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분위기는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냉랭한 기운을 감지한 남고딩의 시청자들은 [남고딩님, 진정하세요.]하면서 달래고 있었지만, 그녀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왕은 눈치 없게 계속해서 낄낄낄 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오늘 컨텐츠 대성공이다!”
“…….”
남고딩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그려졌다.
“사람 속이는 게 그렇게 즐겁니?”
그녀는 진심으로 화가 나 있었다. 본래부터 몰래 카메라를 즐겨오던 현대왕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은 그런 식으로 그녀의 기대를 꺾는 행위는 하지 않길 바랐다. 한참 웃던 현대왕도 머지않아 요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달래듯 소리쳤다.
“에이! 왜 그래 고딩아? 우린 원래 찢고 뜯고 맛보는 이가탄 같은 사이였잖아!”
“그래, 넌 그랬겠지.”
여전히 싸늘한 음성이었다. 악스럽게 고조되는 분위기에 현대왕이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이 양반 제대로 화가 난 것 같은데?’
약삭빠르게 눈치챘다. 하지만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나도 늦은 상태였다. 현대왕이 그녀를 달래기 위함에 살짝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가탄 씨! 설마 그 정도 가지고 삐진 거임?”
“…….”
남고딩은 말없이 모니터 화면만 응시했다. 그녀의 눈망울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소리 내지 않기 위해 애써 인내하는 모습이었다.
“멋지게 컨텐츠 하나 살렸잖아. 시청자들 반응도 아주 좋아.”
“놀고 있네.”
“…앵?”
시청자들은 슬슬 극악에 치닿는 분위기에 [그만해요 남고딩님….] , [현대왕님 너무 심했어요.]라면서 제지하고 나섰다. 현대왕은 방금 전 싸늘하게 중얼거린 남고딩의 목소리를 귀에 담고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야 여편네! 너 너무 심한 거 아냐?!”
“넌 늘 그런 식이었어.”
가벼운 분위기로 정화시켜보고자 노력하는 현대왕이었지만, 남고딩은 한없이 진지한 투로 임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눈망울에서 또르르 하고 눈물방울이 흘러 내렸다. 하지만 울먹임은 절대 목소리에 섞이지 않았다.
듣기로 진짜로 화가 나면 울음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하던가? 그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그녀였다.
“넌 항상 뭐만 하면 자기 멋대로 굴고, 남을 헤집고 상처 입혀왔어. 그래놓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어댔지.”
“야, 뭐 말을 그렇게 하냐….”
“왜? 내 말이 틀려? 너 항상 그런 식이었잖아. 지 뜻대로 안 되면 박박 우겨대고 소리 질러대고, 너 그만큼 유치하고 한심한 녀석이었잖아? 그 보잘 것 없는 모습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
슬그머니 머리에 혈압이 올랐다. 하지만 그는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했다. 방송에서 대놓고 싸울 만큼 감정적이지 않은 것이다. 설사 그가 남고딩의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왜 이러냐. 아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확실히 이번 건 너무 심했던 것 같다.”
“됐어.”
“에헤이, 너무 그러지 말고 사과 좀 받아주라니까?”
확실히 남고딩의 마음을 이용해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려고 했으니 욕을 먹어도 싸다. 허나 그녀와 오랫동안 다퉈왔고, 늘 이런 식으로 서로 헐뜯고 맛보던 사인지라 ‘겨우’ 이 정도에 화를 낼 거라곤 생각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현대왕은 그녀의 분노에 많이 당황한 입장이었다.
“그 사과도 그냥 이 순간을 무마하기 위함 아니야?”
“…….”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야, 츤고딩….”
“됐어. 더 이상 듣기 싫으니까 이만 끊어.”
그리고 뚝하고 전화가 끊겼다. 졸지에 가해자가 돼버린 현대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청자 채팅방엔 이미 현대왕을 꾸짖는 발언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필시 남고딩의 팬들이 넘어와서 일갈하는 것이리라.
‘이런 식으로 끊으면 안 되지!’
