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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9화 (29/369)

29화

민국은 10분 동안 마당에서 죽을 둥 뛰어다닌 끝에 거실에 입장하게 되었다.

“정말 미안해 사위, 내가 오해를 많이 해서.”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죠.”

웃음 짓는 은별이 어머니에게 민국이 깍듯하게 대하며 대꾸했다. 은별이 어머니는 그런 민국의 올곧은 행동에 새삼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부엌에서 가지고 온 차디찬 물을 한 컵 민국에게 주었다.

민국은 다시금 꾸벅 예절 바르게 감사를 표한 다음 그것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다행히 은별이 어머니는 더 이상 악의 가득한 모습으로 민국을 향해 빗자루를 휘두르지 않았다.

그녀가 안고 있던 소소한 오해가 모두 완성된 퍼즐처럼 풀이된 것이다.

‘모두 거짓말이지만.’

민국은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밝혔다간 이번엔 진짜로 끝장 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컵안에 담겨 있는 내용물을 꼴깍꼴깍 전부 마시는 민국이었다. 아까 전에 미친 듯이 마당을 뛰어다닌 탓에 더위가 상당했다. 이윽고 은별이 어머니가 흐뭇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걸 한 번에 다 마시네? 많이 더웠나봐?”

“예, 아무래도 아까 전에 뛰….”

“요즘 날씨가 많이 덥지?”

“…그러게요. 너무 덥다 보니 목이 자주 마르네요.”

웃음 짓고 질문하는 은별이 어머니를 향해 차마 진솔한 대답을 입에 담는 건 반역죄 같아 민국은 적당히 비위를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연 민국의 머릿속으로 은별이와 결혼을 할 시, 은별이 어머니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대할까에 대해서 자문하게 되었다.

어디까지나 0.01%의 가능성이었지만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민국은 은별이 어머니가 무서워서라도 은별이에게 잡혀 살 게 될 것 같았다.

“엄마, 이제 괜찮아?”

“고럼 괜찮고 말고. 이 엄마는 아직도 팔팔하단다.”

“…….”

그런 의미로 물은 게 아닌데, 은별은 침묵했다. 이윽고 은별이 어머니가 얘기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너무 심하게 오해를 한 모양이야. 그 부분에 대해선 정말 미안하단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민국은 깍듯이 대꾸했다. 은별이 어머니는 그런 민국이 한층 마음에 들었는지 깊게 미소지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미소가 마냥 기분 좋게만 보이지 않는 게 민국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

여하튼 간에 위기를 넘겼으니 민국은 안도했다. 은별이의 도움 덕분에 다행히 목숨 걸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일단 절벽녀에 관한 발언은 서로의 애정 표현이라고 서툴게 둘러댔다. 졸지에 민국의 별명이 18cm(가!정!파!괴!범!)로 되어버렸지만…. 그리고 가슴 만지게 해달라는 발언에 대해선 자초지종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둘러댄 거짓말은 대충 이러했다. 은별이와 민국이 데이트를 할 때 한 차례 내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기에서 승리할 시 민국이 은별이의 가슴을 만질 수 있는 권한을 딱 한 번 갖게 된다고 수락되었고, 민국은 내기에서 승리하여 정말로 은별이의 가슴을 만질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장난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민국은 진짜로 가슴을 만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이후로 민국이 은별이를 만나러 갈 때마다 ‘가슴 만지러 갈게!’라며 장난을 쳐댔다는 것이다.

은별이 어머니는 그 어이없는 해명에 잠시 뜸을 들이다 납득하는 모습이었다.

“난 설마 그게 만나러 가고 싶단 표현인 줄은 몰랐지. 하지만 돌이켜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해. 나도 어릴 때 사귀었던 첫 남친이랑 전화할 때 ‘똥꼬 핥으러 갈래!’하고 만남을 가졌거든. 참고로 내 첫 남친 별명이 슈퍼 똥꼬였단다.”

“…….”

“더러운 이야기였다면 미안해.”

기분이 많이 좋아지셨는지 농담까지 하는 은별이 어머니였다. 하지만 정작 옆 소파에 앉아 있는 아버지는 첫 사랑이 자신이 아니란 사실에 충격을 머금고 해탈한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자꾸 둘이 있을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찜찜하네. 이제 귀찮게 안 할게. 2층으로 올라가렴.”

민국이가 깍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은별이와 함께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은별이 어머니가 ‘아, 아침은 먹었니?’하고 물어왔다. 민국은 실제로 아침 식사를 일찍이 챙긴 지라 먹었다고 답했다. 그러자 은별이 어머니가 은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은별이는? 바로 먹을 거니?”

“…….”

은별이는 당연히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서 아침 끼니를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은별은 흘긋 민국을 곁눈질하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따 먹을래.”

“그래 알았단다. 그럼 둘이 즐거운 시간 보내고, 민국이 믿고 있을게?”

“…예.”

