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어딜 만지긴! 내게로 돌아와!>
어저께는 기절한 상태였기 때문에 은별이의 가슴에 직접 손을 댄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상야릇한 기분을 그다지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두 사람 모두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그런 행위를 취하는 것이었기에, 아무리 다른 목적으로 행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이상한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별 수 없는 일이었다.
툭. 이윽고 찬찬히 뻗은 민국의 손이 은별의 봉긋한 가슴에 닿았다. 은별은 마침내 다가온 그의 손바닥의 감촉에 ‘읏’하고 작게 신음했다.
“오….”
“…….”
“오…… 오오…….”
“…….”
“야…… 진짜…….”
“…….”
“없다….”
퍽!
“때로는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에요. 현대왕 씨.”
“넵, 알겠습니다. 고딩님.”
민국은 고개를 꾸벅 끄덕이고 가만히 앉아 은별이의 가슴에 손을 포갰다. 그렇게 앉아있기를 어연 10분. 두 사람 모두 주변에 흐르는 야릇한 분위기에 얌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결국 그 분위기에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민국이었다.
“야.”
“왜.”
“너 요즘 뭐하냐?”
은별이 이해를 못하고 반문했다.
“무슨 뜻이야?”
“그냥. 요즘 뭐하고 지내는지 묻는 거지.”
민국의 조금 진지한 듯한 태도에 은별도 똑같이 임했다.
“학교 다니고 방송하고, 끝인데?”
“뭐 더 하는 거 없냐?”
“없어.”
“너 나중에 뭐하려고 그럼.”
은별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뭔가 할 거야.”
“뭐 할 건데.”
“어머 그걸 왜 알려고 하세요? 저한테 관심 있어요 현대왕님?”
“에헴. 어떻게 알았지?”
“…뭐?”
은별이 살짝 놀란 듯 반문했다. 그러자 민국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맞아. 나 너한테 관심 있어. 좋아해.”
“…….”
“는 훼이크.”
퍽!
“너 또다시 그런 장난쳐봐. 진짜 가버릴 테니까.”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아 그런데 진짜 할 이야기가 없잖아! 두 시간 동안 이러고 뭐하란 말이야?”
“정 대화할 게 없으면 가만히 있던지.”
“야, 근데 앉아있기 좀 귀찮아서 그러는데 허벅지에 머리 좀 대도 되냐?”
“…….”
은별은 진짜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하는 눈빛으로 민국을 노려보았다. 민국은 농담이라며, 여자가 뭐 그토록 잘 속아 넘어가냐고, 그래서야 남자 낚아서 잘 살 수 있겠냐고 일갈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너나 잘하세요.’였다.
“야.”
“또 왜.”
“우리 심심한데 거꾸로 말하기나 할래?”
“아하?”
“그래 그거.”
은별도 조금 심심했는지, 그리고 왠지 모르게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마음을 식히고 싶었는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녀가 물었다.
“몇 글자 제한으로 할 건데?”
“제한 없고 단어 아니라도 가능한 걸로. 아, 맞아. 이참에 노예빵으로 하는 거 어때?”
“노예? 지면 노예로 부려지는 거?”
“그래. 그걸로 하자. 내일이든 다음 주든 방송에서 한 번 노예로 부려질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거야.”
“하! 현대왕님, 저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 나 안 봐드릴 건데.”
“계란으로 바위 부수는 발언은 참 잘하십니다 츤고딩님.”
그렇게 두 사람은 눈을 마주했다. 어느 틈엔가 음란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서로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한 불타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민국이 물었다.
“누구부터 할까?”
“너부터 해.”
“좋았어.”
그리고 두 사람은 마치 합이라도 마친 사람들처럼 아하 송을 외치기 시작했다.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마저 쉬고 하나 둘 셋 얍! …정말이지 타인이 본다면 영락없는 커플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트륨. 아하!”
“튬트나. 아하! 마그네슘. 아하!”
“슘…………………………………네그마!”
아하!
“뭐야, 늦게 했잖아?”
“내가 뭘?”
“왜 질질 끄는데?”
“착각이겠지.”
“어이없어.”
그렇게 다시 진행되는 아하 게임이었다.
