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여기로 오라 한 게 누군데.’
‘아, 맞아. 고맙다. 치료해줘서.’
‘……흥.’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던 두 사람이었다. 은별이 사납게 고개를 돌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민국 또한 고개 돌려 자신에게 시선을 조준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결국 말할 수밖에 없겠네.”
“…….”
침묵하고 있는 예나를 향해 민국이 찬찬히 미소 지었다. 결국엔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하지만 민국은 자신의 병에 대한 비밀이 결코 오랫동안 유지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언젠간 이런 일이 발생할 거라 유추하고 있었는데 그 시기가 굉장히 빨리 왔을 뿐이다. 민국은 자신을 바라보는 새민이와 예나 중, 유독 예나에게 시선을 집중한 채 입을 열었다.
“예나야. 에전에 네가 나 죽도록 아픈 병에 걸렸을 때 옆에서 간호해준 적 있지? 일주일 동안 아파하는 걸 옆에서 간호해준 적이 있잖아.”
“…응.”
글썽거리는 눈망울로 고개를 끄덕이는 예나와는 다르게 새민이는 지난 일에 대해서 언급하자 입을 꾸욱 다무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민이는 민국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옆에서 간호해주기는커녕 나 몰라라 행동하지 않았던가.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 양심이 찔리는 것이라. 민국은 말을 이었다.
“실은 그때 병이 다 나은 게 아니었어.”
“…정말이야?”
“응. 정말이야. 하루에 한 번씩 병원을 가면서 나아지지 않는 상태에 모든 걸 포기하려고 했어. 근데 의사 선생님이 마지막 날 치료 방법을 알아왔다면서 얘기를 해주더라고.”
“…….”
“그게 여자의 가슴을 만지면 낫는다는 거였어.”
예나의 얼굴이 붉어짐과 동시에 눈동자에 눈물방울이 드리웠다. 민국이 씁쓸하게 웃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처음엔 믿지 않았는데 나중에 도움을 받아서 만지고 나니까 정말로 아픔이 낫더라고. 원래 희귀병은 희귀한 방식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희귀한 행동을 통해 나아지는 경우가 잦대.”
“그래서….”
예나는 말을 잇지 않고 흘긋 은별이를 보았다. ‘그래서 다짜고짜 가슴을 내줬던 거구나.’라는 말을 속내로 생각하고 있자니, 민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렇게 되었던 거야. 여태까지 말 안 해서 미안해. 난 네가 걱정할까봐.”
“…….”
예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민국이 쓰러졌던 일을 말미암아 분위기는 아까 전처럼 소란스럽지 않았다.
많이 숙연해진 느낌이었다. 예나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아니야….’하고 소심하게 대꾸했다.
돌이켜보면 미안해해야 할 것은 예나와 새민이었다. 둘은 민국이 그런 병을 앓고 있단 사실도 모른 채 소리 소문 없이 집으로 찾아와 그의 정신을 사납게 만들지 않았던가.
예나는 꼭 죽을죄를 지은 죄인처럼 고개만 숙인 채 가만히 있다가 사과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해? 미안할 거 하나도 없는데.”
산뜻하게 미소 지으면서 천천히 손을 뻗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예나가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을 참지 못하고 흘렸다.
황급히 손을 들어 수습하는 예나. 두 사람이 따뜻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반면, 은별은 민국이 취한 행동을 보고 ‘이것 봐라?’하는 표정으로 무섭게 쏘아보았다. 다음으로 운을 띄운 사람은 새민이었다.
“미, 미안.”
새민은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자신이 없다는 것처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술이 완전히 깨버린 듯 시선을 뜬금없는 곳으로 조준한 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 이제 가볼게. 음… 술이 다 깨서.”
“그래? 그럼 학교에서 보자.”
미처 웃음 짓는 민국에게 눈길을 주지 못한 채 새민이가 제 발 지린 도둑처럼 허겁지겁 물건을 챙겨 자취방을 빠져나갔다. 이로써 민국의 자취방엔 강은별과 한예나, 둘만이 남게 되었다.
“나도 이제 갈래.”
은별도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역시 이곳에 있다간 두 사람의 닭살 돋는 멘트에 소름이 돋아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두 사람이 저렇게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심히 짜증을 치밀게 한 것이다. 구해준 게 누구인데 기껏!
