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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2화 (22/369)

22화

그러나 민국은 설마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특히 이런 황당한 전개를 통해 말이다.

‘아니, 바람을 편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야 하지?’

두 여인의 증오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민국이 자문했다. 분명히 그는 오늘 하루를 게임만 하면서 줄기차게 보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볼 일이 있다며 느닷없이 방문한 사람은 이 둘 아닌가?! 민국은 계속해서 ‘호호호호.’,‘하하하하.’웃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얘기했다.

“예, 예나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하하하하. 왜? 무슨 일 없이 찾아오면 안 되는 거야? ‘소꿉친구’인데?”

유독 소꿉친구를 강조하는 예나였다. 그 말에 민국은 ‘아니 그건 아닌데….’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새민이가 질문했다.

“설마 민국이에게 이렇게 어여쁜 소꿉친구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은 거니?”

‘…내가 왜 너한테 말을 해야 하는데?’

핀잔하는 두 여인을 보며 민국은 ‘이 여자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나?’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국은 보자기로서 남는 게 이 상황에선 옳은 선택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괜히 보자기가 아닌 주먹을 내질렀다가 두 여인의 가위에 절반으로 동강날 수도 있었다.

이윽고 예나가 밥상에 있는 해장국 그릇을 발견하고는 혼잣말하듯 주얼거렸다.

“해장국이네. 집에서 해장국 끓여줬어?”

“…….”

“네~. 민국이가 워낙 요리를 잘하다 보니까 저 술 깨게 해주겠다고 해장국 끓여줬어요. 아주아주 맛있더라고요?”

“술?”

예나가 조금 불길한 얼굴로 새민을 쳐다보았다. 새민은 이겼다는 듯 미소 지으며 얘기했다.

“술에 취한 저를 쉬게 해줬거든요. 이 집.안.에.서.”

“…….”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였다.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잖아. 아침에 술에 취한 거 들어오게 해서 쉬게 해준 것뿐인데.”

민국의 빠른 해명에 예나가 ‘휴우.’하고 안도했다. 새민은 굳이 그걸 말할 필요가 있냐는 듯 새침한 눈초리로 민국을 바라보다 입술을 삐죽거렸다. 예나가 반격할 차례였다.

“대학생 학과 친구 분이라고 하셨죠?”

“네.”

“민국이가 저랑 1층 테이블에서 공부하며 시간을 보내거든요.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도 항상 거기서 풀어요. 그래서 물어볼 게 있는데 학과 과제 낼 때 항상 늦지 않고 전부 내는 식이죠?”

“…….”

예나가 하고자 하는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정확한 의미란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학과가 달라도 늘 민국과 함께 같은 테이블에 앉아 공부를 하는 사이니 네가 감히 견제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새민이가 의문이 점철된 눈동자로 민국을 돌아보았다.

“그럼 혹시 만날 약속이 있다 하고 빠졌던 것도 전부…?”

“아니야 새민아. 그땐 정말로 다른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갔던 것뿐이야….”

방송이란 약속 말이다.

“그래도 약속 있는 날에도 민국이는 늘 학교 끝나면 같이 가지 않겠냐고 제안해왔었어요.”

“…….”

잔에 있는 물을 뿌려 집에 난 불을 끄고 있는 마당에 기름을 뿌리고 앉아있는 예나였다. 정말이지 어른들 하는 말이 하나도 틀린 거 없었다. 여자 둘이 화가 나면 남자만 피해본다고 하지 않던가?

“아… 나 화, 화장실 좀 갔다 올게.”

“…….”

“…….”

일제히 고개 돌려 민국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었다. 민국은 그게 왜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짐짓 미소를 지으며 화장실로 급히 이동한 민국은 한숨을 푹 내쉬며 회의했다.

‘일어나자마자 이게 무슨 고생이람?’

정신산만한 아침이었다. 민국은 수도꼭지를 틀어 양동이에 물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칫솔에 치약을 담고 미처 닦지 못한 치아를 빡빡 밀어 닦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빨도 깨끗이 닦고 얼굴도 다시 한 번 세수를 마쳤을 때, 민국은 조금이나마 홀가분해진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 화장실 문을 열어젖히면 또다시 생지옥이 펼쳐질 것이었다. 민국은 문을 열었을 때 두 사람이 부디 사이좋게 화해했길 바랐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지나친 기대가 분명했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

“전 민국이랑 항상 지하철도 같이 타요. 민국이가 배려심이 많은 남자라서 사람들 많을 때 저 보호해주려고 막아서기도 해요.”

“어머 그러세요? 호호호. 근데 저는 학과에서 민국이랑 같이 수업 받으면서 대화 나눌 때가 무진장 많아요. 민국이 취미도 나름 알고 있고요?”

“저도 그건 진작 알고 있었죠.”

“호호호호.”

“하하하하.”

“…….”

생지옥이 다시금 도래했다. 민국은 화장실 문을 닫고 그들에게로 당도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예나와 새민이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민국이 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짐짓 웃음 지으며 민국은 예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예나는 정말 무슨 이유로 찾아온 거야? 정말로 아무 이유 없이 왔다거나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모처럼 대화 좀 나누려고 왔어. 심심하기도 했고.”

