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18cm맞음?”
“…….”
“좀 작은 느낌임.”
“…….”
민국과 은별의 라디오 방송을 꾸준히 챙겨보던 서라였기에 18cm란 발언을 선뜻 입에 담을 수 있었다. 물론 서라는 18cm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신체적인 부분에서 아직 성인이 아닐 뿐이지, 정신적으로는 이미 세상의 성인 지식을 모두 암기(?)하고 있는 어른에 가까웠다.
‘그나저나 작은 느낌이라니.’
자동적으로 서버린 것에 당황하던 것도 잠시, 민국은 그녀의 발언에 살짝 자존심에 금이 갔다.
“소녀여, 네가 뭘 몰라서 그러는데 팬티에 봉인돼있어서 그런 거지 본 모습은 우람하단다.”
“오오! 용사가 봉인시켰음? 근데 용사가 늙어 죽어서 이제 봉인 푸는 게 불가능할 듯! 피식!”
서라가 우습다는 얼굴로 비웃음을 그렸다. 안 그래도 살짝 금이 가 있던 민국의 자존심에 불이 피어올랐다. 민국이 ‘캭!’하고 이불 속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네가 아직 내 63빌딩의 맛을 보지 못하고 발언하는구나! 기어코 조국 통일을 당하고 싶으냐!”
“꺅! 조, 조국 통일이라니요! 나, 나의 마음은 도, 돌아가신 김정은 아버지에게만 있습니다!”
서라는 마치 야수에게서 도망가는 미녀처럼 이불 속을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고, 민국 역시 마찬가지로 그녀를 붙잡기 위해 이불 속을 팔팔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어느 덧 친한 남매처럼 서로 톰과 제리를 하고 있었는데, 방안에 감돌았던 야릇한 분위기가 삽시간에 지워져버리고 말았다.
“꺄악! 온니쨩 안 되이 데스까! 우린 이럼 안 되는 사이예요!”
“김정은! 어서 내게로 와!”
“꺄흣~!”
서로 웃고 즐기며 이불 속을 펑펑 뛰어다니던 찰나였다. 마침내 민국이 서라의 손목을 붙잡아 침대 위로 넘어뜨렸고, 이번엔 민국이 반대로 서라의 위에서 덮친 격이 되었다.
“…….”
“…….”
숨결이 닿을 만큼 서로의 얼굴이 또다시 가까워졌고, 이번엔 아까 전과는 조금 다르게 진지하고 야릇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만일 민국과 서라를 덮고 있던 이불이 침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사이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을 지도 모를 순간이었다.
“억!”
“…꺅!”
이불이 떨어진 것을 직감한 두 사람이 마치 야동을 보다가 어머니에게 들킨 사람마냥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민국이 천장을 확인할 새도 않고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바닥에 있는 이불을 쥐어 침대 쪽으로 올렸다.
팔짝 펴진 이불이 다시금 두 사람을 포갰다. 그제야 살짝 안도하는 분위기. 민국이 조금 진지해진 얼굴로, 누워 있는 서라를 향해 물었다.
“괜찮아? 어디 안 쏘였지?”
“응. 안 쏘였어.”
다행히 방심해 있는 사이에 호박벌에 쏘이는 위기는 면한 것이다. 하지만 민국은 살짝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두 사람이 이불을 다시금 덮는데 걸린 시간은 못해도 10초였다. 그런데 그 10초 동안, 이미 자극이 받을 대로 받아져 있던 호박벌이 건드릴 생각을 않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혹시….’
민국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불을 살짝 치워 보았다. 그리고 이불과 침대의 간격 틈으로 얼굴을 내밀어 천장을 바라보는 민국.
“어!”
이윽고 탄성 짓는 민국이었다. 얼마지 않아 희열 섞인 미소를 만면에 드리우며 조아라 하는 민국. 이불 속으로 다시금 들어온 그가 서라를 마주하면서 기쁘게 소리쳤다.
“야! 벌 나갔나봐! 방안에 없어!”
“헐?! 혼또니 데스까?!”
서라 역시 그리 소리치면서 이불 속에서 냉큼 나왔다. 그리고는 천장 위에 더 이상 존재치 않는 호박벌의 모습에 만세 삼창을 외치기 시작했다.
“소라 아오이 만세!”
“만세!”
호박벌은 아까 전에 서라가 열어두었던 문으로 사라진 모양이었다. 이윽고 민국과 서라가 사이좋게 서로를 바라보며 만세 삼창을 외친 뒤였다. 전신에 감돌던 긴장감이 조금은 수그러들자 피로가 바로 찾아온 것이다. 민국은 저도 모르게 입을 쫘악 벌리면서 하품을 하다가 중얼거렸다.