“가려고? 고맙다.”
“…….”
배웅도 없다는 것에 더욱더 화가 났다. 은별은 대꾸도 안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쿵! 이로써 민국과 예나만이 남게 된 방안. 예나가 눈물지은 표정으로 다시금 민국을 바라보았다.
“그 병… 영원히 못 낫는 거야?”
“…….”
민국은 뜸을 들이다 대꾸했다.
“아마도?”
“…….”
예나가 고개를 내리숙인 채 침묵하고 있자니 민국이 다시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예나가 다시 한 번 ‘정말로 미안해….’하고 사과했다. 민국은 ‘뭐가 그렇게 미안해.’하면서 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애써 달랬다.
여기서 울었다간 괜히 민국에게 더 큰 폐만 끼칠 것 같아 예나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가볼게.”
“이제 가려고?”
“으응. 편히 쉬어.”
안 그래도 아픈 사람인데 더 이상 방해하긴 싫었다. 가능하면 오늘 함께 쭈욱 있고 싶은 마음이었으나, 그래도 일단 그의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는 예나였다.
이윽고 민국이 벌떡 바닥에서 일어나면서 현관문 앞까지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아침 햇살이 쨍쨍한 현재, 현관문의 유리를 관통하고 들어오는 햇볕이 예나의 몸을 밝게 비추었다.
신발을 신은 예나가 다소곳이 두 손을 모으고 민국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응. 나중에 또 보자.”
“응. …몸 조심해.”
그리고 예나가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어젖히려는데, 돌연 그녀가 놀리던 손을 멈추고 다시금 몸을 돌렸다. 민국이 물음표를 새기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 예나가 ‘저기, 민국아….’하면서 소심하게 운을 띄었다.
“왜?”
“…….”
무슨 연유에선지 길게 뜸을 들이는 예나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부끄러운 발언을 하려는 모양인데.
“아니야. 잘 쉬어.”
차마 그 발언을 입에 담지 못하고 예나가 급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민국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짐짓 웃음 지은 채로 계속해서 손만 흔들었다. 바깥으로 나온 예나는 한 순간 자신이 이성을 잃고 그런 발언을 할 뻔했음에 글썽거리는 눈동자로 얼굴을 붉혔다.
‘…앞으로 가슴은 내꺼 만지면 안 돼?’
다른 여자의 가슴에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도무지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 눈앞에서 현실로 실현되었으니, 예나는 민국의 상태가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한 편으론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나중에 두 사람이 또다시 만나 가슴에 손을 얹는 것은 아닐까? 그럼 만일 그때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무슨 깊은 관계에 도달할 지….
‘…….’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어 끔찍한 상상을 구석진 곳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채 자취방을 나오는 예나였다. 뚜벅 뚜벅.
“…….”
현관문에 귀를 기대고 있던 서민국은 예나의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져가는 것을 들으면서 몸의 긴장이 싸악 다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귓전에서 사라지는 순간, 민국은 현관문에서 귀를 때고 몸을 돌려 텅 비어 있는 자취방을 둘러보았다.
“으으으.”
민국의 어깨가 막 터지려는 휴화산처럼 부들부들 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터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스파르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진정한 자유를 되찾은 자유인의 모습이었다. 민국은 졸지에 바닥에 무릎까지 꿇고 두 손을 천장 높이 든 채 소리 지르고 있었다. 킹콩을 연상시켰다.
“씨밝! 대한민국 만만세! 지리겠소! 으아아아아! 만만세! 크아악! 캬악! 드디어 혼자다! 으악! 혼자라고! 밥 잘 먹었냐?! 크캬캬캿!”
정줄까지 놓은 민국이었다!
“흐으… 혼자 있기 진짜 힘드네!”
아침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팬티 바람으로 책상 위에 편의점에서 사온 빵들을 늘어놓은 채 고릴라처럼 냠냠 씹어 먹으며 키보드 두드리는 여유를 갖는 게 이토록 어려운 소망이던가!(?!)
“사람은 이래서 평범해야 되는 거야! 잘 나면 안 되는 거라고! 나처럼 잘나니까 나처럼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잖아!”
