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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3화 (23/369)

23화

밀린 과제를 처리하느라 밤새도록 노고를 치루고, 잠도 제대로 못 잔 채 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은별은 밤늦게 집에 돌아와 취침에 들었다. 내일은 주말이었고 간만에 맘 편하게 쉴 수 있으니, 은별은 취침 시간 동안 피곤을 해소하며 즐기려고 했던 것이다. …불과 그 연락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우우우우웅.

“으, 뭐야…?”

잠에서 덜 깬 상태로 연락을 걸어온 발신자를 확인하는 은별이었다. 서민국! 은별은 일찍부터 잠을 깨우는 그의 연락에 인상을 찡그렸다.

‘웬 아침부터 전화래?’

설마 아직 하루치의 생명치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가슴을 만지고 싶다던가, 아니면 어느 말도 안 되는 구닥다리 같은 까닭으로 전화를 한 것은 아닌 가 의심이 들었다. 허나 그와 더불어 혹시나 데이트라던가… 소소한 연애를 목적으로 통화를 건 것은 아닌 가 기대도 느꼈다.

‘따, 딱히 그런 건 아니거든?’

자신의 마음을 애써 부정하는 은별이었다. 이윽고 ‘크흠!’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짐짓 신경질 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뭐야, 뜬금없이 아침부터?”

“야. 나 지, 지금….”

잘 잤느냐는 인사도 없었다. 말을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얘기하려드는 민국의 목소리에 은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진짜! …왜 그러는데? 너 설마 장난치는 거야? 강강에게 차인 거 가지고 나한테 스트레스 풀려는 거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뭔데 그럼!”

데이트를 제안하는 거라면 머뭇거리지 말고 남자답게 얘기하라 소리치고 싶은 은별이었다.그러나 발신을 건 당사자, 민국은 그녀의 기대에 어긋나는 말을 남기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살려…줘.”

다른 이가 연락을 걸어 그리 애원한 것이라면, 은별은 진심으로 심각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락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서민국이었다. 여자 비제이들을 상대로 온갖 악독한 짓을 구미기로 소문난 악랄한 존재!

“병신… 이젠 안 낚여.”

은별은 이제 그런 고전시대의 구닥다리 같은 수법에 낚이겠냐며 전화기를 끊었다. 만일 좀만 늦게 전화를 끊었더라면 민국의 근처에 있던 두 여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터였다. 이윽고 전화를 끊은 은별은 다시 잠에 들려고 눈을 감았다.

“…….”

하지만 무슨 연유에선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전 민국이 마지막으로 남긴 살려달라는 애원의 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어른거렸다.

“…으 진짜!”

결국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 시대의 츤데레 여대생, 강은별이었다. 그녀는 곧장 서랍 쪽으로 향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냥 네가 간절하게 애원하니까 가주는 것뿐이야. 낚이는 게 아니라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 급하다고 생각하는 머릿속과는 다르게 은별은 마치 좋아하는 남자에게 잘 보이려는 마냥 거울 앞에서 한참동안 얼굴을 꾸몄다.

“그냥 봐주는 것뿐이라고!”

그렇게 소리치는 은별의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이윽고 은별이 2층 계단으로 내려가자 거실의 소파 위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아침부터 어디 나가니?”

“잠시 나갔다 올게요. 친구가 보자고 해서.”

“아, 민국이?”

“…….”

“잘 다녀오렴. 엄만 너희 둘이 잘 되길 간절히 빌고 있단다. 솔직히 그런 남자애는 어딜 가도 보기 힘들잖니.”

차마 엄마에게 민국과 사귀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은별이었다. 후다닥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그녀. 곧장 지하철을 타고 민국이 사는 동네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하철 안에 있던 몇몇 남자 애들이 그녀를 흘긋 거리며 웅성거렸다.

“야, 쟤 예쁘지 않냐?”

“한 번 작업 걸어볼까. …아니다. 왠지 차일 것 같은데.”

“저렇게 귀여운 애는 다 임자가 있는 법이야. 내비 둬.”

남자가 여자의 전화번호를 딸 때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었다. 첫 번째는 정말로 예뻐서. 두 번째는 그렇게 예쁘지 않으니까 나도 딸 수 있을 것 같아서. 대부분 후자의 경우가 많은 편이었고, 여자들은 그러한 남자들의 본심을 모르고 떡 하니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은별이가 만약에 남자에게 번호를 따인다면 전자에 속하리라.

