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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55화 (55/369)

55화

<너랑 나>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고백 후 민국과 은별은 정식으로 사귀었다. 지금은 커피숍 2층 안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의논 중에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민국은 한 가지가 아쉬웠다. 머지않아 입을 열었다.

“역시 일부다처제 건은 넘어갈 수 없겠어.”

“…….”

살쾡이 같은 눈빛으로 은별이 사납게 주시했다.

“그래서, 내 앞에서 지금 바람을 피겠다고?”

“그게 무슨 바람이야.”

당당하게 팔짱을 꼈다. 으름장을 놓는 은별에게 아주 당당하게 말한다.

“자고로 능력 있는 남자는 못해도 여자 세 명은 거느릴 수 있어야 된다. 고로 나는 두 명의 여자가 더 필요해.”

“닥쳐 히드라.”

움찔!

“…자신의 위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토사물을 뱉어 적팀을 죽이고 승리를 쟁취하려는 히드라의 희생정신은 위대한 것이지. 나는 그것을 존경해.”

“아주 쇼를 하시네요.”

“왜? 일부다처제 무시하냐! 이건 모든 남자들의 꿈이야!”

“됐고! 바람 펴는 순간 네 얼굴 다신 안 볼 테니까 알아둬!”

이틀째부터 벌써 싸우고 있다. 두 사람에게는 초기에 갖는 아리따운 연애의 로망이란 게 없었다. 이미 알 건 다 알고 볼 건 다 본 사이였기 때문에.

“그나저나 그 조건은 뭐냐?”

민국이 계약서라고 크게 적힌 종이를 가리켰다. 꾸준히 조항들을 적어나가던 은별이 다시금 노려보았다.

“뭐가?”

“거기 적혀 있는 그거.”

검지로 가리킨 조항의 내용을 중얼거렸다.

“여자 친구가 허락하지 않는 한 몸을 탐할 생각은 추호도 말라? 야, 이건 너무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성욕이란 게 있는데.”

“뭐가? 그럼 넌 처음부터 나랑 몸이라도 맞물릴 생각이었어?”

“응.”

“…너 몸 때문에 나 만나는 거니?”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게…!”

벌떡 소파에서 일어난 그녀가 불끈 쥔 주먹을 휘둘렀다. 해맑게 웃음 짓고 똑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민국이 그것을 막았다.

“어허, 왜 이러시나? 벌써부터 남자 친구에게 폭력을 사용하면 좋은 사랑 못 받아요.”

“지랄! 몸 때문에 만난다는 남자는 죽어도 사양이거든?”

“왜? 그래도 다른 남정네들처럼 감성적인 발언은 안하잖아? 본래 사람 사이는 솔직한 게 가장 좋은 거야.”

바득바득 이를 갈며 볼썽사납게 노려보던 은별이 한숨을 쉬었다. 진정하고 자리에 앉는 그녀를 따라 민국도 나른한 웃음을 보이며 소파에 앉았다.

“아무튼… 너한텐 절대로 손도 못 대게 할 거야.”

“흠흠.”

기고만장하게 팔짱을 끼고 은별이를 응시했다. 커플이 되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조항들을 순조롭게 적어 나가는 그녀. 얼굴이 참 예쁘다. 눈살을 비집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속 쌍꺼풀. 오똑한 콧대와 뾰족한 코끝. 반달처럼 자연스레 다듬어진 생기 있는 입술. 도저히 성형을 통해 나올 얼굴이 아니었다.

‘가슴이 작은 것만 제외하면 참으로 완벽하지. 이 애가 이제부터 내 여자 친구라니.’

솔직히 조금 실감이 안 났다. 항시 고백을 받아온 민국이지만, 본래 남자란 스스로 좋아하는 여자에게만 정감이 간다. 여자와는 다르게 기본적으로 큰 호감을 가진 상대에게만 정감을 느끼는 게 바로 남자. 예외도 있을 테지만 대개의 남자가 그렇다.

‘하고 싶다.’

그러다 보니 민국은 남자로서 그녀를 탐하고 싶었다. 본래 사랑하는 여성을 정복하고 싶은 게 남자의 자연스런 욕구다.

‘진짜 하고 싶다.’

결국 못 참고 민국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야.”

은별이 고개 돌려 다시금 사납게 쏘아본다.

“왜.”

“우리 교미하자.”

“…이 미친놈아.”

“왜? 교미랑 성교는 다른 거다? 성교는 남녀가 합의하에 하는 거고 교미는 동물들이 주로 하는 거로서….”

“우리가 동물이냐! 이 미친놈아!”

기어코 소파에서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지른다.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쏟아졌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 픽 웃음 지으며 손목을 잡고 앉게 만든 뒤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럼.”

