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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6화 (16/369)

16화

<정할 제목 없음. 선작 ㄱ>

“…….”

어쩔 때는 그런 민국이 너무나도 얄밉기도 했다. 고백하지도 않을 거, 뭣 하러 좋아하는 감정을 만들게 했는가?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고 오히려 냉철하게 대해줬더라면 그녀 역시 민국에게 이토록 강한 호감을 느끼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그런 예나의 현 감정을 알 런지 모를 런지, 민국은 그저 사람들의 무게를 혼자 버티며 죽치고 있었다.

예나는 자기도 모르게 불만이 서린 눈빛으로 민국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을 뒤늦게 통감한 민국이 천천히 고개를 내리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무의식적으로 불평 가득한 눈빛을 짓고 있었음에 예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렇게 예나가 사는 역에 도착했다. 예나는 내일 보자고 손을 흔들며 지하철을 내렸고 민국은 그런 그녀를 향해 미소 짓는 것을 잊지 않으며 작별을 고했다. 그렇게 지하철의 문이 닫힌 순간이었다.

민국은 ‘후우.’하고 한숨을 쉬었다. 지하철의 철봉 쪽에 몸과 머리를 기대고 유유히 자신의 동네에 도착하길 기다린 지 어연 30분. 마침내 지하철이 민국이 사는 역에 당도했다.

민국은 곧장 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 계단을 내려오고 있던 여자들 몇몇이 그런 민국을 흘긋 흘긋 곁눈질했다.

‘일단 집에 가서 과제나 마저 끝내야지. 할 게 생각보다 많네.’

민국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취방에 돌아가서 할 일을 생각하며 걸음을 움직였다. 그런 끝에 머지않아 집에 당도한 민국. 곧장 껴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던지고 민국은 책상으로 향해 수북한 과제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할 때의 민국은 여느 때랑은 다르게 진지한 눈빛이었다.

‘이건 그러니까.’

그렇게 과제에 몰두한 지 어느 덧 세 시간이 지났다. 창문을 본 민국은 바깥이 금세 어두컴컴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새삼스럽게 놀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볍게 두 팔을 뻗어 천장 높이까지 개운하게 기지개를 폈다.

“후우! 이제 방송할 시간인가?”

아직 정리해야 할 과제가 좀 남아 있었지만 새벽에 마저 끝내면 될 양이었다. 민국은 어차피 내일이 주말이니 만큼 좀 여유를 가지고 방송에 임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와 본체의 전원을 키고 작동되길 기다렸다.

이윽고 컴퓨터의 바탕화면이 등장하고 민국은 다시 의자에 착석하여 마우스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커서를 놀리면서 금방 파뿌리 TV 방송국에 접속했다. 이윽고 자신의 방송 클럽 사이트에 접속한 민국은 방송하기 버튼을 클릭하고 오프닝을 틀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프닝 곡은 슈퍼키드의 어쩌라고였다.

“어쩌라고 씨발 좆또~ 어쩌라고 씨발 좆또~.”

그리고 오프닝이 끝나고 방송을 시작하게 된 직후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맑은 저녁 폭풍처럼 나타난 현대왕입니다.”

[오오! 현대왕 님이다!]

[불쌍남 등장!]

네이버 검색어 실시간 1위 등극. 불쌍남 현대왕! 파뿌리 TV 비제이 중 최초로 타 비제이에게 진실 된 고백을 한 인물로서 더욱 명성을 얻게 된 현대왕이었으나 결코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어제 그 말라비틀어진 스켈레톤 새끼 때문에 제가 네이버 검색어 1위를 하게 되었죠. 야, 이정남. 이 스켈레톤 2호 같은 병뚜껑 새끼야.”

필시 스켈레톤이 의미하는 것은 쿠왁이리라. 졸지에 쿠왁 2호로 호명된 매니저 이정남이 [헤헤, 왜 그러세요 현대왕님.]하고 채팅을 쳐왔다.

현대왕은 ‘됐고 이거나 먹어라.’하면서 멋지게 벙어리를 10분간 선사해주었다. 그러자 곧장 현대왕의 아이디로 [ㅠㅠ]쪽지를 보내오는 이정남. 현대왕은 깔끔하게 무시해주었다.

“일단 늘 하던 대로 고민 상담을 보내온 쪽지부터 읽도록 하겠습니다. 음? 오늘은 고민이 아니라 질문이네요. 두 쪽지 다 한 분이 보내신 거군요. 본래 한 사람 당 쪽지 한 개만 읽어주는 게 정상이지만 이분 쪽지는 내용이 적은 편이니 두 개 다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왕은 곧장 질문 쪽지를 읽어 보였다.

