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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7화 (27/369)

27화

<카오캬아쿠용커어>

컨텐츠도 없이 시작했던 방송인지라 오늘은 더 이상 할 것도 없었다. 현대왕은 방송을 종료했다. 오늘은 저번처럼 연이어 빡종을 하지 아니하고, 정상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작별 인사 후 방송을 종료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슬슬 가야할 때네.’

서민국은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은별이에게 찾아갈 저녁 시간이 거의 다가와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이래저래 별 일이 많았던 지라 여자 얼굴 보는 게 여러모로 질색이었으나, 오늘 은별이를 만나지 않는다면 내일 또다시 같은 현상이 반복될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민국의 고독한 운명이었다.

“흠? 이 녀석도 마침 방종하고 있네.”

은별 역시 방종을 하고 슬슬 쉬려는 모양이었다. 남고딩의 방송국에서 그녀가 방종하기를 관찰한지 5분, 마침내 시청자들에게 작별 멘트를 날리고 방송을 종료했다. 민국은 바로 그녀의 휴대폰으로 연락을 시도했다. 뚜루루루루루. 곧잘 그녀가 받아 보였다.

“뭐야? 나 자야 돼. 용건만 빨리 말해.”

마치 현대왕 미연시를 의식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서민국이 그에 대해 한 마디했다.

“미연시가 얼마나 재밌었으면 모든 루트를 다 깰 생각을 하냐?”

“응? 뭐라고?”

순간 당황한 은별의 목소리였다. 한참을 뜸을 들이다 그녀가 물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

“현대왕 미연시했다며, 그것도 골고루 모든 루트 다 타서 끝까지 깼다면서. 제작자가 아주 재밌게 해주셨다고 만족하더라.”

“…….”

아무래도 혼란 중인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반박했을 그녀가 이토록 침묵하는 거 보면 사실은 사실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뒤늦게 서야 반발을 하기 시작했다.

“호호호, 현대왕 님. 그게 무슨 개보린 씹어 먹는 소리세요? 저는 그쪽이 주연인 미연시가 제작되었단 소리 지금 처음으로 들어보는데요?”

“찬물 틀었는데 손 대보니 뜨거운 물 나오는 소리하네.”

“정말이거든!”

“야, 내가 채팅창에서 시청자들이 얘기하는 거 보고 네 방 가서 관람까지 했다.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아주 신명나게 몰입하더만, 뭐가 아니래 이 여편네야. 자꾸 뻥 칠래?”

“…….”

더 이상 도망갈 구석이 없는지 침묵하는 강은별. 서민국도 더 이상 그녀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어봤자 자신에겐 좋을 것이 없으니 그만하자고 생각했다.

“야, 아무튼 나 급하니까 지금 당장 너네 집 가서 가슴 좀….”

“아! 몰라 몰라! 나 이제 쉴 거야! 연락하지 마! 오늘은 안 돼!”

“헐…! 야! 나 가슴 안 만지면 위험한 거 알잖아!”

“몰라! 그게 내가 무슨 상관이야? ……씨, 이제 알겠네. 네가 그런 거지?! 내가 할 만한 컨텐츠를 찾지 못하고 있으니까 네가 시청자들 시켜서 나 속이고 현대왕 미연시 하게 만든 거지?!”

움찔!

“뭐시여, 그게 무슨 소리임?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아내는 거 보소!”

“시치미도 정도껏 때셔? …아주 좋으셨겠어요? 남자 둘이 엉켜서 헉헉거리는 거 재밌게 보고 있는 나를 보며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을 거 아냐?”

다시 한 번 움찔!

“…헤헤, 우리 고딩 누나 왜 그러세여?”

“나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다!”

“누나!”

“꺼졋!”

메몰찬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나 말고 너 좋아하는 여자 둘이나 있잖아! 걔네들한테 따로 부탁해서 하던가 해! 나 이제 안 해줘! 절대로! 진짜루!”

여기서 민국이 미처 생각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나말고’라는 대사였다. 그러나 현재의 민국은 그 대사를 신경 쓸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 이윽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뚝 전화를 끊어버리는 강은별이었다.

민국은 진짜로 당황해서 ‘이년이?!’하며 다시금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은별은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고 그건 문자 메시지를 삼십 통이나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였다.

[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

‘허… 얘 진짜 답장 안 하네?’

진짜로 위협을 느끼는 민국이었다. 이제 내일 아침이 되면,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아파오게 될 민국이었는데 은별이는 정말로 매정하게 그를 놔두고 잠이나 풀 잘 생각이란 말인가!

[야! 나 진짜 네 가슴이 필요해!]

