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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8화 (28/369)

28화

무자비한 전쟁터 속에서 수초마다 터져 나오는 병사들의 붉은 혈액. 아군들이 진을 치고 맞은편의 적군들과 엉켜가며 혈투를 벌이는 가운데, 높다란 언덕 아래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던 그녀는 칼을 들며 이렇게 소리쳤다.

‘싸워라!’

다음으로 내뱉는 그녀의 대사는 후에 많은 장군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현대 시대 사람들에게 명언으로 내려져온다.

‘싸우게 되면 죽을 것이고 도망치려고 하면 살 것이다! …고로 너희들은 죽는다!’

그녀는 아주 용감무쌍한 그 시대의 레전드 장군이었다. 그녀는 기습해온 적군들과의 사투에서 승리하여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는데, 아쉽게도 전쟁을 기록하던 이들이 참혹하게 살해당해 그녀의 인생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가는 세월 못 잡으니 가는 정력 못 잡는다.’

이윽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녀는 주름살 많은 할망구가 되어 죽기 직전에 이르는데, 다음 생에는 평범한 여인으로 태어나고 싶단 유언을 남긴다.

‘그 소원을 들어주마!’

하늘에 있던 염라대왕이 그녀의 소원을 받아주었고, 그녀는 후에 정말로 평범한 여자 아이로 태어난다. 어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여쁜 여자 아이로 성장하였는데… (이하 생략). 훗날 학교 동아리에서 어느 사건으로 말미암아 검도 유단자와 대립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녀는 죽도를 들고 검도 유단자와의 대결에 응했고, 검도 유단자의 뛰어난 경험과 연륜에 패배할 지경에 이르고 만다.

‘눈을 떠라 용사여!’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전생의 기운이 발휘된다. 그녀는 눈을 떴다. 전쟁터 생활을 해왔던 기억이 손톱의 때 만큼이었지만 새록새록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 한 때, 전쟁터 생활 속에서 사용했던 칼의 기술들이 떠오른 것이다.

‘질 것 같을 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의지?!’

의지의 힘으로 그녀는 부활했다. 그러나 그것도 모르고 빈틈이다 싶어 달려드는 검도 유단자!

‘검도 유단자의 빈틈을 노리는 ?의지?!’

살짝 굽히고 있던 무릎이 추진력이 되었고, 그녀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검도 유단자를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쓰러뜨렸다.

‘흩날려라… 천본앵.’

그 일을 계기로 그녀는 정식으로 검도를 배우게 되었고, 단 3개월 만에 검도 유단자로 거듭나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준다. 그랬다. 그녀는 전생에 나라를 지켰던 유일한 여자 장군이었고, 지금은….

“감히 우리 딸래미를 절벅녀라고 놀려!”

어여쁜 딸을 키우고 있는 대한민국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현재 빗자루를 휘두르며 검도의 재능을 맘껏 발휘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자, 장모님 진정하세요!”

“키만 멀대 같이 큰 놈이 딸래미 가슴 없다고 놀리고! 안 그래도 우리 딸 가슴 작가도 나한테 얼마나 고민 상담했는지 알아! 수술까지 받고 싶다고 하소연했었어! 그런데 뭐? …절벽녀?! 천하의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의 트라우마를 욕해?!”

“으아아앗!”

저택의 앞마당에서 무자비하게 휘둘러지는 빗자루의 모습에 민국은 도주하고 있었다.

‘사, 사람 살려!’

맘 같아선 담이라도 넘어 도망치고 싶었지만, 담은 그지같이 높았고 철문으로 가기엔 아주머니가 꽉 막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엄마!”

그때 막 2층에서 허겁지겁 내려온 은별이가 잠옷 차림으로 마당 앞의 자신의 어머니를 불렀다.

“은별이는 들어가 있어! 네 남친 조련 좀 하게!”

‘조련이라니….’