“여자 친구랑 관계는 가져보셨어요?”

굉장히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시청자들은 어이없다는 듯 금세 웃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ㅋ]

[관계는 무슨!]

[까칠하게 대하기로 소문난 현대왕이 여자 친구를?]

현대왕이 대꾸했다.

“먼저 여자 친구가 있는지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니냐?”

시청자와 마찬가지로 현대왕도 똑같이 반발했다. 그러자 시청자들이 [ㅋㅋㅋㅋㅋ]하면서 웃어댔다. 이윽고 현대왕이 똑같은 시청자가 보낸 다음 쪽지를 읽기 시작했다.

“여자 임신시킨 적은요?”

어이가 없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먹지 개새끼들아!”

[ㅋㅋㅋㅋㅋㅋ]

[맞아! 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고민을 마친 현대왕은 ‘애휴’하고 한숨을 내쉰 다음 오늘은 무슨 방송을 할까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마땅히 혼자 할 만한 컨텐츠가 없었다.

뚜루루루루루. 그런데 그때였다. 돌연 누군가에게서 스카이 라이프로 연락이 온 것이었다.

접속하자마자 바로 연락을 걸어오다니. 과연 누구일까? 의문을 갖고 발신자를 확인한 현대왕이 그 닉네임을 중얼거렸다.

“콩딱지?”

닉네임, 콩딱지. 코를 팠다가 콩 같은 딱지가 나와서 그렇게 지었다고 하는 타 비제이였다. 콩딱지는 현대왕보다 두 살 어린 남자애였는데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하지만 막장 방송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현대왕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제대로 된 막장 방송을 진행하는 실력파 비제이였다.

갑작스런 녀석의 연락에 의문을 갖던 현대왕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형형! 나 엄청난 소식 접했어!”

“엄청난 소식 뭐?”

“글쎄! 그러니까!"

"응응! 뭔데?"

"그러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뭔데 뭔데?!”

“그러니까…………………… 히힛! 나 원빈 닮았음!”

"푸하하하하하하하핫! ……추천이라도 눌러줘야 하나?"

"붐업하고 가 신발아."

뚝하고 전화가 끊겼다.

“이년이?”

* *

굳이 현대왕이 먼저 연락할 필요도 없었다. 콩딱지가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형 미안 미안! 농담인 거 알지?”

“물론! 농담인 거 알지, 설마 내가 그런 거 가지고 삐쳐서 으름장 놓겠어? 내 성격 알잖아, 관대한 거.”

“하하! 맞아 맞아! 형은 고작 그런 거 가지고 삐칠 사나이가 아니지! 만약 그런 거 가지고 삐쳤으면 형은 속 좁은 남고딩이지!”

“콩딱지 이 고자 새끼야 평생 동안 모태솔로나 해먹어라.”

“응?”

“라는 분이 달풍선을 무려 다섯 개나 주셨네요. 배리배리 감사.”

“하하! 역시 형의 시청자들은 왠지 형을 닮아 유머러스한 재치를 가지고 있어! 나는 오늘도 배를 잡고 빵 터질 것 같아! 그런 예감이 드는 걸?”

“하핫!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런데 딱지야. 스카이 라이프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접속한 나를 향해 통화 버튼을 눌러 신호음을 기다리다가 곧 전화를 받은 나에게 무슨 중요한 용건이라도 있는 거니? 설마 아무 용건도 없이 연락한 건 아니겠지?”

“어떻게 알았어 형, 아무 용건도 없는데?”

“응. 잘 가.”

뚝하고 통화를 끊는 현대왕이었다. 이윽고 다시 콩딱지가 연락을 걸었다.

“형. 농담이고, 사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뭔데?”

“내가 아주 좋은 컨텐츠를 발견했거든. 아마 파뿌리 TV 현 방송계상 이만큼 획기적인 컨텐츠는 없을 거라 생각해.”

“우와, 궁금하다. 뭔데?”

“응. 한 번 보여줄게. 잘 봐?”

“그래.”

뚝하고 통화를 끊는 콩딱지였다.

“…….”

[뭥미?]

[아 저게 컨텐츠임?]

[ㅋㅋㅋㅋㅋㅋ 획기적인데?]

다시 전화를 거는 콩딱지였다.

“어때? 쩔지? 이거 진짜 좋은 컨텐츠 같아. 세상에 이만한 획기적인 컨텐츠가 있을까? 아마 현 시대상 존재치 않을 거라 생각해. 형은 어떻게 생각해?”