[네 가슴을 한 시간만 주물럭거리고 싶어! 아니… 주물럭거리지 않아도 괜찮아, 손만 대고 있자!]

[네 가슴은 박카스 같은 가슴이야!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하여튼 그래!]

[내가 잘못했어! 누나! 내가 잘못했으니까 한 번만 봐쥬요 우쭈쭈! …야! 가슴 좀! 제발! …이 절벽녀야!]

반성하듯 구원을 요청해보지만 더 이상의 답장은 없다.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끈질기게 구애를 부탁했지만, 결국엔 민국의 부탁을 매몰차게 무시하고 잠에 푹 들어 보이는 강은별이었다.

‘에라이.’

민국은 은별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거 보면 확실히 오늘은 안 해줄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집에 찾아가보는 수밖에.’

결국엔 은별이를 따라 일찍이 취침에 들기로 작정하는 민국이었다. 어차피 내일 역시 황금 같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새민이나 예나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이 둘은 그때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다. 내일이 찾아오면, 민국이 보낸 휴대폰의 메시지가 두 남녀의 미래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끼칠지 말이었다.

…이윽고 아침이 찾아왔다. 은별은 모처럼의 주말이라고 똑같이 긴긴 잠을 자고 있었다.

실은 어제 민국의 연락 때문에 아침 일찍 깨어났어야 했고, 덕분에 잠도 제대로 못 잤던 그녀였다.

“은별이 아직도 자고 있니?”

푹 자고 있자니, 은별이 어머니가 문을 열고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제 네가 주문했던 운동 기구 여기에 두고 갈게?”

은별이가 구입한 2kg짜리 아령이 택배로 발송되었다. 은별이 어머니는 그것을 아침 일찍 들여와 은별이의 방에 두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얘는 왜 이런 걸 주문하는지 몰라. 여자아이답게 예쁜 거나 구입하지….”

은별이 어머니의 투덜거림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은별이는 이래 보여도 킥복싱 3년째를 배우고 있는 여성이었다.

여자 선수나 일반 남성과 붙어도 일말의 밀림이 없는, 그 정도로 운동에 조예가 깊은 여성이었는데 요즘 들어 근육이 쇠해졌다고 대뜸 아령을 주문한 것이었다.(현 자로 시작하는 맘에 안 드는 녀석이 있는데 요즘 너무 까불어서 패려고 샀다나 뭐라나…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찌 됐든 간에 참 귀여운 외모와는 맞지 않는 언벨러스한 취미였다.

우우우웅. “응?”그때였다. 은별이 어머니가 택배 상자를 책상 아래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은별이의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이 귀찮게 우우웅 거린 것이다.

은별이 역시 잠결에 짜증이 났는지 ‘우우웅….’하면서 뒤척이고 있었다. 괜히 잘 자고 있는 잠 깨일라, 은별이 어머니가 휴대폰을 냅다 짚어들어 책상으로 옮기려고 했다.

[야, 츤고딩 나 지금 너네 집으로 간다.]

“응?”

[가슴 잘 준비해놔.]

“……?”

연속으로 온 메시지가 휴대폰의 어두운 메인에 자연스레 뜨고 있었다. 은별이 어머니는 순간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어 멀뚱멀뚱 거렸다. 방금 전 누군가가 보낸 그 메시지의 내용은 무엇이던가? 은별이 어머니가 고개 돌려 자고 있는 은별이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우리 은별이가 누구에게 협박이라도…?”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 이런저런 짓을 강요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 순간 눈에 드리웠던 문자 메시지로 여러 복잡한 감정이 오간 은별이 어머니는 은별이에게 미안한 일이 되는 건 알지만 곧장 휴대폰의 메인으로 접속해 보았다. 다행히 비밀번호는 설정돼있지 않았다.

이윽고 은별이 어머니가 휴대폰의 메시지 함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있는 메시지들을 차례대로 읽어보기 시작했다.

“허억!”

그리고 메시지 함에 수북이 쌓여 있는, 한 사람이 보낸 메시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은별이 어머니는 머리가 띵해지는 줄 알았다.

[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가슴!]

그 사람이 첫 번째로 보낸 문자는 바로 그것이었다. 대뜸 가슴이라니!

[야! 나 진짜 네 가슴이 필요해!]

[네 가슴을 한 시간만 주물럭거리고 싶어! 아니… 주물럭거리지 않아도 괜찮아, 손만 대고 있자!]

[네 가슴은 박카스 같은 가슴이야! 백만 스물 하나… 백만 스물 둘… 하여튼 그래!]

