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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21화 (21/369)

21화

<오메, 부러운 것.>

다음 날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푹 쉰 민국은 쨍쨍한 햇볕이 눈가에 드리우자 그제야 기지개를 펴 보였다.

“으으….”

새벽에 몇 차례 진동했던 책상의 휴대폰을 짚어들었다. 그리고 확인해보니 어제 술자리에 와달라고 간청하던 박새민의 연락이 무려 열통이나 와있었다. 민국은 혀를 내두르며 떡진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안 가겟다고 말을 했으면 그만 연락해야지.’

박새민이 왜 이토록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민국도 자연스레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민국은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크지 않은가? 심지어 교우관계도 좋았고 무슨 일이든 맡기만 하면 척척 해내는 믿음직한 모습도 보였다. 어느 여자가 이런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학과 여자랑 얽히는 건 도무지 싫다고.’

피해 주지 않고 공부에만 도움을 주는 대학생 친구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새민이가 노리고 있는 것은 필시 민국과의 연예 관계이리라. 민국은 여러 차례의 경험을 통해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만일 그랬다가 깨지기라도 해봐. 내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어?’

애초에 사귈 생각도 없었다만, 만일 사귄다 한들 후에 헤어지기라도 하면 학과에서 민국의 이미지가 어떻게 돌아가겠는가. 냉철하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아야 했다. 그는 절대로 학과에서 여자 친구를 사귈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이건 또 뭐야?’

휴대폰을 뒤적이는데 메시지 한 통이 와있는 게 보였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쿠왁이었다. 민국은 망설임 없이 녀석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해 보았다.

‘ㅋ.’

“…….”

보내온 문자의 내용은 달랑 자음 하나였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비아냥임을 민국은 선뜻 알 수 있었다. 대뜸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고 자연스레 민국의 입에서 ‘으아아.’하고 비명 소리가 쏟아졌다.

“아니! 진짜 이해가 안 가네. …대체 왜? 넷상에서 본 사람이 뭐가 그리 맘에 든다고?”

여자에게 단 한 번도 차인 적이 없는 민국으로서 어제의 일은 진심으로 충격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다른 남자의 고백은 받되, 현대왕의 고백은 받지 않았던 그녀가 남긴 진실 된 이유.

‘어느 남자든 현대왕 님보단 나을 것 같잖아요….’

그 의미심장한 대사는 이미 네이버에 현대왕을 검색하면 자동 관련 키워드로 등극돼 있었다.

‘과자보단 나을 것 같잖아요.’

‘마쉬멜로우보단 나을 것 같잖아요.’

그리고 현대왕의 방송국은 타 비제이들과 시청자들의 비아냥거리는 글로 가득했다. 어제 강강이 남겼던 마지막 명언(?)을 응용하여 장난을 쳐댔다고 하면 이해가 편할까. …별 것 아닌 장난이라 치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제 현대왕은 진심으로 멘붕한 상태였고 방송국에 장난을 치는 타 비제이들과 시청자들에게 일주일 동안 방송국에 들어올 수 없는 블랙을 선사했다.

‘이놈의 자슥들도….’

그러나 아무래도 그것만으로 일을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민국의 연락처를 알고 있는 혹자들도 똑같이 휴대폰에 메시지를 통해 장난을 쳐놓았던 것이다. 그것을 민국은 아침이 된 지금에서야 발견했다.

‘저격 고수님도 현대왕보단 나을 것 같잖아요.’

‘츤고딩도 현대왕보단 나을 거 같잖아요.’

‘콩딱지님도 현대왕보단 나을 것 같잖아요.’

휴대폰으로 테러한 이들 역시 일주일 간 차단을 선사하는 민국이었다.

“애휴.”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민국은 좌우로 허리를 돌려 보았다.

“컨디션이… 별로 좋진 않네?”

괜찮을 줄 알았건만 이상하게 몸이 많이 뻐근했다. 어제 과제를 단 번에 끝내서 그런 것일까? 은별이를 만나기 위해서 바깥에 나간 적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몸이 무거우니 민국은 의하했다.

‘가슴은 두 시간 동안 만졌으니까 이틀 동안 생명이 유지될 테고.’

오늘은 다시 은별이를 만나 생명을 보충해야 할 터였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정말이지 황당한 일이었다. 여자의 가슴을 만져야 하루치의 생명력이 보충된다니? 세상에 이런 막장스러운 등가교환이 어디 있겠는가.