하지만 현대왕은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방송을 종료하면 후에 야기할 논란에 대해선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는 일단 남고딩과 다시 한 번 통화하여 오해를 푸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형….]
호명하는 딱지의 채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욕설과 비난으로 빗발치는 채팅창을 무시하고 현대왕이 다시금 남고딩에게 통화를 신청했다. 뚜루루루루… 딸칵. 신호음이 울렸지만 머지않아 종료되고 말았다. 남고딩이 받지도 않고 꺼버린 것이다.
‘이런!’
재차 전화를 시도하려 들었지만 남고딩은 어느 덧 스카이 라이프에서 나가 있었다. 심지어 방송도 어느 틈에 종료한 상태였다. 그의 얼굴은 당연히 혼돈의 카오스로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개념이 없냐? 남고딩 상대로 그딴 짓을 해?]
[현대왕 늘 봐왔는데 내 언젠가 이렇게 사고 칠 줄 알았다 ㅉㅉ]
[애휴 이게 이 녀석 한계지 뭐….]
현대왕을 욕하는 시청자들.
[현대왕님이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요.]
[맞아, 오히려 그 정도에 화를 내는 남고딩이 이상한 거지.]
[속 좁은 년 ㅉㅉ]
반대로 현대왕을 보호해주려는 시청자들도 있었다. 두 분류의 시청자 간에 대립이 형성되면서 점차 두터워지는 갈등. 현대왕은 이대로 놔두다간 일이 종잡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를 것이라 확신했다.
…파뿌리 TV에서 가장 크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두 비제이였다. 올해 시상식에서 대상 유력 후보자로 선정될 만큼 명성이 자자한 두 사람이었는데, 그런 두 사람 간에 간극이 생기면 큰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야! 현대왕 이 개자식아!]
일단 방송부터 종료했다. 민국으로 돌아온 그는 곧장 책상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들어 강은별에게 연락했다. 몇 차례고 휴대폰의 신호음이 울렸으나, 은별은 도통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망할….”
민국은 이를 갈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바지를 갈아입고 윗도리에 외투를 걸친 민국은 곧장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전철을 타고 은별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보았다.
“진짜 이 양반이….”
여전히 받을 생각을 안했다. 민국은 혀를 내두르면서 예의 없겠지만 불쑥 집에 찾아가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닌 것이다. 두 사람의 비제이 인생에 큰 차질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은별아!”
이윽고 은별이의 저택에 당도한 민국은 냅다 문을 두드렸다. 초인종을 울려보기도 했고 소리도 빡빡 질러보았지만 저택 안은 무소식이었다.
‘부모님도 안 계신 건가?’
슬슬 지쳐갈 즈음이었다. 우우웅하고 휴대폰이 진동했다. 주머니 속으로 손을 꽂자마자 바로 휴대폰을 쥐어 꺼냈다. 발신자 강은별, 이라고 액정에 정확히 적혀 있었다.
“…….”
민국은 말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은별의 사나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드디어 전화 받았네.”
민국 역시 아까 전이랑은 다르게 사뭇 진지한 어조였다. 결코 장난을 할 상황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이윽고 은별이 흉기를 들고 위협하는 취객마냥 싸늘하게 충고했다.
“더 이상 말다툼하기도 싫으니까 꺼져.”
“왜 그러냐 자꾸? 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잠깐 나와 봐.”
어떻게든 은별이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목소리만 들어보아도 상당히 격노했단 사실을 알았다.
“싫어. 가라고.”
“아 정말, 왜 그러냐.”
“경찰 불러줘? 집 앞에 나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음흉하게 관찰하고 있다고 뻥이라도 쳐줄까?”
“은별아.”
“부르지 마. 너한테 내 이름 듣기도 싫으니까.”
뚝하고 통화가 끊겼다.
“…하아.”
또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돌이켜보면 민국이 백번 잘못한 일이었다.
