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강강이 고개를 가로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안 되겠어요….”
“육봉으로 혼 좀 내줘야겠네 이 년.”
“…네?”
"요즘 함정카드도 참 종류가 많더군요."
"……."
말을 잇는 현대왕이었다.
“아무튼 왜 안 된다는 겁니까.”
“그야… 노예빵이잖아요.”
“노예빵이 뭐요.”
“노예빵이면 쪽팔려랑 비슷하게 무언가….”
“흠흠, 아무래도 강강님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노예빵이랑 쪽팔려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긴 사람이 진 사람에게 무언가를 시키는 거죠. 하지만 이 두 놀이는 또 하나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쪽팔려는 당하는 사람이 쪽팔림을 느껴야 하는 게임이지만 노예빵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
“노예빵은 그냥 시키는 겁니다. 노예로 부려먹는 것, 그 외엔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니까 제 제안은 결코 잘못된 게 아닙니다. 오케이?”
[쓸데없이 논리정연 갑이다….]
애초에 이걸 노리고 접근했던 현대왕이었다. 어디 한 번 강강과 실물로 서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과연 강강이 그때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
그렇다.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아직도 그때의 일로 앙금이 상당히 남아있는 현대왕이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척 쿨하게 넘기려고 했으나 역시나 그런 식으로 차였던 게 화가 나는 현대왕! 현대왕은 직접 만나서 그녀가 어떤 인물을 찬 것인지 몸소 알려주고 싶엇다.
“그래도 그건… 좀.”
“강강님 저랑 만나기에 자신이 없습니까?”
“그게 아니라….”
“흠, 자신이 없나 보군요. 하기야, 알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아무리 새끈하고 야릇해도 실제로 봤을 땐 오히려 깨는 얼굴들이 있지요. 강강님도 그 범주에 속하는 모양인데 어찌하겠습니까. 어쩔 수 없죠. 그게 님 인생인데.”
“…네. 맞아요.”
“아니 그걸 인정하면 어떡해 이 양반아. 졸지에 내가 이상해져 버리잖아.”
“…….”
아무래도 진짜로 만나기 싫어서 인정하려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만납시다.”
“…….”
“만나요. 만나요 이이잉. 만나요오오오옹. 누나아아앙.”
[시밝!]
“너 욕했음 강퇴.”
채팅방에서 욕을 지껄인 시청자에게 추방 대신 벙어리 30초를 건네주고 현대왕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만나요.”
“그럼… 남은 게임 한 판부터 먼저 해요.”
“싫은데요?”
“네…?”
“일단 만나서 노예빵을 끝낸 뒤에 해야죠.”
“그런 게 어딨….”
“여깄지! 이히히, 그리고 제가 님이랑 다시 게임을 한 판 해봐요. 그리고 님이 이겼다고 쳐봅시다. 그럼 님이 저한테 뭘 시킬 거 같습니까? 제가 님한테 제안했던 노예빵을 취소해달라고 할 거잖아요. 뻔할 뻔자아닙니까?”
“…….”
정곡을 찔렸는지 침묵하던 강강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님이 이기면 두 개나 제안하게 되잖아요….”
“좋아요. 그럼 다른 걸로 합시다. 님.”
“…네.”
“가슴 만지게 해줘요.”
시청자 채팅방에서 몇몇 시청자들이 [돌직구의 왕! 현대왕!]하면서 환호하고 있었다. 현대왕은 뻔뻔스럽게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이제 주도권은 그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가슴 만지게 해달라니까요?”
“무슨 가….”
“님 가슴! 님 가슴 몇 컵이야? 유리컵? 월드컵? 머그컵?”
“…….”
“무슨 컵이던 간에 만지게 해달라고요. 그럼 노예빵 된 걸로 해드릴게요.”
“그럼 결국 실제로 만나서 만지게 해달라는 건데 결국 그러면 실제로 만나는 게….”
“그쵸? 늑대 같은 남자의 손길에 조물딱 거려지는 건 원치 않을 거 아닙니까. 아니, 조물딱 거릴 가슴이라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강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현대왕이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처음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 몇 판 게임을 노닥거리면서 자존심이 남들보다 강한 편에 속하는 걸 깨달았고, 현대왕은 계속해서 그 자존심을 자극하는 발언을 입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만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강강님. 그게 뭐 그리 어렵습니까? 저도 님한테 관심 없어요. 관심 있는 척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강강이 마지막 히든카드를 꺼냈다.
“저격 고수님이 가만 있지 않을 거예요….”
“허락 맡아요.”
“…….”
“아니 허락 맡으면 되는 일이지 왜 그러십니까?”
[강강님 실물 보면 어떤지 꼭 알려 주세요.]
