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드디어 만났다>
다음 날이었다. 민국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예절 바른 청년의 모습을 하고 학교 수업에 임했다.
교수님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수업을 열심히 경청하는 민국의 태도에 올해 정말 좋은 학생을 두었다면서 뿌듯해할 따름이었다. 민국은 자신을 높게 인식해주는 교수들에게 고마움과 더불어 흡족함을 느꼈다.
본래 그는 다른 성격의 소유자인데! 바깥에서는 마치 연예인마냥 멋지게 꾸미고 잘 생긴 이목구비를 훤히 드러내면서 사람들을 배려하고 다니지만, 집에서는 팬티 바람으로 가랑이 사이나 긁적대면서 하품이나 내쉬는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나도 사실 평범한 남자애라고. 집에서 야동도 보고 여자 애들 보면서 음란한 생각도 하고, 게임 무척이나 좋아하고. 그런 남자애라니깐.’
허나 민국의 본래 모습을 모르는 여학생들은 하나같이 겉모습에 속아서 한 눈에 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업에 임하고 있는 민국을 흘긋 흘긋 주시하고 있는 몇몇의 여학생들. 민국은 그런 눈길을 통감하면서 생각했다.
‘정말이지 이놈의 인기는 식지를 않는구만. 많은 여자들이 나의 여편네가 되길 바라고 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민국은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민국의 것이 되지 못했다면서 흐느껴 울먹일 테지만!
‘음하하하하하하하!’
실은 이렇게 자뻑이 심한 남자애라는 것을 여자애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오게 될까?
“그럼 다음 수업 때 보자.”
“수고하셨습니다.”
수업이 끝이 나고 아이들이 차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민국 또한 가방을 정리하고 나갈 채비를 갖추었다. 그때 한 여학생이 민국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새민이인가?’
민국은 늘 수업이 끝나면 자신에게 찝적대던 여자를 떠올렸다. 노골적으로 들이대던 여자애는 박새민 말고는 없었다. 허나 보아하니 새민이는 아니었다. 같은 반에서 수업하는 여학생으로 얼굴은 어느 정도 익혀둔 적이 있으나, 별로 친하지 않은 애였다.
“저기, 민국아.”
‘이름이 뭐였지?’
겉으로는 모든 것이 다 완벽해보이도록 만들기 위해 대학교 학과 수업 때 같이 수업을 받는 애들의 이름을 모두 외워두었던 민국이었다. 민국은 잠시 그 여자애를 빤히 쳐다보면서 머리를 굴려보았다. 머지않아 답이 나왔다.
“리애구나. 왜?”
“아… 내 이름 알아?”
리애가 살짝 놀란 듯 반문했다. 한리애. 그다지 예쁜 편은 아니었지만 귀여운 매력이 있는 여학생이었다. 민국은 기다렸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 이름이 워낙 예쁘다 보니까 금방 기억하게 되더라고.”
“…….”
리애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일었다. 민국 역시 회심의 미소를 유지하면서 생각했다.
‘계획대로!’
고로 여자들은 예쁘다는 말에 사족을 못 쓴다. 아무리 거울로 자신을 비하하고 못 생겼다 칭하는 여자 애들이라 할지라도, 남자 애들이 너 예쁘다고 칭찬을 해대면 내심 좋아하는 게 여자의 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아, 저기….”
리애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초점을 혼란스럽게 왔다갔다 거렸다. 열기설기 하는 모습이 벌써부터 민국에게 흠뻑 빠진 모양이었다.
민국은 마가랜처럼 느끼함이 묻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자제하면서, 그렇다고 냉랭한 바닐라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차갑지 않도록 중간을 유지하면서 물었다. 리애는 결국 민국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내리 숙인 채 중얼거렸다.
“괘, 괜찮으면 공부 좀 가르쳐 줄 수 있나 해서….”
“응?”
“대학교 수업에서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가르쳐 줄 수 있음 해서…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본래 목적은 그게 아닐 텐데?’
이미 여학생의 마음을 완전히 캐고 있는 민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어느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수업 도중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서 개인적으로 만나 가르쳐달라고 요청을 하겠는가? 절대로 일반 남학생에겐 없을 일이었다. 민국은 리애의 본격적인 목적을 꿰뚫고 있다는 듯 미소 짓다가 말을 이었다.
“미안. 아무래도 내가 일정이 있어서 안 될 거 같아.”
“그래…? 무슨 일인데?”
‘집에 가서 롤 해야 하거든.’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꾸역꾸역 참는 민국이었다.
“아무래도 선약이 많이 잡혀 있다 보니 안 될 것 같아. 미안.”
“아… 그, 그래. 괜찮아.”
리애가 더듬거리면서 괜찮다고 표했다. 민국은 씨익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런 민국의 사과에 오히려 더욱 미안하다는 듯 리애가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었다. 이윽고 리애가 여자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다시 걸음을 옮기고 민국은 가방을 매보였다. 그러고는 밖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기면서 리애와 함께 있는 여자 무리가 하는 말을 엿들었다.