은별이 어머니는 겉으로 볼 땐 착하고 성실해 보여도, 속은 은근히 히스테릭한 면으로 가득했다. 요컨대 은별이와 비슷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진정하세요 장모님!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자네에게 장모님 소리 들을 만큼 난 늙지 않았어! 난 할머니가 아니야!”

“…대체 무슨 소리냐?”

마당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결국 잠을 설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비적비적 거리며 은별이에게로 다가왔다.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은별이가 고개 돌려 아버지를 보고 소리쳤다.

“아빠! 엄마 좀 말려봐!”

“…여보? 아니 저 남자애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은별아?”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으며 은별이가 애타게 소리쳤다.

“몰라! 하여튼 어떻게든 좀 막아봐! 저러다 민국이 죽겠어!”

은별은 진짜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한 번 빡(?)돌면 얼마나 위험한지 어릴 때 몸소 체험했던 적이 있는 것이다.

‘우리 은별이, 왜 그런 나쁜 짓을 했어?’

때는 은별이가 초등학생 때, 일진으로 잘나가던 시기였다. 수업 시간에 짝꿍인 남자애가 맘에 들지 않아 툭툭 건드리다가 두들겨 패는 일이 생겼었는데, 학교에서 은별이의 행보에 크게 걱정을 느끼고 부모님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다.

어린애가 학교 다니느라 고생하겠지, 애들을 패고 다닐 거라곤 생각지 않던 은별이 어머니는 그 날 그 소식을 듣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은별이가 돌아온 순간, 은별이 어머니는 매를 들며 눈웃음 짓고 얘기했다.

‘우리 은별이, 내가 단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지 않니? 난 은별이에게 매를 들기 무척이나 가슴이 아파. 내 자식이니까. 하지만 은별이가 친구들에게 지금까지 잘못한 죄는 모두 내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생긴 일이야. 난 지금 그걸 모두 속죄하려고 한단다.’

‘…….’

‘우리 은별이 손바닥 대.’

이때까지만 해도 은별은 뚱한 표정으로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그녀 역시 부모를 닮아 상당히 고집이 쎈 편이었으니까. 퍼억!

‘!’

‘우리 은별이, 어서 대야지. 울음 뚝! 그치고.’

하지만 이건 도무지 물러서고 뭐고 할 정도의 파워가 아니었다.

‘우….’

‘어허, 우리 착한 은별이. 얼른 손바닥 안 올리면 두 배로 맞을 거예요~.’

‘…….’

그리고 그 날, 은별이는 어머니에게 열 대를 맞고 퉁퉁 부은 손으로 엉엉 울어댔다. 실로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추억이라 하겠지만, 은별이 딴에선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절로 얼굴이 푸르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네 엄마 화나면 화 풀릴 때까지 말릴 수 없는 거 알잖니….”

“화 풀리고 나서 말리면 무슨 소용이 있어! 빨리 어떻게 좀 해봐!”

은별이가 계속해서 재촉했고, 아버지는 차마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곧 혀를 내두르면서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나아갔다. 신나게 빗자루를 휘두르고 있던 은별이 어머니를 향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저기 여보.”

“닥쳐요.”

“네.”

은별이에게로 다시금 다가온 아버지가 한 마디 했다.

“안 된대.”

“…….”

아내에게 한 마디도 못하는 현대의 아버지들이여! 힘내세요!

“흐흐흐….”

그리고 마침내 은별이 어머니가 민국을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민국은 더 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자 답답해졌다. 식은땀을 흘리는 민국을 보며 은별이 어머니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여쭤볼게 사위. 우리 은별이 가슴을 왜 만진다고 했어?”

“…예?”

“은별이 소중하게 여기겠다면서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런데 그때의 초심은 어디로 가고 왜 우리 은별이의 가슴을 만지려는 거지?”

“…….”