[내가 잘못했어! 누나! 내가 잘못했으니까 한 번만 봐쥬요 우쭈쭈! …야! 가슴 좀! 제발! …이….]

가슴이 필요하다니!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싶다니! 가슴이 박카스라니! 가슴이 백만 스물 하나라니! 이것도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이겠지만,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의 한 문장이 한층 더 충격적이었다.

[절벽녀야!]

이 개나리 빰빠다귀 같은 새뀌는 대체 어느 집안에서 나온 새뀌란 말인가? 은별이 어머니는 이 문자를 보낸 녀석의 이름을 확인하려고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차마 형언할 수 없는 충격적인 감정을 느끼며 입을 딱 벌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민국이?!”

민국이라면, 우리 은별이의 남자 친구 아닌가? 혹시나 성이 서가 아니라 다른 건 아닐까 의심이 들어 확인해보았으나 틀린 건 없었다. 서민국이 맞았다!

‘도, 동명이인이라거나….’

차마 믿지 못하고 전화번호부를 훑어보는 은별이 어머니였다. 그러나 전화번호부에 있는 서민국은 달랑 그이 하나였다.

“…….”

메시지 함과 전화번호부를 모두 둘러본 은별이 어머니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은별이를 바라보았다. 자고 있던 은별이가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되었는지 ‘으음….’하면서 뒤척이더니 눈을 뜨고 있었다.

“응? …엄마? 무슨 일이야? 아침 일찍부터 내 방에 오고….”

“…….”

눈을 부비적부비적 거리며 태평하게 물어보는 은별이를 주시하며, 은별이 어머니가 척하고 그녀에게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은별이는 처음엔 뭔가 싶어 몽롱한 의식으로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곧 화면에 드러나 있는 게 서민국이 보낸 메시지임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이윽고 은별이 어머니가 사납게 얘기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니? 이 애 정말 니 남자친구 맞아?”

이젠 ‘우리 민국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대뜸 ‘이 얘.’라고 하는 거 보면 은별이 어머니는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차마 말을 못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자니, 딩동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은별이 어머니가 홱하고 열려 있는 은별이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현관문 너머로 서민국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별이 어머니? 저 민국인데요. 잠시 은별이 좀 볼 수 있을까요?”

“…….”

분노했는지 붉어져 있는 얼굴로 눈초리를 치켜뜨던 은별이 어머니! 은별은 본능적으로 큰 일났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래 보여도 은별이 어머니는 겉으론 개방적으로 보여도 속은 보수적으로 단단히 꽁꽁 묶여 있는 부모였다.

결혼 전까진 절대로 같은 방에서 자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그나마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민국이었기 때문에 인내하고 신뢰한 것인데! 민국이 보낸 문자들을 확인함으로서 그에 대한 이미지는 이미 바뀌었을 터였다!“어, 엄마!”은별이 소리쳤지만 은별이 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이윽고 은별이 어머니가 휴대폰을 확 내던졌고, 은별이가 침대에서 급히 빠져나와 그것을 들어 민국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뚜루루루. 바로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국이 진동이 울리는 것을 느끼고 휴대폰을 꺼내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우리 어여쁜 데레데레 누나님, 잘 깨어나셨습니까?”

평소였다면 ‘…뭐래, 이미지에 맞지 않게 오글거리는 짓 좀 그만하시지?’라고 시비를 걸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은별은 잠결에 깨어난지라 꽉 막혀 있는 목소리로 간신히 소리쳤다.

“…피해!”

“엉?”

대뜸 그렇게 소리치는 은별이의 대사를 이해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그러자 황소처럼 씩씩거리면서 민국을 노려보고 있는 은별이 어머니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민국은 ‘오늘은 은별이 어머니 몸상태가 왠지 안 좋으신가 보네.’하고 추측만 할 뿐, 정겹게 인사를 던질 따름이었다.

“안녕하세요 은별이 어머니. 은별이 남자친구 서민국입니다.”

깍듯하게 미소를 짓고 허리 숙여 인사했지만 왠지 받아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이상함을 느낀 민국이 슬슬 의아해하자니, 어느 순간 두 손에 빗자루를 쥐고 있던 은별이 어머니가 소리쳤다.

“남자친구 라는 놈이….”

한 때 검도 좀 해봤기 때문에 수직으로 천장을 향해 뻗어 보이는 은별이 어머니의 빗자루였다.

“우리 딸래미를 절벽녀라고 욕해!”

은별이를 절벽녀라고 욕한 것은 참을 수 있어! …하지만 은별이를 절벽녀라고 욕한 것은 참을 수 없다!

“…으아악!”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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