“어떻게 되었어?”
“안 된대. 선약이 많대.”
“으!”
여자 무리 전부 하나같이 안타까워하는 눈치였다. 민국은 그런 여자 무리를 눈으로 흘긋 곁눈질하다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우면서 복도로 나갔다.
‘그래, 난 이런 놈이라고.’
겉으론 완벽함을 추구하고, 폼생폼사에다가 여자 애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우월한 존재. 절대로 민국이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는 일은 없었다. 여자 애들이 먼저 민국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일은 있어도.
‘한 번 실제로 보았을 때 어떤 얼굴을 할 지 궁금하구만.’
혀를 날름 거리면서 민국은 끌끌 음란하게 웃어 보였다.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강강과 실제로 만나는 날이었다. 실물로 서로 마주했을 때 과연 강강이 그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릴 지도 몰랐다.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 민국님! 이러면서 말이다.
‘음, 역시 그건 너무 오바인가?’
하여튼 강강이 어떤 인물을 남친으로서 놓친 것인지 몸소 보여주고 싶었던 민국은 오늘의 만남을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아까 수업을 받을 때도 여러모로 그 약속이 떠올라 쉽게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복습을 해야 할 실정이다. 이윽고 민국이 계단을 유유히 내려가는데 저벅저벅 누군가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그녀와 자연스레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박새민.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민국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새민 역시 정면으로 마주친 그의 얼굴을 보면서 침묵하고 있었다.
‘박새민….’
한 시간씩 가슴을 만져야 하루치의 생명력이 불어난다는 희귀병에 걸렸단 사실이 알려지자 그녀와의 거리는 급격하게 멀어졌다. 민국이 피한 것이 아니다.
새민이가 스스로 피한 것이다. 민국은 그런 그녀를 영 맘에 들어 할 수가 없었다.
인간적으로 당연한 마음이었다. 아픔 없이 정상적으로 행동할 때는 언제고 따라다니면서 지겹게 들러붙더니, 병이 걸리자마자 나 몰라라 없는 사람인 척 무시하고. 어떻게 그녀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허나 민국은 겉으론 완벽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설사 대학교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민국이라 할지라도, 겉으로는 그들과 사적인 감정과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인 것이다.
“난 그럼 가볼게.”
“…….”
민국이 천천히 손을 들어 인사했고, 새민이가 그런 그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녀를 비껴 지나간 민국이 1층으로 유유히 내려와서는 테이블로 향했다. 역시나 오늘도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어김없이 1층 테이블에 앉아있는 예나의 모습이 보였다.
“흐음.”
민국은 팔짱을 끼고 대범한 자세로 공부 중인 예나를 주시하였다. 예나는 태가 커다란 굵은 안경을 쓰고 공부에 임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정말이지 온화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이 그냥 커피에 가깝다면 그녀는 비싼 커피라고 하는 게 올바르달까? 남들과는 다른 고급스러움을 상당히 풍기고 있었다.
‘하긴 예나도 여러모로 대단한 편이지.’
인간적으로 소꿉친구라면 서로 가벼운 스킨쉽도 있는 법이고, 방구도 털 수 있는 법이고 그런 것이다. 하지만 예나는 거의 소꿉친구에 가까우면서 민국에게 인간적인 부분들을 선뜻 보여주지 않았다. 요컨대 자제심이 많이 쌘 편이고 자신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온 것이라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예나 역시 민국과 같은 과라고 볼 수 있었다.
“음….”
근데 막상 예나가 집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행동할 것을 생각하니 민국은 무언가 찝찝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그토록 수려하고 아름다운 예나인데, 설마 집안에서는 떡진 머리로 치아도 안 닦고 컴퓨터나 노닥거리면서 웃어댈까? 근데 어느 인간이든 그걸 제일 편하게 여기긴 한다.
‘그래, 예나도 인간이니까.’
집안에서 다르게 행동한다 해서 그것에 크게 실망한다거나 그럴 인물은 아니었다, 민국은. 이윽고 민국이 고개를 좌우로 움직여 몸을 풀어 보이며 예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드르륵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보이니, 예나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안경을 뺌과 동시에 말이다.
“왔어?”
“응. 오늘도 열심히 하네.”
“항상 부지런히 안 하면 다음에 많이 해야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말에 동의했다. 공부는 확실히 제때 제때 해야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한 번에 몰아닥쳐서 하면 몸도 상하고 영 좋을 게 없었다. 사람은 매사에 부지런해야 좋은 법이다.
“잠깐만.”
이윽고 민국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근처 커피 자판기로 향했다. 그리고는 밀크 커피 두 개를 뽑아 가지고 예나에게로 다가가 한 잔 건네주었다.
“받아.”
“고마워.”
“고마우면 밥 사야지?”