“에이씨, 볼라벤 같은 놈. 고놈 때문에 방송 시간 다 날려먹었네.”
“형 그럼 방송 안 할 거임?”
서라가 불현듯이 물어왔다. 민국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라를 잠시간 내려다보다가 ‘으음.’하고 팔짱을 꼈다. 그렇다고 이틀째 방송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해야지. 고작 벌 하나 때문에 방송을 하지 않을 만큼 나는 게으름뱅이가 아니거든. 너도 여기까지 왔는데 합동 방송은 하고 갈 거 맞지?”
서라가 즉각 ‘오오!’하며 소리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 팬티 차림으로 계속 있을 거임?”
그리고 또 다른 주제로 질문을 해왔고 민국은 이번에도 ‘으음.’하면서 팔짱을 꼈다. 하지만 이번 건은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민국은 혼자 집에서 방송을 할 게 아니니까 조금이라도 입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그리 결정을 내린 민국이 겨드랑이가 그대로 보이는 셔츠와 검은 고무줄 반바지를 입기 시작하는데, 서라가 그런 민국을 보며 소리쳤다.
“근데 형. 그거 알음? 나 아까 형이랑 이불 속에 있었을 때 형한테 엄청 신기한 냄새가 났음.”
“내가 원래 일반 수컷들이랑은 다르게 암컷들을 유혹할 수 있는 성적 호르몬을 가지고 있지. 그 냄새를 맡고 많은 암컷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고백을 하는 거란다. …후우, 애써 숨겨왔는데 너도 결국 내가 가지고 있는 비밀스런 매력에 눈을 떴구나.”
서라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맞음! 형 밤꽃 냄새 개쩜!”
“…이놈이?”
민국의 대꾸에 서라가 ‘헤헤.’하고 눈웃음 지었다. 민국은 그런 서라를 한참동안 마주하고 있다가 곧 똑같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늘 이런 식이다. 서라와 민국의 관계는. 아무리 야한 분위기가 형성되어도 결국엔 서로를 친한 오빠와 동생으로 의식하여 성적인 행위는 일체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두 사람의 관계였고, 아마 평생 동안 유지될 모습이었다.
‘그래, 친한 동생 오빠 사이인 거지.’
왠지 아쉬움이 느껴지면서도 한 편으론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성적인 행위란 그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 자격이 되었을 때 행할 수 있는 것이라 민국은 늘 생각하고 있었다.
함부로 싸지르고 다니는 철없는 남정네들처럼 되고 싶진 않았고,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늘 말로는 암퇘지라느니 여자가 참을 수 없는 성차별적인 발언들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민국이었지만, 결국엔 그만큼 여자를 깊게 아끼고 존중하는 남자는 몇 명 안 됐다.
“킁킁! 내 엉덩이에는 아직도 형의 밤꽃 자취가 남아 있음!”
“너 진짜로 덮쳐드림?”
놀려대는 서라를 향해 그리 농담하는 민국이었다. 서라는 이번에도 ‘헤헤.’하고 웃으면서 넘어갔는데, 민국은 사실을 알고 있을까? 호박벌로 말미암아 이불 속에 갇혔을 때 풍기었던 그 음흉한 분위기 속에서, 서라는 민국이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마음을 열어줄 생각이 있었음을 말이다.
…허나 민국은 눈치가 좋음에도 의외로 둔한 면이 있었고, 결국 서라의 그런 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자, 그럼 방송 준비나 하자.”
“예쏠! 마네카쏠!”
이윽고 민국과 서라가 뒤늦게라도 합동 방송을 진행하기 위해 소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함께 할 컨텐츠에 대해 고뇌한 적도 없고 이렇다 할 컨텐츠 역시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한 집에 모였으니 어떻게든 방송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민국과 서라가 서로 방송을 진행하려는 즈음이었다.
* *
‘야! 암퇘지!’
“…….”
수업이 끝난 강은별은 집으로 돌아가려는 중이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메시지 한 통이 와있었고, 그것의 발신자가 민국이란 사실에 살짝 설래해 했었는데, 내용을 봄으로서 그 감정은 까마득한 우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내가 또래 아이 괴롭히다가 엄마에게 맞았던 사랑의 매로 똑같이 맞고 싶은 모양이구나…?”
뭔가 까닭도 없이 바로 메시지로 시비질이다. 아무리 애정 표현이라지만 암퇘지라는 발언이 결코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이윽고 강은별이 최신형 스마트폰 LTE를 눌러 민국에게 전화했다.
