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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14화 (14/369)

14화

<어딜 만져! 어딜 만지냐고!>

그리고 민국은 여자가 건네준 메모장에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그리고는 ‘고마워요!’하고 후다닥 사라지는 여자를 향해 싱긋 미소 짓고 손을 흔들어주던 민국은 몸을 돌렸다. 어느 장소를 오가던 간에 이런 일은 민국에게 항상 존재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민국은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곧잘 알고 있었고, 여자에게 알려준 전화번호는 안타깝게도… 가짜 번호였다.

‘하도 이런 일이 많다 보니까.’

잘난 척이라면 잘난 척이겠지만 항시 길을 걷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기다 보니 민국은 저절로 피곤해지게 되었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은근히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에 단점으로도 작용할 수 있는 것이리라.

민국은 개찰구를 나왔을 때도 시선을 집중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며 은별이가 사는 집으로 움직였다. 이윽고 은별이의 집에 도착했을 때였다.

민국은 곧장 휴대폰으로 은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왔어?”

“어.”

“좀만 기다려봐.”

잠시 후 큰 저택의 문이 열리면서 은별이 등장했다. 은별이의 의상착의는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띌 정도로 맨살이 가득 드러난 패션이었다.

하얀 반팔 셔츠에 푸른 핫팬츠. 민국은 ‘호오.’하고 은별이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은별이의 옆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은별이의 어머니가 인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은별이 어머님.”

은별이 어머니는 굳이 나올 필요가 없는데도 은별이와 함께 나와 인사하고 있었다. 은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엄마답지 않게 낯선 행동을 하고 있는 모습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그럼 갔다 올게.’하고는 문을 닫아버렸다.

쾅! 이윽고 저벅저벅 마당을 걸어 나온 은별이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뚱한 표정으로 민국을 올려다보면서 턱짓을 한다.

“가자고.”

“으으음.”

“왜?”

“너 그렇게 입으면 춥지 않냐? 아직 밤이 아니라서 괜찮겠지만 돌아갈 때쯤이면 어제처럼 쌀쌀할 텐데.”

“하? 지금 남 걱정하시는 거예요? 어이가 없어라…. 됐고 눈으로 계속 흘긋 흘긋 훔쳐보지나 마. 너 아까 현관문에 있을 때 내 몸 스캔하던 거 눈치 채고 있었어.”

“야. 이건 남자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생리적인 현상이야. 여자가 짧은 옷으로 맨살을 드러내면 어쩔 수 없이 두 눈으로 꼼꼼히 관찰하게 되는 게 남자의 본모습이라고.”

“아… 지금 남자는 변태다, 라고 떠도는 말을 스스로 인정하는 거예요?”

“몰랐어? 남자들은 원래 다 변태야. 그래서 변태적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좋아하지. 남자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최고의 칭찬이거든.”

“…참으로 좋겠습니다!”

그리고 은별은 확 토라진 얼굴로 먼저 앞장서서 길을 나아갔다. 민국은 왠지 삐친 듯한 은별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은별이의 옆으로 다가간 민국이 슬쩍 입을 열어 질문했다.

“너 집에서 무슨 일 있었냐?”

“아니. 왜?”

“마치 집에서 뭐 안 좋은 일 경험하고 나와서는 화풀이하는 모습이라서.”

“행! 아니거든요? 자꾸만 걱정하는 척 하지 마시죠. …여자에게 고백하는 걸 함부로 아는 사람 주제에!”

으르렁거리듯 소리치는 강은별이었다. 민국은 은별이 뒤에 덧붙인 말에 더욱더 의아해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너 설마 오늘 내가 강강 에게 고백한 거 때문에 토라진 거냐?”

“…….”

“정말이야? 야, 왜 그걸 가지고 토라지냐? 그리고 내가 강강님에게 고백을 한 건 어디까지나 몰래카메라 계획 때문에 한 거잖아.”

“하! 아무리 몰카라고 해도 이성에게 고백을 하는 건 함부로 하면 안 되죠! 어떻게 남자가 여자에게 장난삼아 고백을 할 수 있어? 그러다가 상대방이 진심으로 승낙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실수해서 이미지 깎이는 거 두렵지 않아?”

“뭐 깎일 이미지가 있어야 깎이던가 하지. 이미 바닥인데.”

