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살다 살다 이런 위기를 직면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민국과 서라였다. 일단 민국은 어떻게든 이 위기를 타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윽고 조금 어이가 없단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은별이 입을 열었다.
“이상한 장난치지 말고, 누군데 그래? 그리고 아까 같이 합동 방송하려고 했었잖아, 아는 비제이지?”
따지듯이 물어오는 은별이었고 민국은 막무가내로 대응했다.
“그냥 병신이야.”
“…아니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버럭 소리치며 추궁하는 은별이었고, 서라는 많이 긴장한 눈치였지만 한 편으로는 뭔가 의아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라는 지금까지 민국을 제외한 타 비제이를 실물로 시야에 드리운 적이 없었다.
때문에 은별이 민국과 관련된 타 비제이일 것임은 분위기로 말미암아 짐작했으나 그녀가 누구인지는 목소리로 판별해야 했다.
“!”
그리고 머지않아 계속되는 은별이의 목소리로 말미암아 서라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민국과 라디오 합동 방송에서 함께 했던 남고딩임을!
“정말 누구냐니까?”
“좋아, 솔직하게 말해줄게. 사실 이 녀석은 등신이야.”
“…….”
서라는 조금 신기한 눈빛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남고딩의 실물을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 목도하게 될 줄이야. 늘 귀엽고 까칠까칠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남고딩이었는데, 그녀의 실물 역시 목소리와 일치되는 모습이었다.
‘!’
하지만 신기해하던 것도 잠시, 서라는 이로써 더욱더 큰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는 남고딩이다! 서라는 아주 오래 전에 남고딩과 현대왕을 데리고 합동 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서라는 현대왕과 어울리면서 남고딩에게 뒤통수 한 대를 강하게 먹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남고딩은 그녀를 민국과 같은 급으로 취급하면서 싫어했었다.
“꿀꺽….”
필시 그 경멸의 감정은 아직도 만끽하고 있을 터였고, 만일 서라가 현대왕과 어울리면서 통수를 쳤던 콩딱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탈출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서라와 더불어, 이미 대안책을 강구하고 있던 민국이 주변을 말없이 도리도리 둘러보았다.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은별로서는 점점 더 미심쩍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 말을 못하게 하는 거지?’
은별은 이래봬도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어색하게 연기를 하면서 마치 위기를 빠져나가려고 기를 쓰는 듯한 민국과 말을 않고 있는 서라의 모습에 은별은 절로 추리하게 되었다.
“흐응.”
이윽고 은별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서라를 쳐다보았다. 말없이 앉아있던 서라가 순간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이윽고 은별이 상냥하게 웃어 보이면서 손을 건넸다.
“실례되지 않으면 잠시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
유유히 손을 건네며 제안하는 은별이의 모습에 서라는 머뭇거리면서 손을 뻗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서라의 옷을 꽈악 쥐고 있던 민국이 그 손에 더욱 힘을 불어넣으면서 소리쳤다.
“얘 일어나지도 못해!”
‘다리 병신입니다.’
민국의 발언을 기회로 삼아 서라가 빠르게 종이에 그 내용을 적어 건네주었다. 요번에도 역시 손이 아니라 종이를 건네받게 된 은별이 다시금 어이 상실한 표정으로 쏘아보기 시작했는데, 이젠 두 사람 전체를 수상하게 여기는 눈빛이었다.
“그럼 잠시 손이라도.”
“손도 못 써!”
‘손도 병신입니다.’
“심지어 눈도 장애다!”
‘그냥 다 병신입니다. 저 서서 오줌 누는 법도 모릅니다.’
“…….”
정말이지 뭐를 숨기려고 이러는 것인지, 은별은 의문과 더불어 어이없단 표정으로 두 사람을 계속해서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지 않아 은별은 왠지 장단이 잘 맞는 두 사람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단 느낌이 들었다. 분명 경험상으론 말이다.
“음….”
‘…서라야.’
이윽고 상념에 빠져든 은별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민국이 앞에 있는 서라를 끌어당겨 일으키려 했다. 요컨대 바로 도망치도록 탈출구를 만들 셈이었는데, 은별은 이래봬도 운동을 꽤 한 몸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뛰어간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아주 신중히 타이밍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벌떡 서라를 일으키려 드는데 은별이 그리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고, 민국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리고 살짝 긴장이 역력한 눈빛으로 은별을 지켜보는데, 서라를 주시하던 은별의 가는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너, 설마….”
“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프리허그으으으으으으으!”
막 은별이 추리를 끝내고 그녀의 닉네임을 담으려는 순간이었다. 민국이 느닷없이 달려들어 은별을 와락 껴안은 것이었다. 갑작스런 그의 포옹에 은별은 당황스런 눈빛으로 얼굴이 화악 붉어진 채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뭐하는 거야 이 변태가!”
“사랑한다 은별아! 너 같이 가슴이 작은 여자도 이 세상엔 없을 거야!”
“…복주머니 속에 올챙이들이나 보존하고 있을 새끼가!”
“가라! 서라야!”
은별의 허리를 꽈악 껴안고 얼굴을 부비부비 대고 있던 민국의 외침이었다. 민국의 그런 행위를 앉아서 막연히 지켜보고 있던 서라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탄성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별은 그 모습을 보고 ‘뭐야!’하면서 말을 이으려고 했는데, 그때 민국의 볼이 은별의 입술에 닿았다. 아니, 정확히는 민국이 의도적으로 닫게 한 다음에 부비기 시작한 것이다.
“읍읍읍읍! …놓지 못해 이 변태야! 그리고 저 애 일어날 수 있었잖아!”
“우쭈쭈쭈! 우리 은별이, 그동안 많이 서운하셨세요? 내가 다른 여자랑 노니까 많이 서운하셨세요?”