‘목 좀 축여야겠는데.’

갑작스런 갈증에 민국은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어 그 안에 있는 물통을 꺼내 잔에 또르르 따랐다. 잔에 담긴 내용물을 입에 담고 목안으로 삼키는데, 똑똑똑하고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잔에서 멀어진 민국이 고개 돌려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누구지?’

아침에 민국의 집에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 전무했다.

‘설마 전에 왔었던 대순진리회인가?’

원래 대순진리회 사람들은 질기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어제 민국의 야동 발언을 통해 더 이상 접근하기도 꺼려졌을 텐데. 무언가 이상했다. 똑똑똑.

“누구세요?”

계속해서 현관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민국이 물었다. 그러자 머지않아 현관문 너머로 ‘민국아~.’하고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국은 익숙치 않은 그 목소리에 잠시 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박새민?”

“응~. 그래 나야~.”

느닷없는 새민이의 등장에 혼란스러운 민국이었다.

‘아니 이 여자가 어떻게 내 집을 알고 찾아온 겨?’

하지만 일단 그 의문에 앞서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있었다. 민국은 ‘자, 잠시만.’이라고 대충 둘러댄 뒤 서둘러 화장실로 가 세수를 하였다. 그리고 옷걸이가 있는 쪽으로 향해 바지를 갈아입었다.

팬티 차림으로 취침을 했기 때문에 그 상태에서 새민이를 만나면 무슨 이미지를 인식받게 될 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윽고 준비를 마친 민국이 ‘후우.’하고 숨을 내쉰 다음에 문을 열어젖혔다.

“세민아 무슨 일로….”

“하아~.”

“억! 새민아!”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민국의 품에 기대는 새민이었다. 인제 보니 새민이의 얼굴에 취한 흔적이 역력했다. 민국은 새민이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며 외쳤다.

“새민아. 취했어? 어제 몇 시까지 마신 거야?”

“음~ 두 시? 아님 세 시?”

손가락을 들어 두 개와 세 개를 펼쳐 보이는 새민이의 모습은 도무지 정상이 아니었다. 민국은 일단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집에 찾아왔고, 어제 몇 시까지 술을 마신 것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현관문을 닫고 그녀를 부축하여 집안으로 들인 민국은 곧장 침대 위에 그녀를 눕혀 보였다.

“…흐아.”

침대에 눕히자마자 민국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쏟아졌다. 양팔을 옆구리에 댄 채 새근새근 자고 있는 새민이의 모습을 내려다보자니, 민국으로선 답답할 지경이었다.

‘진짜 모처럼의 주말을 이런 식으로 보내게 만드네….’

“음~ 민국아~.”

“아, 왜? 왜 그래?”

뒤척이며 애교 부리듯 중얼거리는 새민이의 말에 민국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어 보았다. 그러자 눈을 감은 채 침대 위에서 가볍게 뒹굴거리던 새민기가 말을 이었다.

“나 목말라~.”

“…….”

뭐 해장국이라도 끓여달란 의미인가? 민국은 혀를 내둘렀지만 어쩔 수 없이 끓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그녀를 정신 차리게 하여 내보내던가 해야 할 것 아닌가.

민국은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라고 말한 다음 냉장고로 향해 해장국에 필요한 반찬거리를 꺼내 나열했다. 평소에 식사를 굶지 않도록 반찬거리를 사오던 민국이었기 때문에 굳이 바깥에 나갈 필요는 없었다.

이윽고 민국이 싱크대로 향해 해장국을 요리하기 시작하자, 새민이는 어제 술자리로 크게 피곤했는지 ‘쿨~.’하고 잠에 들었다. 그런 새민이의 모습을 돌아보던 민국이 혀를 내두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아마 선배를 통해 집 주소를 알았겠지.’

민국은 새민이와 한 집에 있으면서 그다지 음흉한 상상이라든가 질 나쁜 상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일반 남자들보다 스스로를 제지하는 인내심이 약 두 배는 강한 남자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침대에서 자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은 분명했다.

…이윽고 말없이 해장국을 요리하는 민국이었다. 약 30분 후, 완벽하게 완성된 해장국을 밥상에 놓고 민국은 자고 있는 새민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새민이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새민아, 일어나. 해장국 먹자.”

“으으으으음~.”

“새민아 얼른.”