화장을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뚜렷한 이목구비와 귀여움이 느껴지는 분위기는 정말이지 남자들로 하여금 확실한 매력을 느끼도록 만들었으니까.

‘대체 왜 전화한 거람.’

지하철의 문에 달린 거울을 통하여 전환되는 바깥의 경치를 구경하던 은별은 상념에 잡혔다. 도대체 무슨 일로 연락을 건 것일까. 자존심을 접어두고 한 번 그에게 연락을 해본 은별이었으나, 민국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왠지 단순한 일 갖고 연락을 한 게 아닌 것 같단 생각이 서서히 머릿속으로 스며들자 은별은 급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다음 역은 ……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마침내 민국이 사는 동네의 역에 도착한 은별은 곧장 지하철에서 내려 개찰구로 향했다. 그리고 표를 찍자마자 후다닥 걸음을 옮겨 민국의 집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걔네 집이 어디였지?’

예전에 달랑 한 번만 찾아가본 적이 있는 민국의 집이었다. 언제쯤이었나? 예전에 같이 합동방송을 하다가 그녀를 자극하는 말을 해서, 은별이 현피를 약속하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던 게 첫 번째이자 마지막 방문이었다. 물론 그때 현피의 결과는 민국이 정강이를 한 대 맞고 부여잡는 것으로 끝이 났다.

‘대체 어디야?’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계속 찾아보아도 어디인지 도무지 기억도 안 나고, 여러모로 짜증이 나는 가운데 그를 향한 걱정이 한층 커져가는 은별이었다.

‘저기였나?’

그렇게 한동안 동네를 둘러보던 끝에 왠지 낯익은 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길을 쭉 가로지르다 보니 왠지 낯익은 건물 한 채를 발견했다.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벽면에 어린애들이 장난삼아 그린 낙서들로 가득하여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은별은 잠시 그곳을 보면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건물의 쇠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쇠문의 손잡이를 은근슬쩍 돌려보는데, 끼이익 하고 잘만 열렸다.

‘…여기네.’

드디어 기억이 났다. 민국이 사는 자취방은 1층 집과 2층 집의 문이 따로 달려 있었다. 그리고 2층으로 향하는 쇠문 너머로 기다란 계단이 있었다.

그 장면을 통해 은별은 이곳이 민국이 생활하는 자취방임을 확신했다. 이윽고 은별이 굳게 다문 입술로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을 점차 오르고 있자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전에 닿기 시작했다.

“민국아!”

“대체 왜 이래?!”

남자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연약하고 가냘픈 느낌이 나는 걸로 추정컨대 여자 목소리가 분명했다.

‘…한 명이 아닌데?’

그리고 그 목소리는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두 명의 것이 똑똑히 들리고 있었다. 은별은 현관문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바짝 굳은 표정으로 침묵하게 되었다.

‘뭐야. 역시 장난치려고 부른 거야?’

어이상실함과 더불어 실망스러워지는 은별이었다. 그러나 추측은 추측일 뿐, 실상은 전혀 다르리라. 은별은 찬찬히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열어보았다. 현관문 또한 열려 있었고, 그 너머로 자연스레 발을 들인 은별은 세 인영의 모습을 두 눈에 드리우게 되었다.

“민국아! 민국아!‘

허리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소유한 여자 한 명이 눈물지은 표정으로 쓰러져 있는 민국의 얼굴을 감싸 쥔 채 부르짖고 있었다. 그 외에 또 다른 여자 한 명은 꽤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현재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는지 ‘대체 뭐야?’라는 말만 중얼거리면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처음엔 그들이 자신을 속이려고 연기를 하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황으로 볼 때 농담이 아님을 깨우친 은별이 진지해진 표정으로 민국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민국아! 민국아!”

그리고 침묵하며 민국의 얼굴을 본 순간,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은별이 정색했다. 곧 그녀의 머릿속으로 깊은 의문이 솟구쳤다.

대체 왜? 은별은 예전에 민국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가슴을 만져야만 살 수 있는 병의 생명치가 낮았기 때문에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은별은 그저께 그가 죽지 않도록 가슴을 두 시간 동안이나 내주었었다. 그런데 어째서?

“비켜 봐요!”