민국은 그제야 상황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아무래도 은별이 어머니가 은별이의 휴대폰을 들여다본 모양이었다. 말리려고 하는 은별이의 모양새를 볼 땐 은별이가 일부러 보여준 것 같진 않았다. 민국은 꿀꺽 침을 삼키고 이제부터 잘 설득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민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장모님, 아무래도 무슨 사소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소한 오해? 무슨 오해? 그리고 왜 여자 친구를 절벽녀라고 부르는 거니? 난 내 자식만은 절대 그런 소리를 듣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단다. …내 첫사랑이 나 절벅녀라고 뻥 차버렸었으니까!”

그 소릴 듣고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여보! 분명히 결혼 전에는 내가 첫사랑이라고….”

“닥쳐요!”

“…….”

입을 다무는 불쌍한 현 시대의 아버지, 힘내세요!

…민국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얘기했다.

“장모님, 장모님이 무슨 일로 화나셨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오해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오해냐고 묻지 않니 사위.”

웃는 모습이 마치 배트맨의 조커를 떠올리게 하였다. 어떤 변명 거리를 대야 하나 고심하던 민국이 곧 운을 띄었다.

“일단 가슴에 대한 건 얘기하기 길어질 테니까 뒤로 두고 절벽녀 발언으로 더욱 많이 화가 나신 것 같은데….”

“그래!”

“…절벽녀는 어디까지나 은별이와 저만의 애정 호칭입니다.”

민국의 대담한 발언이었다. 은별이 어머니가 쥐고 있던 빗자루를 순간 움찔했다.

“뭐?”

“호칭이에요. 은별이랑 서로 합의를 해서 그렇게 부르기로 했답니다. …정말이에요.”

“…….”

세상에 뭐 그딴 병맛 같은 애정 표현이 다 있단 말인가.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니, 사위?”

“믿으셔야 합니다, 은별이 어머니.”

“시끄러워!”

더 이상 들어줄 생각도 없다는 듯 구석으로 몰아넣은 민국을 향해 은별이 어머니가 달려들려는 찰나였다. 민국이 이제 끝장이다 싶어 속내로 ‘아노돼!’ 소리치는 가운데, 은별이가 후다닥 가로막았다.

“엄마!”

“뭐니!”

“하지 마 엄마! …민국이 말이 다 사실이야!”

“뭐야?”

덮썩 껴안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는 은별이를 내려다보는 은별이 어머니. 이윽고 은별이가 눈물이 글썽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모두 다 맞는 말이야, …민국이랑 진짜 그런 식으로 애정 호칭을 정했어.”

“…….”

일단 여기서 빠져 나가려면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자기 어머니가 사위를 죽이려는데 네이트 기사에 뜨는 것을 취미로 갖지 않은 이상 놔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게 정말이니?”

“…….”

은별이 어머니는 조금 진정된 모습으로 은별이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거짓말이란 구석이 나오는 순간 은별이도 끝장 낼 듯한 모습이었다. 은별이는 작심하고 연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야.”

“그럼 왜 호칭을 그런 걸로 지었어? 그것도 만날 가슴 수술하고 싶다고 했던 네가 왜 절벽녀 따위로 호칭을….”

“…….”

순간 은별이의 머릿속으로 ‘18!’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건 넘어가자. 은별이는 어떻게 둘러대야 할까 고심하다가 ‘실은….’이라면서 입을 열었다.

“서로 욕하고 즐기는 걸 좋아해서….”

“…….”

졸지에 변태가 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머니의 철퇴를 피할 수가 없다! 많이 진정된 모습으로 은별이 어머니가 고개 돌려 민국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시선을 마주하게 되자 민국이 움찔하며 놀라 보였다. 이윽고 은별이 어머니가 다시 은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민국이는?”

“…응?”

“사위도 별명이 있을 거 아니니?”

“…….”

은별이는 잠시 동안 무슨 별명으로 둘러대야 하나 고심하다가 고개를 내리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8…이라고.

“응?”

“18센치….”

“…….”

자기도 왜 많고 많은 별명 중에 그 별명으로 지은 것인지, 은별이는 다음 날부터 죽는 그 날까지 평생토록 후회한다.

“18센치요….”

18센치의 또 다른 의미로는 가정파괴범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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