“강강님 실물 보면 어떨지 알려달라는 분, 눈 감아 보세요. 그게 바로 강강님 실물입니다.”
[ㅋㅋㅋㅋㅋ]
이젠 대놓고 디스하는 현대왕이었다. 강강이 처음으로 ‘하아….’하고 뜨거운 숨결을 마이크에 내뱉었다.
“신음 소리 내지 마세요 강강님.”
“제가 언제….”
“팔딱 팔딱! 어이구, 잉어가 바닥에서 팔딱대네? 진정시켜야지 진정.”
강강은 이 이상 자존심에 금이 나는 게 싫었던 모양인지 곧 입을 열어 보였다. 사실상 그녀의 대답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꾼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 만나요.”
“녹음했습니다? 여자가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건 아니겠죠?”
“…네. 그러니까 만나요.”
“마치 한 대 칠 기세인데… 강강님 뭐 저한테 화나신 거 있습니까? 화풀어요, 이건 다 애정 표현입니다.”
“알아요….”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
또다시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며 화를 식히는 강강이었다. 현대왕은 ‘요시!’라고 소리치면서 강강의 승낙을 받았다는 것에 기분 좋아했다.
“아! 기분 조타!”
이로써 그녀와 만날 약속 장소와 만날 시간을 잡기 시작하는 현대왕이었다. 길게 질질 끌기도 싫었기 때문에 내일 즈음으로 약속을 잡은 현대왕은 강강에게 ‘빠빠!’하고는 그녀와의 스카이 라이프 방에서 나왔다.
“후후후후후. 성공했군요? 여러분. 이게 바로 저의 계략이었습니다.”
현대왕은 진심으로 음산하게 웃었다. 목표로 했던 것을 달성했을 때 느끼는 쾌감은 그 어떤 육체적 쾌감보다 더하다고 할까? 현대왕은 현재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나저나 키보드 이 음탕한 년을 빨리 노예로 정복하던가 해야지. 새로 산 게 더럽게 빡빡하네. 빨리 많이 써서 헐렁헐렁하게 만들어줘야겠습니다.”
[왠지 야하게 들리는데?]
“난 순수해서 그게 야한 것처럼 안 들리는데. 다들 이상하군요.”
한층 진정된 목소리로 현대왕이 ‘으음….’하면서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꽤 오랫동안 방송을 했다. 이제 슬슬 방종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좀만 더 하기로 하죠. 이번엔 게임이 아닌 다른 걸 하는 게 좋겠는데.”
마땅히 할 만한 게 있나 둘러보다가 바탕화면에 깔려 있는 토크온을 발견했다.
“저게 좋겠군요. 좋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시청자분이랑 일 대 일로 고민상담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길게 하는 건 싫으니까 딱 세 네 명만 받기로 하지요.”
그리고 네이트 아이디를 이용해 토크온에 접속했다. 채널에서 맨 아래에 있는 수다방을 클릭하고 방을 바로 두 명이서 대화할 수 있게 설정했다.
“방제는 뭐가 좋을까, 유식하게 영어로 방 제목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와를 영어로 적어보도록 하죠.”
[오오.]
“djtj dhk."
[ㅋㅋ]
어서 와를 영어 그대로 적어 방을 생성한 현대왕이었다. 현대왕을 비롯해 딱 한 명만 더 접속할 수 있는 방.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대비하고 있던 시청자들 중 한 명이 금세 접속했다.
“예, 어서 옵쇼.”
“현대왕 님!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참고로 굵직굵직한 목소리가 남자 시청자였다.
“현대왕 님 진짜 고딩님이랑 안 사귀어요? 대화 나누는 걸로 볼 땐 꼭 결혼할 사이 같던데.”
“이 시바럼이? 그게 고민이냐?”
“네.”
“흠흠!”
점잖아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 현대왕이었다.
“실은 속도위반도 할 뻔 사이지.”
“헐, 속도위반이요?”
“그래. 난 한 셋 골 넣고 싶었는데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 수준으로 철벅 방어를 하더군.”
[ㅋㅋㅋㅋㅋ]
시청자를 추방시키는 현대왕이었다. 고민은 들어주었으니까. 다음 시청자가 바로 들어왔다.
“현대왕 님! 제가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에도 남자였다.
“말씀해보세요.”
“전 여친이 안 잊혀집니다.”
“전 여친이 안 잊혀진다고?”
“네. 진짜 4년 정도 사귀었던 여자 친구인데요. 제가 군대 가기 전에 해어졌는데, 전역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떠오릅니다. 정말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아직도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방송 채팅방에선 벌써부터 [커플 아웃! 커플 지옥!]하면서 야유를 퍼부어대고 있었다. 현대왕은 ‘흐음….’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대왕 님?”