민국의 재촉하는 목소리에 새민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취한 표정으로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밥상 쪽으로 내려앉혀 그녀가 먹는 것을 지켜보려고 하자, 새민이가 눈을 감고 ‘아앙.’입을 벌리며 소리쳤다.

“먹여줘.”

“…….”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민국은 무척이나 황당스러워 쓴 미소를 머금었지만, 일단 그녀를 정신 차리게 하여 집에서 내보내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숟가락을 들어 해장국을 떠먹여주기 시작했다. 새민이는 마치 두 팔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아기처럼 해장국을 마시면서 미소를 지었다.

“맛 괜찮아?”

“정말 요리 잘한다~.”

‘요리 잘하는 거야 나도 알지.’

속으로 자화자찬하는 민국이었으나 그것을 절대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이윽고 민국이 계속해서 새민이의 입으로 해장국을 떠먹여주는데 휴대폰이 우우웅 하고 울렸다.

민국은 누구인가 싶어 그 휴대폰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발신자가 예나임을 확인하고 손을 뻗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새민이의 손이 덥썩하고 민국의 옷깃을 잡았다. 자연스레 얼굴을 들이미는 새민이를 돌아보며 민국은 석상처럼 굳게 되었다.

“민국아~.”

“…….”

“너 나 어떻게 생각해?”

휴대폰의 진동은 이미 끊겨버렸다. 민국은 야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새민이를 어찌 해야 하나 순간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눈웃음 지으며 좋게 좋게 대처하려는 민국이었다.

“어떻게 생각하긴. 좋은 친구로서….”

“그게 다야? 음~ 실망인데? 난 그렇지 않단 말이야~.”

애교를 피우는 새민이의 모습은 정말 못 봐줄 정도였다. 아침에 컴퓨터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려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놓고 사람을 이토록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니. 여자보다 게임이 중요한 민국이었다.

“새민아, 일단 술 기운 때문에 정신이 없는 것 같으니까 해장국부터 먼저 다 마시고….”

“술 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로 이러는 건지 한 번 확인해볼래?”

그리고 새민이가 더욱더 적극적으로 민국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두 사람의 입술 간격이 가까워지는 순간, 민국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먼저였다.

“민국아…?”

신발장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익숙한 여자의 것이었다. 민국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민국의 입술로 천천히 그녀의 이름이 발음되었다.

“예나야?”

그리스로마신화에 출연하는 여신, 아프로디테는 너무나도 아리땁고 예쁘다 보니 건장한 남성들에게 무수히 고백 받게 된다. 심지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일도 번번이 발생했는데, 목숨을 걸고 붙었다가 숨통이 끊어지는 안타까운 결과도 이따금씩 일어났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을 독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그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고 이렇게 소리쳤다.

‘아! 예쁜 게 죄야!’

민국은 지금 이 순간 그 말을 응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 잘난 게 죄야!’

물론 그 속내를 겉으로 드러냈다간 두 여인에게 해코지를 당할 게 분명할 터니, 생각만 하는 민국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민국은 이런 식으로 자만하고 있을 처지가 안 된다고 통감했다. 도대체 왜? …여기 있는 두 여자는 무슨 까닭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것일까?

박새민과 한예나, 두 여인 모두 서로를 주시하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얼굴엔 눈웃음 가득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여자들 특유의 신경전임을 알고 있었기에 민국은 불안하게 생각했다.

“민국이 소꿉친구라고요?”

해맑게 웃음 그리며 먼저 입을 연 것은 박새민이었다. 그녀는 방금 전 민국이 끓여준 해장국을 통해 술이 깬 것인지, 아니면 예나의 느닷없는 등장으로 대화가 끊어져 술이 깬 것인지, 이유는 도통 알 수 없었으나 적의를 담아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예나도 마찬가지로 미소 지은 채 정중히 대답했다.

“네. 오랫동안 함께 해온 소꿉친구예요.”

“언제부터 함께 하셨어요?”

“초등학교 때 만나서 중학교 때 잠시 헤어졌지만, 고등학교 때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그 후 대학교도 같이 가게 되었죠.”

“그냥 지속된 우연일 뿐이네요?”

“우연도 계속되다 보면 필연이 아닐까요?”

“호호호호.”

“하하하하.”

“…….”

보통 만화나 드라마를 보면 이런 삼각관계가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민국은 설마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특히 이런 황당한 전개를 통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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