“감옥전함. 아하!”
“함전옥감. 아하! 야근병동. 아하!”
“동병근야. 아하! 스트레젠도. 아하!”
“도젠레트스! 아하… 아니…… 야!”
“왜?”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강은별이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민국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왜?”
“…스트레젠도가 뭐야 갑자기!”
“스트레젠도가 뭐 어때서?”
“어이없네! 어떻게 성인 애니를 말할 수가 있어? 그것도 대놓고 야한 애니를!”
감옥전함. 야근병동. 스트레젠도. 야애니 중 전설에 꼽힌다는 애니들이었다. (하나 제외된 애니라면 그녀x그녀x그녀?) 민국은 붉어진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는 은별을 주시하다가 곧 픽 웃으면서 얘기했다.
“야근병동 얘기한 게 누구인데 그러냐.”
“…….”
은별이 ‘으으….’하면서 어깨를 바들바들 떨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안 해!”
“그래~.”
“…….”
그렇게 시간은 유유히 흘렀다. 그래도 은별과 민국 둘 다 애드립을 잘 치는 편에 속했기 때문에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느 덧 두 시간이 금방 지났다.
“이제 됐나.”
은별의 가슴에서 손을 때는 민국이었다. 은별이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제 일어나자.”
“더 있다 안 가고?”
“뭘 더 있다가! 나 얼른 가서 잘 거라니까? 내일 수업 있다고.”
“쩝, 뭐 하긴 나도 내일 수업 있지. 그럼 얼른 가자.”
그리고 모텔방에서 나와 모텔 주인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이윽고 모텔 주인이 있는 곳에 당도했을 때, 모텔 주인이 두 시간 만에 나온 두 사람을 보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벌써 끝나셨나요?”
민국은 웃으면서 답했다.
“네. 실은 콘돔을 안 사와서요.”
“허, 그러시구나.”
대담하게 대꾸하는 민국의 모습에 모텔 주인이 푸훗하고 웃으며 잘 가라고 인사했다. 민국은 눈웃음 짓고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다음에 은별과 함께 모텔 밖으로 나왔다.
은별이 정말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을 수 있냐는 표정으로 민국을 쏘아보았다. 민국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은별이의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진짜 사올까?”
“…꺼져!”
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 *
다음 날이었다. 민국은 대학교에서 학과 수업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교수님의 강의에서 조금도 눈을 땔 생각을 않고 공부에 몰두하던 민국은 이내 강의가 끝나자 한숨을 쉬면서 책들을 가방 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평소에 민국을 사모하는 한 여학생이 이를 보더니 슬금슬금 접근해왔다.
“민국아, 공부는 다 했어?”
“응.”
“이제 뭐할 거야?”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나 집에 가서 하려고.”
그 말에 여학생이 두 손을 다소곳이 뒤로 모으고 방긋 눈웃음 지으면서 물었다.
“그럼 오늘 약속 잡힌 건 아무것도 없는 거네?”
“음.”
잠시 골똘히 생각해보던 민국이 곧 따라서 눈웃음 지으며 대꾸했다.
“그렇지.”
“그럼 혹시 오늘 오후에 술자리에 올 수 있어?”
“술자리에?”
“응. 아는 학과 애들이랑 모여서 놀기로 했거든. 여자 애들도 많아서 그러는데 올 수 있으려나?”
“여자 애들 많은 곳에 나 혼자 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그건 걱정 마. 안 그래도 남자 애들 몇 명 포섭 중이거든.”
눈웃음 지으며 계속해서 민국에게 제안을 하는 여학생의 이름은 박새민이라는 여자 아이였다. 저번에 과제가 너무 어렵다면서 자기 자취방에 와서 도와줄 수 없겠냐고 제안했던 그녀. 민국은 겉으로 그녀에게 짐짓 매너 있게 굴고 있었으나 실은 그다지 좋은 맘을 품고 있지 않았다.
민국이 죽을병으로 아파하고 있을 때 떠났던 일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그래. 알았어. 과제 끝나고 연락할게.”
“정말이지?”
“다만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보니 못 갈 수도 있어. 물론 그때도 연락할게.”