“시작을 안했으면 잊을 기억 또한 없을 것을. 우매한 중생이로고.”
“…….”
“나무관세음보살 반야바라밀다심경.”
이번 시청자 역시 추방시키는 현대왕이었다. 확실히 고민은 들어주었으니까. 방금 전 여자 친구가 잊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토크온 방에 접속했던 시청자가 채팅방에 이 한 마디를 적었다.
[당했다.]
“안녕하세요~.”
다음 시청자가 접속했다.
“오, 여자시군요.”
“네. 저 정말 대왕님 팬이에요.”
“그래요? 허허허. 아니 제가 뭐 그리 좋다고.”
“아니에요, 대왕님 성격도 진짜 좋고… 웅, 얼굴도 잘 생길 거 같고….”
“허허허 다 알고 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네. 하여튼 단점도 하나 없을 거 같아요.”
“단점? 제가 단점이 하나도 없을 거 같습니까?”
“네.”
“님, 그럼 우리 단점 말하기 해볼래요?”
“그럴까요?”
“난 다 좋고 괜찮은데 단점이 고추 있는 놈을 사랑했지.”
“…….”
이번엔 스스로 나가 보이는 시청자였다. 이에 대해 현대왕이 한 마디 했다.
“거부할 수 없는 충격이었나 봅니다.”
[ㅋㅋㅋㅋㅋ]
그야말로 고민 상담이라기 보단, 그냥 막무가내 일 대 일 대화 방이라는 게 옳은 표현일 거 같았다. 현대왕도 애초에 오늘은 진지하게 고민을 상담해줄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방종을 끝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슬슬 졸렵군요. 그만 둬야겠는데.”
[에엥]
“뭐 에엥이에요. 어차피 세 네 명 하면 끝내기로 했었는데. 자, 이제 슬슬 방종합니다. 방종 음악 틀어야지.”
방종 음악을 틀어 보였다. 이번 엔딩송은 왕따 때문에 미쳐라는 그분의 신곡이었다.
“내가 주는 떡을 한 번 먹어봐~. 은근히 감싸는~.”
필히 다들 한 번씩 들어봐도 나쁘지 않을 노래였다. 이윽고 방종송이 끝이 나고, 현대왕이 진짜로 방송을 종료할 시간이 왔다.
“엣헴, 들어오려고 했는데 놓쳤다는 분들이 너무 많군요. 근데 오늘은 제가 여기까지밖에 못할 거 같습니다. 이제 슬슬 저도 피곤해서 자야 될 것 같거든요. 오늘 방송 충분히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시청자들은 하나같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뭐 원래 늘 그래왔던 거지만 말이다.
[현대왕 님, 저도 접속 못한 사람 중 한 명인데 그럼 지금 고민 해결 답안 좀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때 시청자 한 명이 그리 말을 걸어왔다. 현대왕은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해보십쇼. 별삐용님. 그쪽 꺼 상담해드리고 바로 끄도록 하죠.”
[와 좋겠다.]
[개 부럽….]
하나같이 시청자들의 부러움 섞인 눈빛을 받는 도중에서 별삐용이란 시청자가 입을 열었다.
[여자 친구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정말로 이빨을 잘 터어야 하나요?]
어쩌면 남자들이 하나같이 관심 있어야 할 부분일 지도 몰랐다. 별삐용이란 시청자의 나이는 알지 못했으나 한 십대에서 스무살 초로 추정될 것이고, 연애에 한창 관심 있을 시기니까. 현대왕이 짐짓 헛기침을 한 다음 말을 이었다.
“남자가 이빨을 잘 털어야 되는 게 아니고 여유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여유가 있어야 이빨도 잘 털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여자들이 한 눈에 반하게 되는 거죠. 한 마디로 남자의 매력은 여유에서 나온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잘 생기면 다 해결되지요. 아무리 노래방에서 노래 잘 부르는 애가 있어도, 그때 한 순간에 시선을 받게 되지 그 후에는 절대로 시선을 받는 게 불가능합니다.
식사 자리에서 말 잘해서 애들 웃기는 거? 당연히 그 순간엔 시선을 받지만 그게 끝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여자들 대부분이 잘 생긴 남자애에게 한 번씩 연락을 합니다.
”
[아….]
“물론 잘 생기지 않아도 여유가 넘치면 여자 친구 사귀는 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경험을 토대로 얘기하는 현대왕이었다. 이윽고 머뭇거리던 별삐용이 말을 이었다.
[여유는 없고 평소에 야유는 좀 받고 사는데 여친 사귀기 가능한가요.]
“불가능합니다. 끝.”
드디어 방종하는 현대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