‘휴대폰이 꺼져 있어?’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꺼져 있는 휴대폰. 본래대로라면 항시 언제라도 켜져 있는 것이 민국의 휴대폰이었다. 절대로 그가 휴대폰을 꺼두는 일은 전무하였는데.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순간 그런 불안감이 스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은별은 화들짝 놀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걔, 걔가 무슨 일을 당하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마음속은 민국에 대한 걱정과 염려뿐이었다. 은별은 잠시 초조한 안색으로 안절부절 못하다가 곧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몰라! 갈래!”
그리고 곧장 가방을 메고 대학교를 나오는 은별. 그녀가 향한 곳은 바로 지하철역이었다. 근데 무슨 까닭에선지 집으로 가는 반대 방향의 지하철에 탑승하고 있었는데.
“…내가 원해서 가는 게 아니야. …꺼져 있는 휴대폰이 걱정되어서 가는 거라고.”
손잡이를 붙잡고 투덜투덜 대며 민국에게로 향하는 은별이었다.
이윽고 머지않아 민국의 집 앞에 당도한 은별이었다. 예전에 한 번 생명치 부족으로 이곳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돌연 떠오르자 기분이 여러모로 복잡했다.
‘진짜 카사노바도 아니고 그게 뭐야? 변태야? 왜 만날 만나는 사람이 여자밖에 없어? 방송할 때도 여자들이랑 노닥거리기나 하고….’
이것이 바로 질투라는 것이었다.
‘지, 질투 따윈 안 해!’
그렇게 속내로 소리치면서 은별은 담담하게 문을 잡아당겼다. 이윽고 열어젖혀진 문 너머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드리웠는데, 은별은 차츰 차츰 그것을 디뎌 올라갔다.
“…….”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현관문 앞! 하지만 은별은 순간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왜 열려 있는 거지?’
현관문이 떡 하니 열려진 채로 닫힐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은별은 한창 그것을 주시하다가 ‘설마….’하는 불안감 느꼈다. 어쩌면 아까 전에 그녀가 예상했던 일이 진짜로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안 돼!’
은별이 허겁지겁 열려 있는 현관문 너머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는 신발을 벗지도 않은 채로 민국이 있는 방 앞에 도착하였는데.
“안녕하세요? 현대왕입니다.”
“안녕하시랍니까! 콩딱지 딱지랍니다!”
“…….”
방바닥에 앉아 인터넷 방송을 키고 인사 중에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급한 마음으로 민국의 방까지 발을 들였던 은별로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무언가 기척을 느낀 민국이 ‘엉?’하고 고개 돌려 은별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는데, 이 상황에 절대 존재치 않아야 할 인물이 이곳에 존재하자 굉장히 당황한 눈빛이었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냐?”
당황한 목소리로 그리 소리치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은별이의 눈빛은 이미 그가 아닌 서라에게로 향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은별이를 따라 서라를 바라보는 민국. 하지만 머지않아 민국은 ‘!’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라가 콩딱지라는 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민국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서라 역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콩딱지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민국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겐 추호도 알려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
그런데 이렇게 어이없게도 위기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민국은 호박벌 때문에 긴장했을 때랑은 다른 부류의 긴장이 온몸에 감도는 것을 느꼈다.
‘…들었냐?’
민국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은별을 쳐다보았다. 서라 역시 아까 태연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긴장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허나 은별은 다른 의미로 서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얜 누구야?”
“폭풍 기침 콜록 콜록! 폭풍 침 뱉기 카아악 퉤에에에엣! 은 아니고! 여전히 폭풍 기침! 콜록 콜록!”
일단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컴퓨터 전원부터 누르는 민국이었다. 생방송을 보기 위해 진입했던 시청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컴퓨터가 종료되었고 민국은 다시금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서는 은별을 보고 물었다.
“은별이니? 이 보잘 것 없는 곳엔 무슨 일로 왔니?”
“…….”
척 보아도 연기가 너무나도 어색해 보이는 민국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이다 보니 그 역시 연기를 자연스레 할 수가 없던 것이다.
이윽고 은별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다시금 서라를 바라보았다. 서라는 그녀답지 않게 살짝 움찔해 보였는데, 여전히 콩딱지라는 사실이 밝혀지진 않았을까 조마조마 하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 찰나였다.
은별이 서라를 향해 ‘저기.’하고 운을 띄운 것이었다. 허나 조금도 틈을 내주어선 안 된다 생각한 민국이 달려들어 서라의 양어깨를 두 팔로 감아 보이며 소리쳤다.
“얘 병신이야! 말 못해!”
“…….”
할 말을 잃는 은별. 하지만 민국이 던져준 기회를 서라 역시 소홀히 사용하진 않았다. 바닥에 있는 공책의 종이를 살짝 찢어 보이더니, 거기에 팬으로 무어라 적어서는 은별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보인 은별이 종이에 적혀 있는 내용을 훑어보았다.
‘안녕하세요? 병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