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나쁜 놈….’
은별은 사건 당일 날 새벽까지 이불을 촉촉하게 눈물로 적셨다. 정말이지 얼마나 울었는지 감도 안 온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장난을 쳤던 민국이 원망스러웠고 얄미웠다. 잠시나마 그에게 좋은 호감을 갖고 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아졌다.
이게 무슨 우스운 꼴이란 말인가? 어디까지나 그는 장난삼아 컨텐츠를 활용한 것뿐인데… 은별은 속내를 들킨 것 마냥 잔뜩 화가 나서 방송을 망쳐버렸다. 덕분에 파뿌리 TV 홈페이지는 지금 장시간 논란을 맞이하고 있었다.
남고딩과 현대왕의 관계에 대해 논의가 불거졌고, 사건에 관하여 그녀가 정말로 현대왕을 연모하는 것은 아니냐는 의견도 속속히 나오고 있었다.
‘다 망했어….’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구부린 무릎 사이로 얼굴을 숙였다. 절망의 기운이 등에 곳곳이 스며들어왔다. 몇 차례고 민국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을 생각은 없었다. 마음을 들켰단 사실에, 그리고 이용당했던 사실에 분하고 실망스러웠다.
“흑.”
결국엔 울음까지 터트렸다. 눈물로 새벽을 적신 다음 날이었다. 민국의 연락은 쉬도 때도 없이 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아예 수중에 꼭 쥐고 있는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진동에 결국 휴대폰을 꺼버렸다.
“…….”
은별은 이제 그에 대한 것을 전부 잊어버릴 생각이었다. 심지어 진행하던 방송도 슬슬 은퇴할 계획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언제쯤 은퇴할 것을 계획 중에 있었다. 그 일정이 이번 사건으로 좀 더 앞당겨졌을 뿐.
‘그래도 마지막으로 인사는 하고 접어야겠지.’
수업을 받으며 은별은 그리 작심했다. 오늘 부로 방송을 접을 것이었다.
“…….”
저녁 늦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은별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꺼두었던 휴대폰을 슬쩍 켜보았다. 액정에 빛이 들어왔고, 머지않아 노을 진 메인 화면이 드리웠으며, 통화 기록 스무 건이 눈에 들어왔다.
은별은 그 스무 건 중 부모님 건을 제외한 열아홉 건이 전부 민국에게 왔음에 ‘멍청이.’하고 중얼거렸다. 휴대폰을 닫고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지속하려는데 음성 메시지가 떴다. 이것 역시 민국에게서 온 것이었다.
“…….”
은별은 그 메시지를 개봉해볼까 망설였다. 괜히 줏대 있게 잡은 갈대가 사나운 바람에 흘러가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이윽고 확인 버튼을 눌러 음성 메시지의 내용을 귀에 담기 시작했다.
“야, 강은별.”
그이의 진지한 목소리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당연했다. 민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은별이에게 정색을 하고 소리 낸 적이 없었다. 요번 사건을 계기로 그리 낮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너 이거 보면 빨리 연락해라. 아무리 내가 너에게 피해를 줬다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휴대폰 끄고 잠수 타는 건 아니야. 최소한 정식으로 사과할 기회라도 주어야 할 거 아냐?”
놀고 있네, 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은 걸 꾸욱 참았다. 사과할 자격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자의 마음을 그토록 가지고 논 주제에. 민국이 한 짓은 여인의 소중한 마음을 관객들에게 웃음으로 판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튼! 오늘 약속 알고 있지? 나 네가 연락할 때까지 절대 아무 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거다! 진짜 죽을 각오하고 기다릴 테니까 이 연락 받는 즉시 찾아와!”
실은 오늘 민국과 만나 생명치를 불어넣어주는 날이었다. 하지만 은별이의 마음은 단호했다. 절대로, 추호도 갈 생각이 없었다. 만나게 되면 바로 울어 버릴 것 같았기에. 집으로 돌아온 은별은 식사도 않고 방안에 틀어박혀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오늘이 방송 마지막이란 사실에 복잡한 감정이 싱숭생숭 어우러졌다.
‘해야지.’