민국의 말에 예나가 사뿐히 미소 지었다. 어차피 진짜로 밥을 사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농담으로 하는 말임을 예나도 알고 있었기에 웃으며 넘기는 것이었다. 물론, 예나는 민국이 밥을 사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줄 생각이 있었다. 그만큼 그를 좋아하고 있었기에.
‘그래, 예나는 날 좋아하고 있지.’
다시금 맞은편 의자에 앉으면서 커피를 홀짝인 민국이 흘긋 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금 안경을 고쳐 쓰고 공부에 임하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오른쪽 어깨로 늘어뜨리고 공부에 임하고 있는 예나. 민국은 다른 여학생들이 자신을 좋아할 때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예나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엔 많이 신경을 쓰고 있는 편이었다.
‘나도 한 때 좋아했었는데.’
다시 한 번 커피를 홀짝이는 민국이었다. 민국도 어릴 때 예나를 좋아한 적이 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름 아닌 이성 친구였다. 아무리 소꿉친구였고 어릴 때부터 서로를 곧잘 알았다 한들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 호감이 머지않아 커짐과 더불어 사랑이란 감정이 싹틀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국은 그때 예나에게 고백을 하지 않았다.
예나나 민국이나 어찌 보면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라 볼 수 있었고, 서로가 목표로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고백을 하지 않고 아직까지 친구 사이로서 꿋꿋이 유지해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예나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조금 줄어든 까닭은 있었다. 아니, 줄어 들었다기 보단 포기에 가깝다고 할까. 예나는 아직 민국을 좋아하고 있었고 민국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역시 지금은 사귈 상태가 아니라는 게 선뜻 느껴졌다.
“…….”
이윽고 한참동안 그런 예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가 이윽고 공부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을 정리하는 예나를 따라서 똑같이 의자에서 일어난 민국이 곧 그녀와 함께 대학교를 나왔다. 오늘은 더 이상의 수업이 없어서 같이 하교할 수 있었다.
“…….”
역으로 향하는 도중에 드문드문 사랑을 나누고 있는 커플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유독 노골적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커플들이 보였는데 걔 중에는 맛나게 키스를 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민국은 그런 이들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왠지 민망한데.’
다른 여자애들이랑 이런 장면을 목도하면 좀처럼 민망함을 느끼지 않았으나 예나와 함께 목도하게 되면 유독 민망함을 느끼는 민국이었다. 물론 예나 역시 살짝 민망해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커플들의 사랑을 나누는 광경을 관찰하는 게, 아무래도 살짝 부럽기도 한 눈치였다.
“…….”
슬쩍 예나의 손을 바라보는 민국이었다. 언제고 소꿉친구로서 잡아본 적 있는 부드러운 손이었지만 진정 사랑이란 감정을 가지고 만졌던 적은 없던 손이었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만지려고 하면 자꾸만 덜떠름한 느낌이 들었으니.
“흠흠!”
이윽고 민국이 짐짓 헛기침을 하면서 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역 앞에 당도했을 때, 개찰구 앞에 떡하니 멈춰 서서는 예나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
예나가 고개 돌려 민국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응. 오늘은 따로 약속이 있어서. 좀 이따 어디 가봐야 하거든.”
“여자야?”
언제고 약속이 있다고 하면 그렇게 물어오는 예나였다. 민국은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지 늘 알고 있었다.
“여자이긴 한데 이성적으로 만나는 사이는 아니야. 그냥 따로 용건이 있어서.”
“…….”
남자를 만난다고 거짓말을 치지는 않았다. 괜히 그런 식으로 신뢰를 저버리긴 싫었던 것이다. 이윽고 예나가 민국의 그 말에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계에 표를 찍었다. 민국이 그런 예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잘 들어가.”
“응. 너도.”
그렇게 서로 손을 흔들어 헤어지는 민국과 예나였다. 이윽고 예나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주시한 민국이 그제야 몸을 돌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군.’
그리고는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2번 출구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계단의 2번 출구에 우두커니 서 보인 민국은 현 시각을 확인하고 강강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딱 지금인데.’
약속 시간이 되었다. 이제 모습을 드러내야 할 때였다.
민국은 초조한 사람마냥 바닥을 앞발로 딱딱 쳐대면서 기다렸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우우웅 휴대폰의 진동이 울린 것이다.
휴대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한 민국은 처음으로 보는 전화번호임에 강강이 자명하다 생각했다. 이윽고 통화 버튼을 눌러 휴대폰을 귀에 부착하는 민국이었다.
“강강 님?”
“…네.”
“어딥니까?”
그리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즈음이었다. 유독 눈에 띄는 한 여인이 보였다. 멜라닌 색소가 부족한 사람에게 드러나는 절로 염색된 머리와 더불어, 흰 가면을 쓰고 있는 한 여인이.
“…….”
“…….”
서로를 마주한 민국이 통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