매사에 보수적인 어머니이다 보니 남자 친구가 은별이의 몸에 손 한 번 까닥대는 것조차 원치 않아했다. 물론 그건 은별이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민국이 은별이의 안내를 받아 2층 계단을 오르게 되었다. 은별이 어머니는 그런 두 사람을 뒷모습을 유유히 지켜보다가 싱그럽게 콧노래를 부르며 ‘그래도 심심할 테니까 먹을 과자들은 가져다 주어야지.’하며 부엌으로 향했다.

은별이 아버지는 여전히 시궁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해탈한 상태였다.

‘은별이가 어릴 땐 항상 위로의 의미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는데….’

해탈의 경지에 이른 은별이 아버지가 서글프게 옛 추억을 회상했다. 그리고 한 때 은별이가 불러 주었던 그 노래 가사말을 떠올려 보았다.

‘아빠! 힘내세요~ 아무도~ 없잖아요~.’

‘…이런 가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만일 내가 외로우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

…이종범.

끼이익! 쿵!

2층으로 무사히 올라온 은별이는 민국을 자신의 방에 들이자 마자 문을 닫았다. 그리고 민국과 하나 되어 일제히 한숨을 내뱉었다. 이내 날카롭게 고개 돌린 은별이가 치켜뜬 눈매로 민국을 쏘아보았다.

“미친 거 아냐? 어떻게 남의 집에 찾아올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내가 남이야? 너 고작 날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 안 했어?”

“지랄.”

둘이 있게 되면 예전처럼 자연스레 돌아오는 두 사람이었다. 물론 이 틈에 어머니가 갑작스레 등장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절 바르고 사이좋은 모습으로 바뀔 테지만.

“…너 정말 이번에 나 아니었으면 끝장날 뻔했어, 알아? 우리 엄마 화나면 장난아니게 무섭단 말야.”

“그건 몸소 체험했으니까 잘 알 거 같다….”

힘든 모양인지 민국이 침대 쪽으로 향해 사뿐히 앉았다. 그의 그런 모습에 은별이가 눈매를 더욱 치켜뜨며 말했다.

“누가 허락도 없이 앉으래?”

“엉?”

“어떻게 여자 침대에 허락도 없이 앉을 생각을 해? 너 변태야? 침대에 엉덩이 대고 여자 향기 느끼는 파렴치한 변태?”

그 말에 민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걸 이제 알았냐? 나 슈퍼 변태인데.”

“…병신.”

“뭐가, 따지고 보면 너도 변태잖아.”

“하? 무슨 소린지 도통 못 알아듣겠는데요?”

“어제 이불 속에서 뒹굴어대는 두 남정네의 모습을 보면서 좋아했던 주제에 모르긴 뭘 몰라.”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은별이의 얼굴이 화르르 붉어졌다.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데!”

“야, 그나저나 너 머리 많이 헝클어져 있다. 어떻게 좀 해봐,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 것 같네.”

“…….”

화제를 돌리는 민국을 쏘아보던 은별이 붉어진 얼굴로 책상 쪽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서랍 속을 뒤지기 시작하는데, 민국이 말했다.

“너 혹시 머리 안 감았냐?”

“어.”

“으… 뭐야, 여자가 머리도 안 감아? 으아… 그래서 시집이나 갈 수 있겠냐?”

“너님 장가나 빨리 가시죠? 여자 친구도 없는 게.”

“사돈 남말하시네 절벽녀가.”

“닥쳐 18cm.”

이윽고 은별이가 서랍 속에서 머리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헝클어진 앞머리에 곱개 매었다. 이마가 훤히 드러났고 민국이 ‘오오’하며 말을 이었다.

“이마가 4대강이네.”

“…….”

퍼억!

“캑!”

침대에 대자로 뻗어 버리는 민국. 씩씩거리던 은별이가 자신을 타이르고 슬쩍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있는데, 민국이 그런 그녀를 누운 채로 주시하였다. 불쾌한 표정으로 은별이가 슬쩍 시선을 옮겨 민국에게 말했다.

“뭐해? 빨리 만져.”

“헐? 이제 가슴 쉽게 내주는 거임? 야, 여자가 그렇게 함부로 몸을 내주면 안 돼.”

“…너 진짜 미숫가루처럼 확 갈아엎어버린다?”

“얌전한 돌쇠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민국이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은별이의 가슴에 손을 댔다. 갑작스런 감각에 은별이 ‘읏.’하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민국이 그런 은별이의 표정을 보다가 한 가지 드립을 떠올리고 슬쩍 미소 지었다. 그것을 눈치 채고 은별이가 약삭빠르게 물어왔다.

“너 뭐 생각했어?”

“…엉?”

“지금 뭐 이상한 생각한 표정이잖아. 뭐야? 빨리 말해.”

“…헐. 따, 딱히 은별이가 도쿄핫의 여자처럼 인상을 찌푸렸다는 둥, 망가 속의 여인처럼 설렌 표정을 지었다는 둥,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라능!”

“…….”