그는 은별이의 마음을 내심 알고 있었다.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호감이 서서히 사랑으로 싹 틔어가는 시기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늘 서로 욕하고 지내오던 사이니 이 정도는 봐주겠거니 생각하고 그녀의 건드려선 안 될 마음 한 구석을 찔러버린 것이다.
덕분에 댐으로 막아놓았던 물세례가 밀려오듯, 그녀의 마음은 분노로 뒤덮였다. 필시 그녀는 이불에 눈물 몇 점 흘리며 자국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쏘냐, 민국은 강철보다 단단한 의지로 먹고 사는 인물이었다. 눈치 없게 보일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와 실제로 만나 오해를 풀고 싶었다. 마구마구 초인종을 누르면서 그녀와의 조우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삐용 삐용.
“헐.”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얼마지 않아 은별이의 저택 앞에 당도한 경찰차로 말미암아 민국은 당황하고 후다닥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 서!”
“으아아!”
은별이가 부른 것이 자명했다. 민국은 졸지에 스토커로 낙인찍힐 세라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쫓아가던 경찰관 둘은 오징어처럼 발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 뭐 저렇게 빠를 수가 있나, 인간이 아닌 것처럼 멀어지는 민국의 등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아, 정말 끝까지 이러기야?’
그리고 다음 날이 찾아왔다. 오늘은 사실상 생명치를 연장시키기 위해 은별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제 민국이 그토록 연락을 시도했음에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이쯤이면 슬슬 풀릴 기미를 보여야 하는 거 아냐?’
…싶으면서도 눈가가 탱탱 부었을 그녀를 생각하니 걱정되는 민국이었다. 콩딱지도 여러 차례 민국에게 연락을 해왔다. 어제 그 사건이 있고 난 후, 파뿌리 TV 내에선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랑 은별이의 이미지가 대폭 깎인 거겠지.’
시상식도 얼마 남지 않은 날에 이런 변변치 않은 사건이 생겼으니 머리부터 지끈거렸다. 일단 학교부터 다녀오자고 생각했다.
학교가 끝난 후였다. 민국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시금 은별에게 전화를 걸어 보였다. 이번에도 역시 휴대폰이 꺼져 있다고 알림이 뜨고 있었다. 민국은 울컥하는 마음으로 음성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야, 강은별.”
아무리 민국이 크게 잘못을 했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차라리 호되게 야단을 치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지만, 연락도 않고 상대도 안하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은가?
“너 이거 보면 빨리 연락해라. 아무리 내가 너에게 피해를 줬다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휴대폰 끄고 잠수 타는 건 아니야. 최소한 정식으로 사과할 기회라도 주어야 할 거 아냐?”
음성에 사나움이 묻어 있었다.
“아무튼! 오늘 약속 알고 있지? 나 네가 연락할 때까지 절대 아무 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거다! 진짜 죽을 각오하고 기다릴 테니까 이 연락 받는 즉시 찾아와!”
할 얘기를 마치고 통화를 종료하자 재차 한숨이 쏟아졌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제로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하겠지. 민국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생각했다.
‘오는 즉시 무릎 꿇고 사과하자.’
정말로 제대로 빌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은별은 등장할 기미가 없었다. 어느 덧 해가 들어가고 저녁이 깊어 가는데도, 모습 한 점 비추지 않는 그녀에게 민국은 미안함과 섭섭함을 크게 통감했다.
‘제길. 진짜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벽면의 시계를 확인한 민국이 두려움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머지않아 죽음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민국은 더 이상 이러고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 가늠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다른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생명치를 늘릴 수밖에 없다 생각했다.
정 안 되면 자존심 굽히고 키스방이라도 들어가는 수밖에….
“커헉!”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약 한 시간 빨리 민국에게 크나큰 고통이 찾아왔다. 가슴을 조여 매는 고통에 한 쪽 무릎을 꿇으며 바닥을 손으로 짚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의문을 갖기도 전에 호흡이 곤란해졌고 의식이 하얘졌으며, 마침내 민국은 바닥에 털썩하고 쓰러졌다.
“…….”
눈이 감기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민국의 시야에 한 인영의 모습이 담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