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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8화 (8/369)

8화

<배우세요, 이게 밀당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자마자 격심한 배신감에 화가 났습니다. 지금은 그 녀석과 대화도 않고 절교한 상태입니다. 참 걱정입니다. 친구 문제도 친구 문제지만, 그 녀석이 사귀는 아이에게 제가 좋아했단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정말로 걱정입니다. 도와주세요, 현대왕님.”

채팅방에선 이미 [자작나무]라는 단어가 남발되고 있었다. 현대왕은 그러거나 말거나 가볍게 헛기침을 한 뒤, 고민에 대해서 상담을 해주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고민 쪽지를 보낸 사람에게 지적한 것은 전혀 쌩뚱 맞는 것이었다.

“뒤질래요? 아니, 친구 지갑을 허락도 없이 왜 뒤집니까? 친구 맞아요? 어떻게 허락도 없이 남의 지갑을 뒤질 수 있냐, 이 말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내 물건 허락도 없이 만지는 건데 저 그런 친구 정말로 싫어요. 왜? 내 여동생이 그랬거든요. 쒯 더 시스터! 여하튼 그쪽이 그 모양이니 그런 친구랑 어울리는 겁니다.

그 친구 봐요, 애초부터 그쪽 가지고 놀려고 속인 거잖아요? 어찌 보면 잘 된 겁니다. 이제부터 그런 친구와 어울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개선하고 공부하도록 하세요. 초등학교 6학년이면 연애는 제쳐두고 공부하는 게 짱입니다 짱. 괜히 어릴 때부터 재수 없는 인간관계에 얽매여서 괴로워 할 필요도 없어요. 공부를 하면 두 가지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부모님의 사랑이고 두 번째가 이상한 녀석들과 얽힐 가능성이 적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공부하세요. 결론은 공부입니다.”

그야말로 막무가내 상담이었다. 애초부터 현대왕 컨셉이 싹수가 노란 편이었고, 대부분 쪽지를 전송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고민을 상담받기 위해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시청자들도 오히려 현대왕의 이상하지만 논리 있는 상담에 화를 내기 보단 웃기다면서 [ㅋㅋㅋㅋ]를 써댔다.

“흠… 일주일 동안 상담을 하지 않았으니 하나만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현대왕님. 저는 매주 현대왕님의 방송을 챙겨보고 있는 극성팬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는 제 프로필을 타인이 볼 때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습니다. 일단 저는 스물여섯 입니다. 그리고 사무직을 하고 있고 월급은 180씩 받고 있습니다.

키는 170cm이고 얼굴은 평타 치는데 이 정도면 객관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인가요?”

현대왕은 말을 이었다.

“당장 내일 뒤져도 이상할 게 없는 정황이군요. 완벽한 자살 알리바이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채팅방 사람들은 더욱 크게 웃어댔고, 어느 덧 본방의 인원은 가득 찼다. 역시 비제이 현대왕 답게 인기도가 장난 아니었다.

이미 현대왕이 본방을 하고 있단 소식이 파뿌리 TV 방송국에 널리 알려져, 그의 본방을 보기 위해 중계방까지 여럿 차려져 있었다. 그 중계방 역시 많은 시청자들이 관람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현대왕은 지금까지 읽은 두 개의 쪽지를 삭제했다. 그리고 현대왕 클럽 사이트로 접속하여 채팅방 사람들이 그 사이트를 볼 수 있도록 캠을 설정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흠, 그래 그게 좋겠어.”

그리고 현대왕은 스카이 라이프에 접속했다.(스카이 라이프 : 컴퓨터로 상대방과 연락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휴대폰과 차이점이 있다면 사용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현대왕은 스카이 라이프에 접속 중인 친구 중 한 명을 골라 연락했다. 현대왕과 마찬가지로 파뿌리 TV에서 꽤나 유명한 비제이였다.

뚜루루루…. 몇 차례 신호음이 울리고, 이윽고 비제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하냐.”

“뭐야 서민….”

“엇험!”

“…현대왕이냐? 왜 지금까지 연락이 없었어?”

“그냥,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

비제이 쿠왁. 현대왕이 실친으로 지내고 있는 비제이 중 한 명이었다. 처음엔 합동 방송을 하면서 관계를 쌓기 시작했는데, 워낙 마음이 잘 맞아 실친으로 발전한 사이였다. 이따금씩 집 근처로 찾아가 포장마차에서 술도 마시는 술친구이기도 했다.

“이야기 듣기론 어떤 귀여운 여자애 간호 받으면서 잠시 쉬었다는데.”