슬슬 시간이 됐겠다, 은별은 컴퓨터 책상으로 향했다. 하지만 벽면의 시계를 보고 멈칫하게 되었는데 뇌리 속으로 민국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 바보, 설마 아직도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워낙 고집불통하고 제멋대로 굴던 녀석이다. 왠지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머릿속에 강하게 빗발쳤다. 하지만 은별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로 안 갈 것이다. 무슨 일 이 생기든 이제 관심 안팎이지 않은가?
“…….”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은별은 어느 덧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스스로 왜 이러는지 정말로 한없이 부끄럽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인정하기 싫어도 그에게 호감 그 이상의 것을 느끼고 있는데, 들키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들키게 되는데, 본래 마음이란 이성의 통제예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하아 하아!”
결국 은별은 민국이 사는 동네까지 찾아왔다. 현재 시각을 확인한 결과, 민국의 생명치가 슬슬 하락 시점에 닿아 있었다. 서둘러야겠다 생각하며 발돋음을 지속한 끝에 그의 집에 도착했다.
‘난 정말 바보야….’
어느 틈에 이곳에 서 있는 스스로를 자각하고 은별은 다시 한 번 울상을 지었다. 왜 또 여기에 온 것인지, 암만 의문을 품어 보아도 인정하기 싫은데 답이 나올 리 없다.
이윽고 쇠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저벅 저벅…. 가능한 한도 내에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올라가는데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화들짝 놀란 은별은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불안하여 한 달음에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신발장에 닿았을 때,
“…….”
한 여인이 쓰러져 있는 민국의 손을 쥐어, 자신의 가슴에 포개고 있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녀는 보기에도 어린 나이 같았는데 얼굴이 굉장히 낯설었다. 아무래도 초면인 게 분명하리라 추측하면서도 은별은 기존과는 다른 마음을 느꼈다.
‘뭐야….’
그것은 텁텁함이었다. 항시 자신이 해주던 일을 다른 이가 대신하고 있단 사실에 중요한 역할을 빼앗긴 것 같아 절망감이 드리웠다. 이윽고 여인이 인기척을 느낄세라 신발장에서 자취를 지우고 한 달음에 계단을 내려가는 은별이었다.
* *
이로써 세 번째 위기를 맞보았다. 민국은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일찍이 찾아온 고통에 가슴을 쥐었고, 혹자에게 도움을 요청할 여유도 없었다. 그대로 숨을 거두어 세상을 하직할 줄 알았다.
‘살아있네.’
하지만 눈을 떴단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죽지 않고 살아있음도 자각했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지않아 들어온 것은 낯선 이목구비였다.
“일어났네.”
“…….”
민국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헐….’하고 놀랐다. 열성팬이 비릿하게 웃었다.
“하직할 뻔한 소감은 어때?”
“여긴… 웬일이죠?”
경계 어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상대는 민국의 희귀병을 고쳐준 장본인이었다. 허나 일정한 생명치를 손에 얻기 위해선 여성의 가슴을 만져야 한다는 조건을 건, 은별과 민국 사이에 끈끈한 연을 맺도록 만든 인물이기도 했다.
“너답지 않은데, 원래 방송을 할 때만 컨셉이 그리 구질구질한 건가?”
“…….”
“어제 방송은 녹방으로 봤어. 아주 큰 논란이 불거지고 있던데.”
이계로 돌아갈 방법을 연구하느라 생방을 찾아볼 시간이 없었다면서 그리 말하고 있었다. 민국은 살짝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속어로 쓰자면 좆망했어요.”
“좆투더망?”
말없이 민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응시하던 열성팬이 팔짱을 끼었다.
여전히 어린 매력이 난무하는 모습이었다. 열다섯 살짜리 얼굴로, 학교 교복이 잘 어울릴 듯한 몸매에 두툼한 로브를 착용하고 있었다.
베이지색이었던 머리칼은 연한 보라색으로 변색돼 있었고, 염색을 한 것 같진 않았다. 열성팬이 입을 열었다.
“생명치는 시상식이 있는 날까지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었어.
“흑마법인가요?”
“그래.”
“…저번에 흑마법은 일정한 조건이 걸려야만 완성될 수 있는 마법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가슴을 만져야 생명치가 증가한단 조건에 또 다른 흑마법이 관여할 수 없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내 열성팬… 아니 흑마법사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뻥이야.”