“…….”

민국 스스로도 현대왕 컨셉을 통해 이미 비제이의 막장 바닥에 다다라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은별은 다시 이유도 모르게 감정이 상해서는 인상을 찌푸리고 한 마디 했다.

“아무튼 너 진짜 남자도 아니야! 이성에게 고백을 한다는 건 정말이지 진심을 담아 해야 되는 거라고!”

“아니 그러니까 네가 그걸 가지고 왜 화를 내냐고.”

“아 정말!”

화가 나서 걸음을 멈추는 은별의 모습에 서민국의 머릿속으로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곧 ‘오호.'하고 서민국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은별이의 옆구리를 툭툭 팔꿈치로 건드렸다.

“너 설마 질투하냐?”

“…뭐?”

정곡을 찔린 듯이 은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맞구나’하고 생각한 서민국이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질투하는 거 맞네~. 왜? 내가 네가 아니라 다른 여자 비제이에게 고백을 했다는 게 굉장히 화가 나고 시샘이 생겨? 이야, 이러다가 나중에 강강님에게 욕이라도 하는 거 아닐까 몰라? 그분 너랑 다르게 굉장히 소심한 편인데.”

“……하핫,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에이~ 이제 와서 속여 봤자 늦었어. 너 질투하는 거 다 들켰거든.”

“…….”

“내가 몰카 하려고 고백을 한 건데 그걸 가지고 화를 낸다는 건 네가 질투한단 이유밖에 없잖아?”

“…….”

서민국이 또 버릇처럼 손을 뻗어 은별이의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민국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던 은별은 순간 화들짝 어깨를 들썩이며 놀랐지만, 이내 붉어진 얼굴로 가늘게 눈을 뜨면서 그를 짐짓 노려보았다. 민국은 그런 은별이가 마냥 귀여워서 미소 짓고 대꾸했다.

“우쭈쭈, 우리 은별이. 그렇게 질투가 났어요? 그렇게 내 고백이 받고 싶었어?”

“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우쭈쭈! 우리 은별이~.”

“아니라니깐! ……씨이!”

퍽! 하고 민국의 정강이를 앞발로 치는 은별이었다. 덕분에 민국이 ‘악!’하고 정강이를 잡고 동동 뛰어댔고 은별은 씩씩거리면서 몸을 돌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민국은 그런 은별이의 뒷모습 역시 너무나도 귀여워서 픽 미소 지었다. ‘야 같이 가.’라고 소리치면서 은별이의 뒤를 쫓는 민국이었다.

* *

모텔로 가는 길이었다.

“흠. 그런데 다시 모텔 가기는 좀 뭐하지 않나. 비용도 아깝고, 그냥 놀이터 같은 곳에서 하지?”

“미쳤어? 그러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할 건데?”

“뭐 어때? 요염한 커플인 척하면 되지.”

“요염한 커플은 개뿔…. 웃기고 있네.”

“어라? 오히려 네가 그 부분에서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뭐?”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타인의 오해를 통해 네가 그토록 바라던 사랑스런 나와 커플이 될 수 있잖아. 이참에 그 기회를 노려 고백이라도 해봐. 혹시 몰라? 내가 받아줄지.”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네요! 설마 내가 그쪽에게 고백이라도 할까봐요? 60억 인류가 하나 되어 비웃겠네!”

은별은 여전히 심술궂은 모습이었다. 실은 그녀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민국의 말대로 그가 다른 여자에게 고백을 했다는 것에 질투를 느끼고 화를 내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추측을 하고나니 돌연 불안한 감정이 솟구치는 은별이었다. 사실상 은별은 처음에 파뿌리 TV 방송에서 그와 합동 방송을 했을 때 단순한 컨텐츠로 이용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몇 번의 사투 끝에 실제로 만나게 된 두 사람. 그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연인 사이와 친구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돌고 있었다.

“몰라. 난 그런 오해 받기 싫으니까 모텔 가 그냥.”

“쩝. 그렇다면야 하는 수 없지.”

민국은 혀를 내둘렀다. 한 시간을 머물기 위해 모텔에 가는 것인지라 비용이 아깝긴 했지만 쓸데없는데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그 짓(?)을 해야하니 민국은 쿨하게 승낙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모텔 쪽에 당도했을 때였다. 늦은 저녁 시간, 서서히 모텔에 손님들이 차고 있었다. 모텔 주인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당도한 남녀 커플의 모습에 음흉하게 미소 지었다.