아직도 단단히 삐쳐 있는지, 예나의 목소리는 시무룩했다. 그런 예나를 뒤로한 채 민국은 새민이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새민이는 이제 술기운이 다 빠진 모양이네? 어때? 슬슬 집에 가는 게?”

“…….”

빨리 새민이부터 보내려는 민국이었다. 애초에 두 사람 중에 아끼는 사람이 누구인가 선택을 한다면 당연히 예나가 먼저 아니겠는가.

그녀는 민국이 아플 때도 옆에서 필사적으로 간호해주던 유일한 여자였다. 그에 반면 새민이는 자신이 아플 때 학과 친구들과 함께 쌀쌀맞게 외면했던 여자고 말이다.

물론 새민이는 예나처럼 깊은 애정이 없다 보니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여 짚어 볼 때 민국은 예나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민국이는….”

“…응?”

“내가 여기에 있는 게 싫어…?”

“…….”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 새민이였다. 민국은 갑작스런 그녀의 언행에 난감함을 느끼고 말했다.

“아니, 여기에 있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부모님이 걱정할 것 같아서….”

“나 자취방에 생활하고 있는 거 예전에 말했잖아. 까먹었어? 아님… 그래, 그냥 내가 싫은 거구나….”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버럭하고 소리 지르는 민국이었다.

“그럼 내가 좋아?”

“…….”

“응? 어때? 민국이가 생각하기에 난 어떤데?”

‘미친!’

민국은 머리를 박박 긁고 싶은 심정이었다. 본래 성격인 현대왕의 성질대로 행동했더라면 여기 있는 두 여자는 이미 독설이란 독설을 모두 귀에 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교 친구, 또 다른 한 명은 몇 년 동안 함께 해온 소꿉친구. 앞으로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한 순간의 충동은 기필코 참아야 옳았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 후우… 서민국! 넌 여기서 무너질 사람이 아니야!’

그건 그렇고 새민이의 질문에 아무 말도 않는 예나였다. 아마도 그녀의 질문에 민국이가 어떠한 대답을 내릴지 궁금해하는 것이라.

…실로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만일 여기서 좋다고 대답한다면 예나는 자신에 대해서 말한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실망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싫어라고 딱 꼬집어서 얘기를 한다면 같은 학과인 새민이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무슨 안 좋은 이미지로 낙인찍힐지 모를 실정이었다.

“어때?”

그 사실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질문하는 새민이었다. 민국은 정말이지 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조, 좋아.”

“…….”

“정말?”

“그래. …학급 친구로서 괜찮은 것 같아.”

학급 친구라는 단어를 빼먹지 않고 입에 담는 민국이었다. 그 단어에 잠시 실망하던 예나의 얼굴에 환기가 돌았고, 새민이는 급격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새민이가 또 다른 질문을 입에 담으려는 찰나에, 민국이 입을 열었다.

“자. …그건 그렇고 실은 내가 오늘 중요한 약속이 잡혀 있거든. 그래서 오늘 아무래도 두 사람 다 같이 못 있을 것 같아.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쿵! 그 순간이었다.

“…컥!”

갑자기 심장을 조여 오는 거친 고통에 민국은 말하다 말고 눈을 크게 뜨면서 가슴팍을 부여 잡았다. 그리고 앞으로 기울여져 쓰러지는 그의 모습에 예나와 새민이가 깜짝 놀라 그에게로 다가왔다.

“민국아!”

“왜 그래?!”

놀란 두 사람이 그를 흔드는 가운데, 민국은 ‘어째서?’하고 의문을 가졌다.

‘이 아픔은… 마치….’

민국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은별이의 가슴을 만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히 민국은 그때 은별이의 가슴을 두 시간 남짓 만졌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었을 때, 민국은 두 시간이 되기 약 2초 전에 가슴에서 손을 놓았었다.

‘아니 왜 고작 2초 가지고…!’

정확히 두 시간을 만진 게 아니라면, 이틀 간의 생명력은 보충될 수 없었다. 민국은 한 순간의 소홀한 행동으로 찾아온 죽음이란 재앙에 땀을 뻘뻘 흘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보이는 민국. 예나와 새민이가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할 줄 모르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민국은 고심했다.

이 두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말이다.

‘…안 돼.’

대뜸 가슴을 만지면 안 되겠냐고 요구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고, 사정을 말할 시간도 없었다. 민국은 결국 은별이에게 연락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민국은 간신히 휴대폰을 꺼내들어 은별이의 발신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그것을 귀에 부착하고 뚜루루루, 하고 울리는 신호음을 몇 번이고 기다렸다.

이윽고 막 잠에서 깬 듯한 음성으로 은별이가 운을 띄었다.

“음… 뭐야 뜬금없이 아침부터?”

“야. 나 지, 지금….”

“아 왜 그러는데? …너 또 장난치는 거지? 강강에게 차인 거 가지고 나한테 스트레스 풀려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뭔데 그럼!”

민국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잃어가는 의식을 붙잡고 마지막 한 마디를 전했다.

“살려…줘.”

그리고 쓰러지는 민국이었다. 휴대전화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은별은 ‘병신… 이젠 안 낚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양치기 소년처럼 은별이를 속여온 민국의 처참한 결말이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많이 늘어나면 두 편씩 연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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