정말인가요, 남고딩 님.”
“…그런데요.”
질문에 답하는 어조가 쌀쌀맞았다. 지난 사건이 있어 평소에 쿠왁과 사이가 좋지 못한 남고딩이었다. 이윽고 초면인 비제이들이 나섰다.
“하지만 현대왕님. 저번에 남고딩님이랑 그렇게 다투었잖아요?”
“사랑싸움이었습니다. 원래 사랑을 하기 전에 항상 그런 식으로 갈등이 있는 법이죠. 애니 못 보셨습니까? 순애물만 봐도 그런 갈등은 기본으로 나오던데.”
“대박….”
“대박이라고요? 아직은 아닙니다. 조만간 진짜로 임신 3개월이란 희소식을 들고 달려오겠습니다.”
“…자꾸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남고딩이 표범처럼 물어뜯을 듯이 물었다. 콩딱지는 아무 말도 안했다. 그녀의 존재감이 빈단 사실에 현대왕이 호명했다.
“딱지야?”
“아? 헛!”
와장창! 손에 걸친 커피잔이 떨어졌다. 귀를 찢는 소음에 깜짝 놀란 현대왕이 질문했다.
“딱지야? 괜찮냐?”
“소, 손이 삐끗했음! 하하! 둘이 사귀는 거임? 경사났네! 경사났어!”
칭찬하는 모습에 언뜻 어색함이 있었다.
“임신하면 나한테 먼저 알려줘야 함!”
“알겄다 자식아.”
현대왕은 마냥 웃음 지었다. 남고딩은 ‘자꾸 지네들끼리 무슨 소리 하는 거람….’하면서 투덜댔다. 얼굴엔 내심 훗날을 기대하는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습니다. 강강님?”
“…네?”
“님도 무언가 축하 소리 좀 해주시죠. 저격 고수님이랑 같이요.”
“축하 드립니다 현대왕 님.”
저격 고수는 곧잘 축하해줬다. 하지만 강강은 입에 물먹은 솜이 끼인 듯 무거웠다. 스스로도 왜 이러는 가 의문을 가졌다. 마치 커다란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끼인 느낌이었다.
[현대왕이 솔로에서 탈출을 하다니…. 이건 반역이다.]
[우리에게 솔로로서의 만족감을 주던 현대왕이 커플이 되다니! 이럴 순 없어!]
[죽어라! 두 번 죽어라! 세 번 죽고 계속 죽어라!]
[호성 치킨 가지고 배달 갈 테니까 이불 속에서 벌벌 떨고 있어라!]
별의별 개드립으로 솔로임에 울부짖는 시청자들이었다. 현대왕은 그런 시청자들을 달래기는커녕 깔깔거리며 멋지게 비웃었다. 물론 크게 불쾌함을 느껴 격노하는 이도 있었다. 몰락을 보기 위해 왔건만, 기쁜 소식을 갖고 오다니. 아쉽다는 듯 혀를 차며 물러간다.
‘그래. 나는 이렇게 해결됐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축하한단 소리를 받았다. 욕은 오래 살 만큼 먹었지만 늘 먹어오던 것이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허나 남고딩이 문제였다. 그녀는 여자이니 만큼 보유한 남자 시청자 수가 많았고, 이 정도에서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과연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찾아올 역경과 고난을 견딜 수 있을까?
‘정 안 되면 내가 옆에서 도와주자.’
커플이란 게 무엇인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짝이 생겨난단 의미다. 허심탄회하게 비밀을 풀고 하소연하고 달래며 사랑하는 것. 두 사람에겐 그런 의미의 짝이 생겼고, 의지하며 일반적인 위기는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
현대왕은 할 수 있는 만큼 그녀를 사랑해주자고 다짐했다.
“스, 스고이 데스네….”
하지만 희소식을 전달받고 통화를 끊은 강서라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휘청거렸다. 1톤짜리 쇠망치로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조여 왔다.
“왜, 왜 이런 담.”
충격이 가시지 않는 얼굴로 방을 나왔다. 어느새 그녀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