민국 특유의 잘난병이 돋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어쩐담?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새민이는… 아니 아니, 그건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만. 가슴을 만져야 치료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뭔가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표현은 안할 지 언 정 사람의 얼굴에 드리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예나는 필시 민국이가 다른 여자의 가슴을 만져야 한다는 사실에 거리낌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난감하게 되었네.’
민국은 예나가 자신에게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일반 하렘 소설에서 나오는 눈치 없고 둔한 남자 주인공처럼 멍청한 놈이 아니었으니까.
“뭐 지금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니까 일단은 넘어가기로 하고. …걔는 벌써 집으로 갔나?”
민국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바로 강은별이었다. 몇 십분이 걸리는 지역에서 오로지 민국을 살리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 와주었는데, 붙잡지 못한 것은 여러모로 미안한 짓이었다. 민국은 그녀에게 곧장 전화를 해보였다. 뚜루루루루루. 이윽고 신호가 울리고 그녀가 받아 보였다.
“병약 현대왕이네? 왜 전화하셨어요?”
“그새 삐졌냐?”
“무슨 소리람?”
“내가 다른 여자 머리 쓰다듬었다고 삐진 거 아니었어?”
“…하! 어이없다, 그쪽이 어느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든 내가 왜 그걸로 질투를 내고 시샘을 내야 하나요? 이상한 거 아니야? 나사라도 빠졌어?”
“나 원래 나사 빠진 거 모르냐?”
“알지. 미안해, 아는 사실을 말해서. 네 마음에 상처만 더 줬구나?”
“하지만 그런 날 좋아하는 네가 더 이상한 건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랄까?”
“…미친 새끼. 몸 관리나 똑바로 하시죠? 키만 멀대 같이 커가지고 천장에 머리라도 박으면 뇌출혈로 죽어버리겠네!”
“어허. 오늘따라 멘트가 왜 이렇게 사나우신가? 도와주었는데 답례도 안 해줘서 서운하셨쎄요? 알았다, 지금 지하철이지? 어디 역까지 갔어?”
“속 안 상했거든? 그리고 어디 역까지 갔는지는 왜 묻는데?”
“음. 내가 좀 자세히 생각을 해보았는데 말이야.”
민국은 진심 반 농담 반으로 입을 열었다.
“너 내 자취방에서 생활하면 안 되냐?”
“뭐…?”
순간 벙찌는 은별이었다. 그녀 딴에선 이런 식으로 고백(?)을 받을 거라곤 생각도 못한 것이다. 그러나 민국은 그게 뭐 대수롭다는 마냥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내 자취방에서 같이 생활하면 안 되냐고.”
“…지금 그쪽이랑 동거라도 같이 하라는 거야? 님 같은 변태님이랑 함께요?”
“뭘 좋으면서 팅기시나.”
“하!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야 근데 잘 생각해보았는데 너 진짜 내 자취방에서 생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네가 내 집에 있음으로서 나는 아파할 필요도 없이 언제든 원하면 가슴을 만질 수 있잖아.”
“어머 어머. 내가 이제 가슴을 내줄 것 같아요? 아까 님이랑 같이 있던 여자 두 분에게 부탁하시죠? 보아하니 그쪽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 두 사람이 날 좋아해?”
“그런 것 같던데?”
“훗. 그거야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난 그 녀석들이 날 좋아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 난 오히려 에베레스트보다 더 등산하기 어려운 절벽을 가진 평지 같은 당신을 선택하겠어.”
“…이 미친놈이!”
“왜? 정말 나쁘지 않은 제안이잖아? 난 너의 가슴을 만지고, 너는 좋아하는 나의 손길을 느끼고. 서로 이득을 보며 생활할 수 있는 최고의 해결책이라고.”
“꺼져 암내나는 새끼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락 소리치는 은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은별의 옆에서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있던 아저씨가 ‘아 거참! 조용히 좀 하슈.’하고 야단쳤다. 깜짝 놀란 은별이 ‘죄, 죄송합니다….’하고 사과를 하였고, 그것을 휴대폰으로 엿듣고 있던 민국이 푸핫 하고 웃음 지었다.
“아무튼 곰곰이 생각해봐.”
“아무튼 빨리 꺼져.”
그리고 통화를 끊는 은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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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너프 게임 건은 차후에 관련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 사정이 있었습니다....
오늘 편도 즐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