“응. 가능하면 와줬음 좋겠다.”
애교부리는 새민이를 향해 또다시 눈웃음 지은 민국이었다. 이윽고 민국은 한 손 가방을 들고 1층 계단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1층 테이블에 앉아 홀로 공부 중에 있는 예나가 보였다. 민국은 그제야 진정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우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뭐해?”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착석한 민국이 물었다. 집중하고 있던 예나가 민국의 기척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올리며 지그시 미소 지었다.
“빨리 끝났네?”
“오늘 교수님이 좀 일찍 끝내주셨지. 저번처럼 과제 중이야?”
“으응… 그냥 공부하고 있었어. 영어 공부.”
“아, 어학 연수 준비하고 있다고 했지?”
“으응.”
예나는 예전부터 영어를 배워 미국 곳곳을 여행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 낭만적인 꿈을 위해 예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따로 영어 학원을 다녀가며 공부에 집중했던 것이다.
이따금씩 모르는 게 있으면 민국이 도와주곤 했었는데, 이젠 남의 손을 빌리는 경지를 뛰어넘어 예나는 자동적으로 입에서 영어가 흘러나올 만큼 실력이 좋았다. 외국인과 일대일로 담소를 나눠도 될 정도라고 할까.
“오늘은 따로 수업 없지?”
“응. 여기서 조금만 공부하고 같이 가자.”
“알았어.”
민국은 한 손 가방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 적어놓은 내용들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테이블 한 곳에 앉아 각자의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 민국과 예나의 모습은 정말이지 한 쌍의 커플로 오해될 만큼 몹시 어울렸다.
“…….”
그로부터 한 시간이 흘렀을 즈음이었다. 시간을 절약할 겸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를 공책에 열심히 풀어내고 있던 민국은 맞은편에서 느껴지는 흐뭇한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턱을 괸 채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예나를 발견하고 곧 멍을 때렸다. 이내 정신을 차린 민국이 피식 미소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뭐야.”
“응?”
“끝났어?”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예나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끝났어.”
“끝났으면 말을 하지. 왜 가만히 있었어?”
“그냥.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
정말이지 저번에 간호해줬던 일을 계기로 민국은 예나의 웃음이 마치 천사가 미소 짓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라 생각하기 뭐했다. 그녀는 정말로 천사와 같은 고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제 일어나자.”
“응.”
테이블을 정리하고 일어나는 민국을 따라 예나도 가방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두 사람은 대학교를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개찰구로 진입하여 에스컬레이터에 탑승한 두 사람은 서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이제 몸은 정말 안 아픈 거 맞지?”
“맞아.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응. 그래도 다행이다. 정말 나아서.”
민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예나와 함께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렸을 때 바로 진입한 지하철에 들어갔다. 지하철 안은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몹시 움직이기 불편했다.
“여기에 있어.”
민국은 그녀를 끌어당겨 지하철 문 쪽의 구석진 곳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대로 예나를 벽에 두고 자신이 감싼 모양새로 가만히 서 있었다. 예나는 마치 연인들이나 할 법한 동작에 조금 쑥스러웠는지 눈을 내리면서 얼굴을 살짝 붉혔다.
이윽고 지하철의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이 탄 전철이 빠른 속도로 정거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민국의 보호를 받으며 편안히 서 있던 예나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불편하지 않아?”
“불편해.”
“그럼 내가 비켜줄게.”
“아니야. 왜 나가려고 해? 그냥 여기 있어.”
민국은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고 자리를 바꾸려는 예나를 제지했다. 사람들의 무게를 혼자서 감당하고 있는 민국의 모습에 예나는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믿음과 든든함에 강한 호감을 느꼈다.
“…….”
이윽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예나가 흘긋 눈만 위로 올려 민국을 곁눈질했다. 알 런지 모르겠지만 예나는 어릴 때부터 민국을 좋아하고 있었다.
친구로서가 아닌 이성으로서 말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다른 남자들이 고백을 해올 때도 받지 않았고 오로지 민국과 이어질 나날만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민국은 이상케도 지금까지 예나와 함께 하면서 단 한 번도 이성과 사귀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도 고백이라던가 하지도 않았다.
그건 예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