은별이 후다닥 방안으로 들어가 민국에게로 달려갔다. 패닉에 휩싸인 여인과 울고 있던 또 다른 여인이 갑작스레 등장한 은별의 모습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민국의 근처에 다다른 은별이 다시 한 번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구…세요?”

예나가 물었지만 은별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국의 죽을 것 같은 상태를 보고 ‘이런….’하며 중얼거리는 은별이었다. 곧 새민이가 입을 열었다.

“구급차를 불렀어요, 곧 올 거예요.”

새민이의 말에 은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구급차요?”

“네.”

“취소해요.”

“…네?”

“취소하라고요. 구급차로는 소용이 없으니까.”

민국이 앓고 있는 희귀병이 무엇인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은별은 구급차로선 민국을 구할 수 없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은별은 더도 말고 곧장 기절한 민국의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포개도록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예나와 새민이가 일제히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무,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하시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 봐요.”

침착하게 타이르는 은별이었지만, 에나와 새민이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제지하려고 들었다. 그들의 제지에는 당황스러움도 담겨 있었으나 질투 역시 담겨 있었다. 은별은 계속되는 두 사람의 제지에 살짝 신경질이 난 듯 바락 소리쳤다.

“아! 이 변태는 이렇게 안 하면 안 낫는단 말이야!”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기절한 민국이를 상대로 이상한 짓을 하려는 거죠!”

“…가슴 내주고 있는데 이게 무슨 이상한 짓이야? 오히려 내가 당하는 거지!”

그렇게 예나와 은별이 옥신각신하는 사이였다. 가슴의 의지를 받아 서서히 상태가 완치되기 시작하는 민국. 그것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일 정도에 다다르자 새민이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상태가… 나아졌어…?”

은별과 옥신각신하고 있던 예나도 입을 다물고 민국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민국의 상태가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예나와 기나긴 말다툼을 벌이던 은별이 ‘후!’하고 크게 한숨을 내쉰 다음에 예나를 쏘아보았다.

“거봐요. 내 말 맞잖아요.”

“…….”

“나참. 이런 일로 잠도 못 자게 하고…. 졸지에 변태 취급이나 당하게 하고.”

예나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

“왜, 왜 민국이가… 그, 그곳에 손을 대고 있으니까 나아지는 거죠?”

그곳이란 어감이 참으로 야하게 들렸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예나의 모습에 왠지 모르게 불쾌함을 느낀 은별이 홱 하고 고개를 돌리면서 ‘몰라요.’하고 얘기했다.

“이따가 깨어나면 본인에게 물어봐요.”

“…….”

그렇게 새침하게 가슴을 내주고 얼마나 있었을까. 민국이 서서히 눈을 뜨려는 모양인지 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은별이 입을 열었다.

“깼어?”

민국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르기 어려운 산은 절벽산.”

“…….”

퍼억!

“캐핵!”

“등산객, 절벽산 오르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사망. 이란 기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

은별에게 이마빡 한 대를 맞고 나서야 눈을 뜨는 민국이었다. 민국은 힘 빠진 눈으로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예나와 새민이가 안도감과 더불어 믿기지 못하겠단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민국의 눈이 향한 곳은 은별이 쪽이었다.

“어?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

“왜 아직도 높다란 절벽에서 해어 나오질 못하는 거지….”

퍼억!

“네가 정말 추락하고 싶구나!”

“으앗.”

다시 한 번 이마빡을 맞고 나서야 완벽히 정신을 차린 민국이었다. 은별이의 가슴에서 손을 때고 빠르게 상체를 일으킨 민국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사태 파악이 덜 된 민국이었기에 한참동안 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람.’

“민국아….”

예나가 안도감과 슬픔이 어린, 하지만 한 편으론 이해할 수 없다는 눈동자로 민국을 바라보았다. 민국 역시 고개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나가 질문했다.

“대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엉?”

“어떻게 그, 그곳을 만지니까… 괜찮아지는 거야…?”

예나가 소심하게 질문했다. 잠시 머리가 굳어 있던 민국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 가슴?”

“…….”

“왜 가슴 만지니까 나아진 거냐고?”

“…….”

예나가 엄청나게 붉어진 얼굴로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국은 ‘어, 그러니까….’하면서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머리만 긁적거렸다. 갑자기 팔짱을 끼고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별에게로 시선이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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