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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32화 (32/369)

32화

녀석과 만난 것은 불과 3개월 전이었다. 그때 녀석은 아리따운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매끈한 종아리를 부각하였는데, 민국은 그런 녀석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순간 믿을 수가 없었다. 딱지가 여자라니? 그동안 남자인 줄로만 알아왔던 녀석이, 긴 생머리에 봉긋한 두 가슴을 지닌 여자였다니!

"……."

심지어 그때 더욱더 놀라웠던 점이 무엇이냐면, 녀석은 일반 연예인들의 뺨을 후려칠 만큼 외모가 빼어났다는 것이었다. 남고딩이나 다른 여자 비제이들보다 훨씬 더 예쁜 외모를 소유하고 있어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남녀불문하고 시선을 고정할 정도였다.

민국은 그렇게 어여쁜 아이가 콩딱지라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에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 콩딱지임.'

허나 스스로를 소개하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민국은 그녀가 딱지가 맞음을 확신하게 되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타 방송을 할 때 들어왔던 남성스러운 목소리와 똑같았던 것이다.

…그렇다. 신은 역시 공평했던 것이다. 훤칠한 두 다리와 나올 대는 나와 있고 빠질 때는 빠져 있는 몸매에, 아름답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던 딱지는 단 하나, 여성스런 목소리를 얻지 못했다.

왜, 여자들 중에 남자라 착각할 수 있는 희귀한 목소리를 가진 이들이 있지 않던가? 딱지도 그 분류 중 하나였다.

'…….'

허나 여전히 그 당혹스런 상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던 민국은 많은 것을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졸지에 질의응답 시간을 갖게 되었으나 딱지는 관대한 마음으로 너그럽게 자초지종 모든 것을 다 알려주었다.

그녀는 민국보다 약 두 살 어린, 고등학생 2학년이 맞았다. 하지만 남자 아이가 아닌 여자 아이였으며, 방송에서 성별을 소개할 때 거짓말을 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한 번 물어보니, 딱지는 민국이 최대한 납득할 수 있도록 얘기를 해주었다.

민국도 그 얘기를 듣고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남자 목소리.'

딱지는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게 남성스러운 굵직한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딱지는 방송을 한들, 남성스러운 목소리 때문에 남자로 오해받을 것을 추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참에 여자가 아닌 척 연기하면서 남자로서 행동해보자고 다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짐이 쭈욱 이어져… 어느 덧 베스트 비제이가 된 그녀는 민국과 만남을 갖게 된 것이었는데.

진실을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 민국은 굉장한 충격에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여태까지 그녀가 여자인 것도 모르고 별의별 성드립과 게드립을 곧잘 쳐오며 행동했던 그였다. 그런데 실은 여자였다니? 그렇다면 그녀를 상대로 방송에서 선보였던 노골적인 드립은 얼마나….

'으아!'

순간 옛 방송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라 얼굴이 확 붉어지는 민국이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린 일. 진실을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고, 딱지도 그 부분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솔직히 표현한다면 딱지는 일반 여자 애들보다 내숭이 덜한 편이었다. 성적인 발언에 대한 것에도 매우 관대한 편이었고, 오히려 그녀가 노골적으로 성드립을 치면서 장난을 걸어오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진심이 아닌 장난으로 그러는 것이었으나, 민국은 진실을 알게 된 뒤 그녀와 방송을 하면서 한결 편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다.

'다만 이 사실은 다른 비제이에게 절대 얘기해선 안 되겠지.'

친하지도 않은 다른 비제이의 두 귀에 들어갔다간 어떤 위험한 일이 찾아올지 모를 터였다. 그 정도로 딱지가 발설하지 않은 비밀의 위력은 엄청났으며, 민국은 그녀에게 절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그 사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잠깐. 그럼 나한텐 이 사실을 왜 알려주는데?'

그러나 약속한 직후 의문이 들었던 민국은 그 부분에 대해서 그녀에게 질문했었다. 그러자 딱지는 잠시 '흠!'하고 팔짱을 끼며 고심하는가 싶더니 '그건!'하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형은 게이 같아서 맘에 들었거든!'