“둘이 좋은 추억 만들고 가요.”

“…….”

그렇게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모텔 주인에게 비용을 주고 열쇠를 받은 민국은 호실을 찾기 위해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은별이 방금 전 모텔 주인의 행동에 소름이 끼쳤다는 듯 이야기했다.

“뭐야 진짜…. 우리 자러 온 것도 아닌데. 변태 같아.”

“응? 뭐가?”

“방금 모텔 주인이 둘이 좋은 추억 만들고 가라고 했잖아. 어떻게 손님에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변태 같아 정말….”

“음? 난 모르겠는데? 난 워낙 순수한 아이라서. 그냥 모텔에서 가볍게 대화 좀 나누다가 가라는 거 아닌가?”

“…….”

“그런데 너 혹시 그 소리를 의식한 거야? 하아, 이래서 여자들이란 참… 번식을 위해 태어난 존재이니 만큼 남자를 위협하는 족손이 분명해. 언제든 남자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가 있어. 나도 항상 조심하고 다녀야지.”

“…씨.”

은별이 다시 민국의 정강이를 앞발로 차려고 했고 민국은 곧장 자신의 정강이를 두 손으로 보호했다. 차려다 만 은별이 민국의 열쇠를 가로채서 호실로 다가갔다.

그리고 호실의 문을 열고는 민국을 바라보며 시큰둥한 표정으로 ‘들어와.’라고 소리쳤다. 민국은 그런 은별을 바라보며 유유히 걸음을 옮기다가 ‘아!’하고 손뼉을 짝 치며 탄성을 지었다.

“맞아! 하나 까먹고 안 사왔다!”

“뭘?”

“콘돔. 아니면 피임약?”

“…….”

은별이 진짜 표독하게 민국을 노려보았다. 민국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열어둔 방안으로 유유히 들어갔다. 은별이 그런 그의 뒤를 따라서 방안으로 들어갔고, 쿵하고 둘이 들어간 모텔 문이 닫혔다.

온화한 모텔 바닥. 하나의 큼지막한 침대가 있었고, 작은 서랍과 조명등, 장롱이 모텔 방안에 있는 물건의 전부였다. 은별은 더 이상 길게 끌기도 싫다는 듯 바로 침대에 앉더니 운을 띄었다.

“빨리 만져.”

“응? 준비할 시간도 없이?”

“뭔 준비야. 자꾸 장난칠래? 그냥 빨리 손이나 대고 있으라고. 앞으로 두 시간이나 대고 있을 건데 할 거면 빨리 해야지.”

“두 시간? 원래 한 시간 하려던 거 아니었나.”

“두 시간 해야 이틀 동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 내일 그냥 쉬고 싶으니까 오늘 두 시간 연속으로 해. 날마다 이렇게 만나는 것도 피곤하잖아.”

“헐! 츤고딩답게 팅기는 거보소.”

“…뭐래.”

“아니면 밀당하자는 건가? 실은 ‘아! 난 민국이 없이 1분 1초도 생활할 수가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민국의 마음을 독차지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밀당을 할 필요가 있어! 민국이와 잠시 동안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건 그와 평생 동안 함께 하기 위한 계획이야! 참자! 참자 강은별!’이라고 속마음으로 중얼거리는 거 아니야? 헤헤, 귀여운 녀석.”

“자꾸 개소리 좀 하지 말고 빨리 만지기나 해!”

버럭 소리치는 은별이었다. 사실 상식선에서 타인이 이 상황을 육안으로 구경하게 된다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리라. 연인 사이도 아닌 두 사람. 그리고 그 두 사람 중 여자 쪽에서 자신의 가슴을 빨리 만지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민국도 더 이상 장난칠 생각이 없었는지 쩝하고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서랍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침대 쪽으로 와서 옆에 앉아있는 은별을 따라 착석했다. 그러자 은별이 조금 진지해진 표정으로 민국을 쳐다보았다. 민국은 대뜸 여자의 가슴에 손을 올릴 생각을 하니 주저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뭐해? 빨리 만지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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