은별이가 하아 …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조금 심술궂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변태야…. 어떻게 때마다 그런 상상을 할 수가 있어?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더라도 이성 친구 생각하면서 그 짓도 한 다매? 으…! 정말 추잡스러워!”

“야, 개네들도 눈이 있어. 너 같은 절벽녀 보고 그런 상상을 하겠냐?”

“…이게 확.”

“자비 좀.”

민국이 말을 이었다.

“여하튼 걔네들도 어느 여자에게든 그런 생각하면서 오른손 놀리는 거 아니야.”

“전엔 왼손이라며?”

“확실히 왼손이 빠르긴 빠르지. 하지만 남자라면 어느 누구든 오른손으로 처음을 시작한다.”

주체할 수 없는 성드립이 난무하는 시간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무언가 궁금했는지 질문했다.

“야, 그나저나 너 그런 별명은 어떻게 생각해냈냐.”

“뭐가?”

“18cm."

민국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너 내꺼 봤어?”

은별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보, 보긴 뭘 봐!”

“그런데 어떻게 내 사이즈를 소수점 틀림도 없이 딱 맞혔대?”

“…뭐?”

은별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했다. 민국이 가슴을 당당하게 피며 소리쳤다.

“가정파괴범이 네 눈앞에 있다.”

“…….”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은별이 곧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머금으며 비아냥거렸다.

“꺄하핫! ……웃겨, 어떻게 네가 가정 파괴범이야? 소세지에 낀 때만큼 작아 빠진 게.”

“허어어?”

“그리고 아까 전엔 그냥 둘러댈 별명이 없어서 그렇게 부른 거였거든? 남자가 그런 식으로 거짓말치다간 새벽에 징조할머니가 나타나서 그거 때어 가버린대요~.”

순간 진심으로 욱한 민국이었다. 감히 남자의 자랑스런 그것을 모욕하다니! 그것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그것을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야, 너 내꺼 한 번 보여줄까? 보여주고도 어디 그 소리 나오나 한 번 보자.”

“…어이없어! 네꺼 본다고 해서 하나도 흥분 안 하거든?”

“만일 내가 그레이트 소세지면 너 레알 내 노예!”

“웃겨! …뭐하는 거야! 바지를 왜 벗어!”

은별이의 가슴에서 손을 때고 자신의 밸트로 손을 가져가는 민국. 이래 보여도 민국은 입에 담은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자신 있는 인물이었다.

“내 노예나 될 준비해라 이 암퇘지야!”

“…이 숱돼지가!”

그렇게 바지를 벗으려는 민국과 바지를 입도록 유지하려는 은별. 두 남녀의 싸우는 자세를 제3자가 보고 판단했다면 요염하다는 결과가 나왔으리라. 민국은 일어선 자세였고 은별은 침대에 앉은 모습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국이 진짜로 바지를 벗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남자의 자존심에 칼을 찌른 만큼 어느 정도 보여주는 척 시늉을 하여 속을 풀려는 것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뿐이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똑똑똑.

“둘이 잘 놀고 있니?”

끼이익. 그 순간이었다. 문이 열리며 은별이 어머니가 당도했다.

그녀는 오른손에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펼쳐진 환타지스런 광경에 넋을 잃고 떨어뜨렸다. 민국과 은별은 그대로 멈춰선 채 은별이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정지해있던 지도 약 10초. 은별이 어머니가 곧 폭발하려는 화산처럼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서민국!”

“으아아악!”

졸지에 또다시 신뢰감 제로인 남정네로 낙인찍혀 도망가는 민국이었다.

…어쨌든 간에 민국은 이차저차 잘 풀어나가 은별이의 가슴으로 생명치를 불어넣게 되었다. 은별이의 가슴에 대고 있던 시간은 총 세 시간. 요컨대 3일 동안은 여자의 도움 없이 잘 살 수 있는 몸이 되었고, 용건을 마친 민국은 은별에게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배웅 없이 창문 너머로 민국이 가는 길을 빤히 지켜보고 있던 은별. 이윽고 그가 사라지자 ‘후우.’하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지 못했다.

‘정말이지 아침부터 사람 피곤하게 하고….’

귀찮은 일이 끝났으니 만큼 이제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내야겠거니 생각하는데, 그런 은별이의 눈으로 무언가 낯설은 것이 담겨졌다. 은별은 순간 의아해하며 책상 쪽으로 향해 그 물건을 쥐어 보였다. 그러고는 ‘아.’하고 작게 탄성을 내면서 민국이 남기고 간 선물과 편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윽고 편지로 시선을 고정했다. 편지에 담긴 내용은 아주 간략했다.

‘절벽녀 감사함. 이건 선물임.’

“…….”

민국이 남기고 간 선물은 다름 아닌 막대 사탕이었다. 그것도 고작 하나. 은별은 어이가 없어 픽 하고 새어 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고작 막대 사탕 가지고 선물은 무슨 선물이야?”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50편부터 바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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