“…….”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 그런 조건이 달리면 무슨 일이 생길까 싶었고.”
살짝 화가 났지만 차마 무어라 할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돌이켜 볼 때 자기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었다. 평생 절하고 모자라도 될 판에 그런 조건을 플러스했다고 욕할 자격은 없었다. 하지만 한 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덕분에 전 한 여자애랑 인연이 끊기게 생겼어요.”
“그거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 내가 미리 수를 다 써두었으니까.”
민국이 고개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수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야.”
“…….”
아무리 보아도 나이는 민국이 우위였다. 그럼에도 입술은 좀처럼 경어를 회수할 생각을 안했다. 마치 그의 입술 또한 거부할 수 없는 흑 마법에 매료된 것처럼 말이다.
“그럼 난 가볼게. 이제 내 할 일도 끝났으니까.”
“또 어디 가시게요?”
“연구하러 가야지. 짬나면 네 방송도 보고. 난 너희 두 사람이 치고박고 다투는 게 보기 좋거든. 어느 한쪽도 은퇴 선언 따윈 하지 않았음 좋겠어.”
“…….”
그리고 무어라 얘기하기도 전에 흑마법사는 또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자기 할 말만 내뱉고 유유히 말이다. 혼자 남게 된 민국은 일단 한숨부터 쉬었다. 한 순간 강하게 조였던 가슴팍에 손을 갖다대보았는데, 도저히 아까 전의 아픔이 실재했던 것이란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어찌 됐든 다시 살아남았구나.’
참으로 기고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살아난 건 둘째치고,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단 사실에 속이 쓰렸다. 민국은 컴퓨터 전원을 키고 파뿌리 TV에 접속했다. 메인의 자유 게시판에선 비제이 현대왕과 비제이 남고딩 간에 일어났던 갈등에 관하여 여전히 의견이 불겄다.
‘일을 어쩐담.’
혀를 내두르며 이번 일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고자 생각하던 즈음이었다. 갑자기 우우웅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느닷없는 진동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민국은 그대로 눈을 크게 떴다.
‘강은별!’
통화를 건 발신자가 다름 아닌 은별이란 사실에 민국은 냅다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은별아!”
“읏….”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민국은 그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은별아, 왜 지금까지 전화 안 받은 거야? …일단 만나자, 만나서 대화해.”
“잠깐. 하악….”
야릇한 숨결 소리의 지속됨에 슬그머니 의아함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은별아?”
“…….”
배배 꼬는 이가 요염하게 숨결을 내뱉듯, 한참동안 작디작게 신음하던 은별이 중얼거렸다.
“빨리… 와….”
무슨 일인지 의혹이 생겼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조우해서 오해를 푸는 게 중요했다.
사과도 해야 하고…. 민국은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곧장 집밖을 나와 도로에서 택시를 잡았다.
저녁이 흘러 깊은 밤이 되었지만 시간은 안중에도 없었다. 마침내 탈것을 이용해 은별이 네에 도착한 민국은 초인종을 마구마구 누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저택의 현관이 열리고 은별이가 비틀비틀 거리며 잠옷 차림으로 다가왔다. 철문 윗틈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심장이 거세게 쿵쾅쿵쾅 거렸다.
달칵.
“은별아!”
이윽고 잠금이 풀리고 철문을 벌컥 열어젖힌 민국이 소리쳤다. 은별은 홍조가 짙게 그을린 얼굴로, 몽롱한 눈빛을 유지한 채 그를 응시했다.
이내 미안한 걸 아는지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는 민국. 그때 거칠게 ‘하아, 하아.’하고 숨결을 내뱉던 은별이 심장 소리를 들으려는 것처럼 그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얼굴을 묻었다. 깜짝 놀라 들썩였지만 얼마지 않아 진정한 마음으로 은별이를 포근히 안아주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민국아….”
“…응.”
차마 미안하단 말이 입 밖에 나오질 않아 옴짝달싹 못하던 상황이었다. 그의 품에 껴안겨 있던 은별이 느릿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살짝 벌려져 있었고, 그 속에서 나른한 숨결이 고이 퍼지고 있었으며, 얼굴엔 색기가 역력했다.
“나랑 섹스해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