쪽, 하고 입술에 입을 갖다 댔다.

“이건 되지?”

“…….”

은별이 살짝 홍조가 일은 표정으로 노려봤다. 새치름한 모습으로 그녀가 입을 열려 했다.

“누가 함부로 키….”

쪽!

“하지 말란 소리 안….”

쪽!

“그만하….”

쪽!

“그러니까!”

못 참고 그녀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러나 민국은 쉴 새 없었다. 쪽!

“…….”

결국엔 포기하고 흥분을 가라앉히는 은별. 민국은 ‘헤헤.’하고 해맑게 웃음 지었다. 천연덕스런 그 모습에 괜히 화를 낸 것처럼 민망함이 들었다.

“왜? 조항엔 키스하면 안 된다는 거 없었잖아?”

“…….”

이윽고 은별이 펜을 들어 빈 칸의 조항에 글을 깨작였다. 혹시 키스에도 제한 횟수를 걸려는 것은 아닐까? 머지않아 완성된 조항에 민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를 바라보자 애써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안막에 들어왔다. 민국은 씨익 웃었다.

‘하루에 키스 다섯 번은 기본으로 하기.’

오그라드는 멘트였지만 커플 사이에선 당연했다. 민국은 나머지 한 번을 그녀의 입술에다 장식했다. 쪽!

“…….”

뭐 이리하여 두 사람은 잘 사귀었다. 하루에 한 꼴로 티격태격 말다툼이 있었으나 커플의 일상에선 지극히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서로를 잘 알고 있었고, 건드려선 안 될 부분은 넘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방송은 어떡할 거야?”

은별이 퉁명스런 어조로 물어왔다. 사랑을 하게 된 그녀는 전보다 투덜거림이 잦아진 모습이었다. 뒤통수에 베개처럼 두 손을 대고 민국이 답했다.

“해야지.”

“…그 일은 어떡하고?”

아직 두 사람이 어질러놓은 논란은 풀리지 않았다. 현대왕과 남고딩의 방송국은 비난과 욕설 외 온갖 비판이 쏟아졌고, 돌아와 달라며 애걸복걸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해명하고 어떻게든 해봐야지. 이대로 은퇴하기엔 얼마 남지 않은 시상식이 아깝잖아?”

“음….”

고심하던 은별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무슨 까닭에선지 다시금 민국을 응시하였는데,

“또 왜?”

“…….”

차마 꺼내기 쑥스러운 발언이니 먼저 끄집어주길 바라는 의지였다. 하지만 아무리 민국이 약삭빠른 눈매를 가졌다 해도 사람의 마음을 읽는 초능력은 없었다. 갸우뚱거리며 의아해하는 그를 향해 은별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 우리가 사귀는 건…?”

“…….”

아무래도 방송에 알릴지 말지 의논하자는 것 같았다. 일정 시간 고민하던 민국이 반문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당연지사 은별은 침묵했다. 이런 어려운 문제는 남자가 스스로 결정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남자도 사람이었고 민국도 이 부분에 대해선 많은 고심이 잇따르겠다고 생각했다.

단둘이 좋기 위함이라면 파뿌리에 알리는 게 좋으리라. 허나, 그로 말미암아 따르는 부작용이 분명히 존재할 터였다.

특히 남고딩에게는.

“…….”

이래봬도 많은 남자 시청자들을 보유한 남고딩이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남자가 생겼단 발언을 듣기라도 해봐라. 환상을 품고 있던 남자들이 얼마나 가슴 찢기는 아픔을 통감하겠는가.

졸지에 현대왕은 파뿌리 TV에서 제일가는 나쁜 새끼로 거듭나겠지만, 예수 같은 포옹력으로 인내하고 견딜 자신이 있었다. 허나 남고딩은 어떠한가?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남자 시청자들이 배신감을 느끼며 떠날 것이고, 비제이 랭킹에서 끝내 하락될 위험도 적지 않았다.

“난 일단 상관없어. 가능하면 사귄다고 얘기하는 게 마음 편하겠지.”

민국이 진솔하게 발언했다. 숨기고 사귀는 사이는 이래저래 사정이 복잡하다는 걸 혹자를 통해 들어 왔었다. 쓸데없는 갈등으로 서로 기분 상할 일 없이 허심탄회하게 밝히는 게 좋으리라.

“나도… 그냥 그럴래.”

이윽고 은별도 동의했다. 많은 갈등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대견하게 생각한 민국이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기가 담긴 그의 정성스런 동작에 은별이 얼굴을 붉히고 눈을 감았다. 앞으로 있을 방송에서 두 사람이 알릴 소식은 예기치 못한 일을 갖고 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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