참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그만큼 딱지가 민국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민국은 절대로 그녀의 신뢰에 금이 가는 행동은 취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유지해온지 약 3개월. 비제이들 중 혼자 진실을 알고 있는 민국이니 만큼, 딱지와의 사이는 많이 두터워진 상태였다.

"형형! 뭐 먹을 건데? 빨리 말해!"

"네가 쏘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보채냐?"

"내가 쏘는 게 아니니까 이렇게 보채지! 내가 쏘는 거였으면 이렇게 보챌 이유가 없제?"

민국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딱지를 바라보았다.

"야 서라야."

"엉?"

서라는 그녀의 진짜 실명이었다. 강서라. 민국은 돌아선 그녀를 향해 천천히 질문을 던졌다.

"넌 나 오빠라고 안 부르냐?"

"오빠 소리 듣고 싶으셈? 으아! 온니 다이스키쨩!"

"…됐다."

고개를 가로젓는 민국이었다. 현실과 사이버 세계에서 갖는 태도가 일체 다른 민국이었다. 사이버 세계에선 현대왕으로서 건방지고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불량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치면, 현실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겸손하고 똑똑하고 올곧게 행동하는 이미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강서라는 그렇지 못했다.

"흐하하핫!"

그녀는 현실에서나 사이버 세계에서나 일관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쳐다보던 간에 쿨하게 넘어갔다. 민국은 그런 그녀의 뻔뻔스럽고도 관대해 보이는 모습이 내심 부럽기도 했었는데, 그렇다고 결코 따라하고 싶다거나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나저나 너 원숭이처럼 그렇게 웃고 다니면 좋아하던 남자 애들도 도망 가버리겠다."

"헐! 원숭이라니? 지금 나를 바나나만 좋아하는 동물처럼 생각하는 거야? 난 애국자로서 그런 소리를 듣고 참을 수 없다능!"

"……."

강은별과 함께 하게 되면 항상 우위권을 잡는 것은 민국이었지만, 강서라와 있을 때는 또 달랐다. 현실에서도 워낙 황당하게 행동을 하니, 민국은 자신과 만났을 때 은별이가 취할 법한 한숨을 몇 번이고 내쉬고 있었다. 이윽고 민국이 마땅한 음식점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어때?"

"오오, 형 돈 많으신가 봄?"

"엣헴. 이래 보여도 내가 돈 좀 많이 가지고 왔지."

"푸훗!"

"……."

민국은 '요놈 봐라?'하면서 서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곧 빈틈이 생기는 순간 서라의 머리를 한 팔로 꾸욱 감싸서 해드락을 걸기 시작했다. 서라가 '아아앗!'하면서 신음했고 민국은 그녀가 많이 아프지 않도록 살짝 조이면서 말했다.

"강서라. 너 요즘 공부하느라 머리가 많이 어질거리지? 이 횽아가 너 긴장 좀 풀어줄 겸 마사지 좀 해주마!"

"아아앗! 그, 그럴 필요 없다능! 내 머리는 매우 편안하다능!"

그렇게 서로 의식하지 않고 스킨십을 해대며, 민국과 서라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서라를 자리에 앉힌 민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에서 컵 두 잔에 물을 받아 가지고 왔다. 그 모습에 서라가 '오오.'하면서 말을 이었다.

"땡큐 베리베리 감사~."

즐겁게 웃음 지으며 컵 안의 물을 홀짝이는 서라. 맞은편의 의자에 다시금 착석한 민국이 그런 그녀를 한참동안 주시했다.

정말이지 어여쁜 미모였다. 일반 여자 연예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배우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화려하고 눈이 부시는 미모였다.

벌써부터 식당 안에 있던 몇몇 남자들이 그녀를 흘긋 거리며 관심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목소리만 여성스러웠더라도 서라는 지금쯤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얻고 있었을 터였다. 물론 그녀가 스스로 말하기론, 여전히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하지만.

"왜 이렇게 쳐다봄? 형 나 좋아함?"

"어. 좋아한다."