“이 발정 난 돼지 가축이 진짜 죽으려고!”
“하하하하! 내 육봉 스파이크의 맛을 보고도 과연 그런 소릴 할 수 있을까? 이 음탕한 여자야!”
“너 진짜 맞을래!”
민국의 품에 껴안긴 채로 옴짝달싹도 못하고 발버둥만 쳐대는 은별이. 민국은 서둘러 서라가 가는 길을 확인했다. 그녀는 금세 현관문에 도달하여 신발장의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었다.
‘좋아! 좀만 더!’
“아프다고! 이 가축아!”
“원래 천국을 나는 듯한 쾌감은 아픔 이후에 찾아오는 법이지!”
“씨이…!”
잔뜩 얼굴이 붉어진 은별이었다. 물론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었으니 좋기도 하였지만, 무언가 자신이 알아선 안 될 것을 숨기는 듯한 두 사람의 행동에 의문이 더윽 깊어갔다. 이윽고 몇 번이고 바둥바둥 떨던 은별이 무릎을 쳐올렸다. 퍼억!
“…컥!”
그리고 그 무릎에 차마 맞으면 안 될 곳을 정확하게 맞은 민국이 꽉 조이고 있던 두 팔을 원치 않게 때고 말았다. 그의 두 손은 어느 덧 남자의 소중한 소중이(?) 쪽으로 향하였고 무릎은 자연스레 굽혀질 따름이었다.
“끄어어어어어….”
“…….”
이젠 아예 드러누운 채로 신음하는 민국의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던 은별이 훼액하고 뒤늦게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후다닥 그곳으로 달려가 현관문 너머의 계단 쪽을 쳐다보는데, 이미 계단에는 서라라 불린 여자의 자취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
결국엔 놓쳐버리고만 것이다. 심지어 방금 전에 떠올랐던 그 사람의 명칭 또한 까먹고 말았다. 은별은 살짝 신경질이 나는 인상으로 현관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저벅저벅 누워서 자기 것을 쓰담쓰담하고 있는 민국에게로 다가갔다.
“대체 누구야? 내가 아는 사람이지?”
하지만 민국은 추호도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끄어어… 내 아기들이 죽어가고 있어…. 언젠가 츤고딩 속으로 들어가 생명으로 태어날 아기들이….”
“…….”
성드립으로 질문을 외면하는 민국의 태도에 은별은 말없이 쏘아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몇 개월 간 보아왔던 그로써, 그가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몇 번이고 질문한들 원하는 대답은 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은별은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했다. 더불어 어차피 기회가 이번 한 번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왠지 그런 예감이 든 것이다.
“알았어, 안 듣는다고. …근데 전화했던 용건이 뭔데? 오전에 연락 한 번 했었잖아.”
슬슬 통증이 가시고 있었는지 민국이 살짝 완화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그, 벌레들이 하는 그거 있잖아. 그거하려고 연락했었지.”
“…그게 뭔데?”
“음.”
잠시 고심하던 민국이 ‘아.’하고 깨달은 표정으로 제안했다.
“성교하자.”
“…미친 새끼.”
“아니면 가슴 좀 만지게 해줘.”
퍽하고 엉덩이를 찬 다음 몸을 물리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더 이상 중요 부위에 손을 가져가지 않고 ‘후우.’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나마 어찌어찌 위기를 넘어간 민국이었다. 하지만 민국은 한 가지 걱정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방송을 시작한 후, 서라와 함께 닉네임을 발설했던 순간이 녹화되진 않았을까 하는 부분이었다.
만일 그걸 누군가가 녹화해서 퍼트린다면… 눈치 좋은 은별이 서라가 콩딱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었다.
‘에라이, 그건 나도 몰라.’
결국 그 부분까진 자기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던 민국이 살짝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은별이 운을 띄었다.
“아직 생명치는 이틀치나 남았잖아? 그런데 왜 또 가슴을 만지려고 하는 건데?”
“아, 진짜 만지게 해주려고?”
“…….”
살짝 어이없단 표정으로 민국을 바라보는 은별이었다. 지가 가슴 만지고 싶다 해서 연락한 주제에 막상 만지게 해주려니까 반문하는 행동 때문이었다. 은별이의 그런 선한 마음을 머지않아 알아챈 민국이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가슴 만지려고 연락한 거 아니야.”
“그럼?”
쏘아보듯이 쳐다보는 은별을 향해 민국은 어떻게 답할까 고심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냥? 보고 싶어서? 오늘따라 유독 네가 보고 싶더라고.”
“…….”
은별은 혹시 청각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의문을 가질 만큼 민국이 지금 내뱉은 말에 의심을 가지는 모양이었다. 민국은 의심하는 은별을 향해 다시 한 번 웃음 지으며 말을 하였다.
“오전 수업 받을 때 네가 계속 떠오르더라고.”
“뭐, 뭐라는 거야?”
느닷없는 고백에 은별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당황하며 소리쳤다. 민국은 부끄러운 주제에 애써 새침한 척하면서 눈을 어디에도 둘 줄 몰라 하는 은별을 향해 다시금 한 마디 했다.
“아니 너 말고 네 가슴.”
“…….”
퍽! 그리고 또다시 한 대 맞는 민국이었다.
이후, 민국은 서서히 날이 깊어가는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아무래도 오늘 역시 방송을 못하고 시간을 보냈단 사실에 살짝 허탈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일은 반드시 해야지.’
그리 다짐하면서 민국은 서라가 사온 치킨을 은별과 대신 먹기로 했다. 물론 은별에겐 자신이 사온 것이라며 시치미를 땠지만 말이다. 뭐, 서라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중에 그녀를 만나면 치킨 사는데 든 비용을 반드시 건네주겠다고 생각하는 민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