“뭐시여, 도방하고 있었어?”

“엉. 너 오랜만에 들어와 가지고 흥미삼아 도방하고 있는데 네가 연락한 거야.”

여기서 도방이란? 이미 방송을 진행 중인 비제이가 타 비제이의 방송에 몰래 들어가서 관람하는 것을 의미했다. 현대왕은 본방에서 보고 있냐 중계방에서 보고 있냐 물었다. 그러자 중계방이라고 답하는 비제이 쿠왁이었고, 현대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했다.

‘본방이었으면 벙어리 먹였을 텐데.’

벙어리 : 채팅방에서 채팅을 못하도록 만드는 기능이었다. 물론 현대왕이 쿠왁에게 벙어리를 사용하려 한 것은 어디까지나 장난에서였다.

“쿠왁 뭐해.”

“사이퍼즈.”

“또 사이퍼즈?”

“엉.”

“또 까를로스?”

“오키도키.”

“오키도키?”

“오키도키도키.”

“오키오키오키.”

그렇게 서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오간 두 사람. 이윽고 현대왕이 말을 이었다.

“나도 간만에 사이퍼즈나 해볼까?”

“너 사이퍼즈 급 낮지 않냐. 전에 시작했다가 바로 관뒀으면서.”

“아, 3D 게임하긴 하는데 사이퍼즈는 워낙 콤보 형식이니까 불편하잖아.”

“그래도 예쁜 캐릭터가 많잖아.”

“그 말은 맞음.”

그건 현대왕도 납득했다. 사이퍼즈에 나온 캐릭터는 하나같이 멋있고 예쁜 캐릭터가 많았다. 오죽하면 몇몇 갤러리 사이트에서 ‘사이퍼즈 --캐릭터 망가 없어요?’하고 묻는 게시글이 잦을 정도니.

“야.”

“아오 씨바!”

“헐? 방송 중에 욕하냐 지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캐릭터 이름이 씨바다 씨바. 욕하는 거 아냐.”

“아 그래? 그런 캐릭터도 있었구만.”

아무튼 간에 일주일 만에 접속했건만 할 게임이 없는 현대왕이었다. 이미 기본 FPS 게임은 방송으로 오래 전부터 해왔으며, 명성이 자자한 1인용 게임 역시 수도 없이 플레이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RPG 게임이나 콤보 형식으로 진행하는 게임 뿐이었다.

허나 RPG 게임은 시청자들 태반이 지루하게 여기고 현대왕도 그런 게임은 곧잘 살릴 능력이 없었던 지라 포기한 상태였다. 현대왕은 이참에 쿠왁과 사이퍼즈나 한 판 해보자고 생각했다.

“야.”

“엉?”

“나도 사이퍼즈 할 테니까 같이 하자.”

“…엉?”

“나랑 같이 하자고. 사이퍼즈.”

“뭐라고?”

“같이 하자니깐 사이퍼즈.”

“야. 잘 안 들린다. 스카이 라이프 껐다가 다시 들어올게.”

“어? 어.”

이윽고 쿠왁이 스카이 라이프 통화를 종료했다. 현대왕은 침묵하면서 그가 연락하기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보아도 쿠왁에게 연락이 없었다.

현대왕은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연락을 안 하는 거람.’하면서 유유히 채팅방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쿠왁의 방을 훑어보고 돌아온 몇몇 사람들이 ‘현대왕 차였다!’소리치는 게 육안에 드리웠다.

[쿠왁이 현대왕이랑 사이퍼즈하면 진다고 혼자 하겠대요 ㅋㅋㅋㅋ.]

[대박 ㅋㅋㅋ 현대왕 차임?]

“…….”

워낙 낚청자(낚시하는 시청자)들이 많다 보니 채팅창에서 하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현대왕은 쿠왁에게 곧장 스카이 라이프로 다시 연락을 취해 보았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

[차였음 ㅋㅋㅋㅋ.]

현대왕의 오기가 불타 오르는 순간이었다. 어디 무시하나 무시 안 하나 보자면서 현대왕은 쿠왁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고 약 30번의 연락 끝에, 쿠왁이 포기한 심정으로 연락을 받았다.

“어, 여보세요. 아 이제 좀 들리네.”

“야. 시청자들이 너 내가 사이퍼즈 못하니까 같이 안 하려고 그 핑계 댄다는데 레알임?”

“어? 하하! 그럴 리가? 너 친구 못 믿냐? 하하!”