"어머! 돌직구! 하지만 나는 키 작은 남자는 싫어해 형. 적어도 남자라면 키 200cm는 되어야지. 자, 잦 자… 하여튼 그것도 좀 커야 하고!"

그렇게 개드립을 치면서 씨익 미소 짓는 서라. 일반 여자 애들이 그런 말을 함부로 한다면, 남자들은 얘가 싸보인다며 욕을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서라는 의도적으로 그런 드립을 치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 된 감정으로 얘기하는 것이었다.

워낙에 자연스럽게 그런 발언을 하다 보니, 서라는 싸보인다기 보단 원래 그렇게 되어먹은 애(?)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민국 또한 서라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미지였고 말이다.

"형님 수저 받으십쇼."

"그래 아우야."

이윽고 젓가락과 수저를 건네 보이는 서라. 그것을 고이 받은 민국이 자신의 자리에 정렬해두었고, 서라가 음식 메뉴판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입을 열었다.

"형이 쏘는 거니까 내가 형을 특별히 배려해서 직접 음식을 고를게."

"너의 화끈한 배려심에 절로 감동이 느껴지는 구나."

"헤헤. 그 정도야 뭐. 내 여자 친구도 늘 이 정도에 감동을 느끼고 울먹이더라? 사람들은 참 착한 것 같단 말이지, 끌끌끌."

"그 여자 친구?"

"엉, 내가 항상 얘기하던 애."

서라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은 그녀가 입에 담은 여자 친구라는 단어에 피식 미소 지었다.

저번에 배틀 필드 할 때도 여자 친구에 관해 많이 얘기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여기서 다들 한 가지 오해할 점… 서라가 자주 언급하는 그 여자 친구는 동성 친구일 뿐이다. 이성으로 여기고 있는 친구도 아니었고 서라는 레즈가 아니었다.

그저 서라 입장에선 여자인 친구를 데리고 있으니 여자 친구라고 표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콩딱지의 팬들은 그가 모태 솔로들 앞에서 여자 친구 사귀는 것을 은근슬쩍 자랑하는 모습에 화가 난다는 둥 불평불만을 토하고 있었다. 정작 콩딱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헠헠 딱지님.'하고 좋아할 것이면서 말이다.

"그나저나 너 진짜로 여자인 거 안 밝힐 생각이냐?"

"전에도 말했잖아 형. 나 평생 동안 내가 여자인 거 안 밝힐 거야."

"그럼 조만간 있을 파뿌리 TV 시상식은 어떻게 하고?"

"아! 그건 좀 문제가 되네? 흠… 남장이라도 해서 가야 하나?"

"근데 너 남장하고 간다고 할 때 대비해야 할 부분이 좀 많을 거다. 비제이 짓 할 때 타 비제이들한테 통수 친 짓 은근히 많잖아. 실제로 만나게 되면 어떤 해코지를 당할 지 알 수가 없어."

"다 형한테 배운 덕이지 하하!"

"하하! 새끼!"

민국이 짐짓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서라의 머리를 쓰담쓰담 해주자니, 그녀가 그 감촉을 느끼면서 '쓰담쓰담'이라 노골적으로 표현해댔다. …파뿌리 TV 시상식. 앞으로 2주 후에 이루어질 그 시상식은 요 일 년 동안 파뿌리 TV에서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었느냐를 가지고 치러지는 축제 같은 것이었다.

대상부터 특별상까지, 일 년 동안 활약한 비제이에게 그 상을 주는 것이었는데 민국은 이번 해 대상을 탐내고 있었다.

'물론 대상 받으러 갈 떄 가면 쓰고 가야지.'

얼굴을 훤히 드러내는 것은 민국으로서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인 정보에 관한 것은 일절 방송에서 드러낸 적이 없는 민국으로서, 그 신념은 계속해서 이어나갈 계획이었다.

"나 오므라이스 돈가스 시키겠음."

"그래? 그럼 여기 아줌마, 오므라이스 돈가스랑 오므라이스 하나 주세요."

그렇게 음식점의 주인에게 음식을 주문하고, 서로 잡다하게 대화를 나누는 민국과 서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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