“정말이지… 콩딱지 너는 머리가 너무나도 기발한 아이라서 세상을 환하게 비춰줄 만한 스티븐 잡스 같은 인물은 개뿔, 콩딱지 이 씨바러마 용건이나 빨리 말해.”

가볍게 웃어 보이다가 말을 잇는 콩딱지였다.

“형 나랑 게임하자.”

“무슨 게임?”

“배틀 필드.”

게임 이름을 듣자마자 현대왕은 한숨을 쉬었다.

“FPS? 그 총 쏘는 게임?”

“응.”

“야. 내가 그거 저번에 방송했다가 헬기한테 미사일 폭탄 맞고 털렸던 거 기억 안 나냐? 내가 분명히 그거 방송했던 걸로 아는데. 그 게임에 별로 좋은 추억이 없어.”

“봤어. 나도 그때 형 방송 보고 있었거든. 어제 형이 강강님에게 고백했다가 차였을 때처럼 굴욕적인 방송이었잖아.”

[ㅋㅋㅋㅋㅋㅋ]하고 웃는 시청자들이었고 현대왕은 ‘이 새끼가?’라고 한 마디 한 뒤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왜 하필 그걸 하잔 건데.”

“형, 지금 내가 하려는 건 단순한 배틀 필드가 아니야. 난 지금 게임 룰을 하나 따로 만들었어. 그걸로 게임을 진행하려고 해.”

“또 무슨 룰인데?”

“그러니까.”

참고로 콩딱지는 기존 게임에 자신이 만든 룰을 덮어씌워 진행하기로 유명한 비제이였다. 그가 기존 게임에 룰을 창안하여 덧붙인 것만 해도 무려 열 다섯개나 되었는데, 그 게임 규칙 중에 이미 몇 개는 성공하여 많은 유저들이 따로 방을 생성하고 즐기는 실정이었다.

“배틀필드 저격모드야. 내가 지금 저격을 아주 잘 쓰는 배틀필드 저격 고수랑 연락을 했거든.”

“근데 뭐.”

“그 고수랑 이 대 일로 붙는 거야. 형이랑 나랑 팀을 하는 거고, 그 고수는 혼자서 우리 둘을 죽여야 해. 다만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건 돌격총이랑 권총. 이외의 것은 사용할 수 없어. 그리고 그 고수는 저격총밖에 못 사용하는 거야.”

“흠.”

콩딱지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고수랑 붙을 수 있는 기회는 딱 열 번. 형이랑 내 목숨까지 다 합하면 총 스무 번이야. 그 스무 번 동안 저격 고수를 한 번만 죽이면 게임에서 승리한다고 보면 돼.”

“목숨이 스무 번? 너무 많지 않나?”

“아니야 형. 형도 배틀필드 해봐서 잘 알잖아. 거기 맵 은근히 넓어. 심지어 저격을 상대로 돌격소총만 사용한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짓이야. 저격을 어디서 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면 우리가 이기기 힘든 게임이라고 보면 돼.”

이따금씩 지도에 상대가 있는 위치가 표시되기도 했으나, 저격 고수를 상대로는 근처에 접근하는 것도 힘들 터였다. 콩딱지는 그러한 까닭에서 목숨을 스무 번으로 설정한 것이라 설명했다.

“그렇다면야 뭐. 어차피 상대도 저격을 잘 다루는 고수라고 하니.”

“일단 한 번 만든 룰을 시험해보는 쪽으로 하고 문제 있는 부분은 이후에 고치도록 해야지. 하여튼 형아, 한 번 해보자. 배틀필드 얼른 깔아.”

“알았다, 기다려봐.”

어차피 현대왕도 마땅히 해먹을 컨텐츠가 없었다. 방송을 한 지도 어연 3년인 현대왕이었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은 쉬지 않고 방송해온 그였는데, 아직도 컨텐츠가 남아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요즘 현대왕은 혼자 방송을 하는 것보단 타 비제이들과 함께 방송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럼 나 잠깐 통화 좀 끌게. 고수분이랑 얘기를 해야 하거든.”

“그려.”

“뿡!”

‘뿡!’하고 콩딱지가 통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현대왕은 ‘하아’하고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시청자들을 향해 너스레 떨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보셨습니까? 가만히 있고 싶어도 남녀 불문하고 많은 타 비제이들이 이렇게 저에게 관심을 표현합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유머러스하고 끝내주는 인기를 누리는 저와 방송을 하고 싶은 것이죠. 여러분, 이게 바로 저의 능력입니다? …는 훼이크고 인기는 무슨, 한 순간 걷히는 거품이지. 슈발 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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