“그렇지? 후훗, 그래! 난 너를 믿고 있었어! 쿠왁!”

“하하하! …촌나 조쿤!”

“하여튼 같이 할래? 안 할래?”

“…….”

“같이 할 거지?”

만일 쿠왁이 상대하는 인물이 친하지도 않은 상대였더라면, 쿠왁은 ‘꺼져’라는 한 마디로 이 모든 상황을 종료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왕은 실친이었고 여러 가지 속내를 진심으로 얘기도 많이 해왔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을 상대로 ‘너 게임 못해서 안 하려고!’라고 얘기하기도 뭐한 것이었다.

이윽고 쿠왁이 말을 더듬거리며 얘기했다.

“그, 그래. 같이 하자.”

“오키도키.”

“오키도키도키.”

“그럼 사이퍼즈 깔 때까지 잠시 기다려. 금방 깔 거야.”

“어.”

그리고 스카이 라이프를 끈 현대왕은 곧장 사이퍼즈를 다운로드 받기 위해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러다가 여러 홈페이지 아이디로 사이퍼즈에 로그인할 수 있음을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거 네이버 아이디로도 게임 가능한 겨? 그럼 네이버로 해야지.”

네이버 아이디로 사이퍼즈에 접속한 현대왕은 그것을 다운받으면서 잠시 채팅창을 구경했다. 채팅창에선 사이퍼즈에 관심을 갖기 보단 현대왕이 사이퍼즈를 하면서 무슨 환상적인 광경을 만들어낼지에 호기심을 가지는 모습이었다.

현대왕은 잠시 사이퍼즈가 다운로드 되는 동안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고심하다가 츤고딩이 방송 중인 것을 발견했다. ‘호오.’하고 소리 낸 현대왕은 픽 웃으면서 스카이 라이프로 츤고딩에게 연락했다.

뚜루루루…. 인터넷을 둘러보며 방송 중이던 츤고딩은 현대왕의 연락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받아 보였다.

“…왜!”

“우쭈쭈. 우리 츤고딩, 아직도 어제 일로 화나있쪄요?”

“꺼졋!”

뚝하고 스카이 라이프를 끊어 버리는 츤고딩이었다. 허나 현대왕은 근성 가이로서 그 정도에 굴할 인물이 아니었다. 다시 츤고딩에게 연락을 하였고, 그것을 또다시 받아 보이는 착한 츤고딩이었다.

“나 방송 중이라고. 뭐하자는 거야 지금?”

“뭐하긴, 남자가 존심 두고 먼저 연락하면 고마워 할 줄 알아야지. 어디 여자가 남자가 전화하는데 팅기고 있어?”

“…지랄. 용건이 뭐냐고.”

정말로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현대왕은 그런 츤고딩을 향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다음에 얘기했다.

“할 거 없으면 나랑 같이 게임이나 하자.”

“둘이서 하자고? 내가 너랑 둘이 게임해서 불거진 오해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아? 너랑 게임하고 나면 꼭 애인이니 뭐니 같잖은 소문이….”

“허허, 나랑 둘이서 게임하고 싶냐?”

“…지랄!”

“둘이서 게임하는 거 아니고 셋이서 하는 거야.”

“…응?”

“쿠왁도 같이 하는 거. 어떠냐?”

“…….”

츤고딩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됐어. 나 그 사람 싫어.”

“아, 전에 싸운 거 아직도 화해 못했냐?”

“몰라. 화해고 뭐고 요즘 서로 말도 안 하고 신경도 안 써.”

타 비제이 발언은 많이 해봤자 좋을 게 없었다. 철없는 몇몇 시청자들이 왜 우리 비제이 욕했냐면서 채팅방에 따지고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싹수 노란 몇몇 시청자들 때문에 싸울 이유도 없는 비제이들이 서로 다투곤 하였는데, 쿠왁과 츤고딩 역시 그런 이유로 마찰을 붙게 된 적이 있던 것이다. 그 사건에 대해선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주리라.

현대왕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꾸했다.

“알았어. 그럼.”

“…….”

“꺼져.”

그리고 통화를 종료한 현대왕이었다. 얼마지 않아 츤고딩에게서 계속해서 스카이 라이프로 연락이 왔지만, 현대왕은 쿨하게 씹어 주었다. 그리고 ‘우와, 현대왕 진짜 차도남이다.’라면서 감탄을 하고 있는 시청자들을 향해 현대왕은 픽 웃으며 한 마디 하였다.

“보이시죠? 이게 바로 밀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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